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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룻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신앙순례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5-10-27 (화) 14:41 8년전 3019  

룻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신앙순례              룻기 1: 15-18

2015 11 01

 

1. 시작의 이야기

구약성서 가운데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한 작은 룻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사기와 사무엘서는 다 전쟁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 중간에 참으로 인정 어린 미담의 하나인 룻기가 있습니다. 마치 가시밭 사이에 한 송이 백합화와도 같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는 약 3800여 년 전, 유대지방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때의 사회는 혼란하고 불안하던 때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룻기를 목가적이라 부르고 사랑스럽고 잘 짜여져 있어서 소품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고, 현대인들에게 단편소설로 표현하였습니다. 괴테는 룻기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성서의 역사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4장 참조).

룻기는 여호와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방여인이 여호와의 인도를 받았다는 사실은 특수한 예입니다. 그 점에서 룻기는 사실 요나서 바로 뒤나 바로 앞에 위치해야 하며 폭넓고 자유로운 정신의 증거가 됩니다. 룻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날개아래에서 안식처를 찾은 것에 대하여 찬양을 받습니다. 참된 종교는 이스라엘 밖의 세계에도 널리 퍼진다는 이런 사상이 룻과 함께 언급하는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계보에 나온다는 사실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룻기 4:17과 비교)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상황아래에서 결정적인 힘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이 바로 룻기의 교훈입니다. 룻기의 결론에서 분명해지듯이 비슷한 요셉 사건에서도 개인적인 사건 속에서의 그런 인도가 구원 사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국제주석>, 룻기 참조)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 진리의 합리화인데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회가 생명을 걸고 씨름해 온 진리의 특수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의 길은 인간의 합리화의 요구인 경계선인데, 룻기에 기록되어 있는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넘는 경계선이란 룻의 상황과 비교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룻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신앙순례라는 제목입니다.

 

2.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는 신앙의 길에 대한 적절한 유사, 아날로기아 입니다. 이제 룻기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가 보기로 합니다. 사사시대에 유대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은 흉년을 만납니다. 그는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물질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축복받는 가정이었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인 나의 기쁨 또는 나의 즐거움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이들은 모압에 와서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오르바요 하나는 룻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욥의 경우와 같이 축복받은 자로부터 저주받은 자가 됩니다. 그의 남편이 먼저 죽더니 그의 두 아들이 또 잇달아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을 떠나 유대를 향하여 길을 가다가 경계선에서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이젠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복된 삶을 다시 찾아라. 왜냐하면 나오미는 유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을 위해서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약속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며느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저희는 어머님을 모시고 어머니의 겨레의 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한번 친절한 설득을 합니다. 그렇지 않다. 이처럼 여호와께 얻어 맞은 나를 따라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제발 나를 더 괴롭히지 말라. 친정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결혼하고 다시 새 삶을 찾아야지. 그들은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일어나서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 겨레에게로 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다시 권면했습니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제 신에게 돌아가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나 룻은 설득을 당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지 마십시오. 이때의 룻의 대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인격적 충성의 서약처럼 들립니다. 어머니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려 합니다.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님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룻기 1:16-17). 룻은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이삭을 줍고, 굶주리며, 어머님을 섬기다가 결국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이 다윗왕의 증조 할아버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3. 합리성과 계산의 세계

룻은 나오미를 따라서 경계선을 넘어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르바는 부덕한 여인이고, 룻은 유덕한 여인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르바의 결단은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의미에서 보아도 악한 결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단입니다. 오르바는 룻 못지않게 그의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편이 세상을 따난 뒤에도 그녀는 시어머니(나오미)를 따라서 경계선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는 예의 바른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건너가는 마지막 경계선에서 나오미에게 설득을 당해서 모압으로 돌아간 오르바는 충분히 그녀의 의무를 다했고,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 다만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권면에 설득을 당했고, 룻은 설득을 당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오르바와 룻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르바가 설득을 당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합리성의 논리, 계산의 세계라고 생각됩니다. 너희들은 돌아가야 한다. 얘들아, 어쩌자고 나를 따라 가겠다고 하느냐? 아가야, 어서 돌아가거라. 나는 이렇게 늙어 이젠 재혼할 수도 없는 몸이다. 나에게 무슨 희망이 더 있느냐?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께 얻어맞은 몸이다. 이것은 너무나 친절하고 동정에 넘치는 설득입니다. 바로 이 설득이 문제입니다. 설득이란 합리성의 논리, 계산의 세계입니다. 문제는 오르바가 이것에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이 합리성과 계산의 세계에서 보면 나오미를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와 나오미가 가는 곳, 거기에는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의 논리, 계산의 세계는 신앙의 모험과 사명의 길에 있어서는 친절하고 유익한 호감이 갖는 것 같이 보이나, 그러나 가장 무서운 유혹입니다. 유혹이 참으로 유혹이 되는 것은 총과 칼을 가진 무서운 원수의 모습이 아니고 동정자의 모습, 친구의 모습, 웃는 미소의 유혹입니다. 성서에서 가장 위험한 유혹은 무서운 악마의 모습이 아니고 웃는 모습으로 가장한 사탄입니다. 사탄은 반드시 우리에게 폭력과 위협의 형태로만 접근해 오지 않습니다.

성서이야기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악의 형태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게 한 뱀의 유혹입니다. 악은 하나님을 반역할 수 있는 합리성을 제공합니다. 이와 같이 뱀은 아담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지?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 거야. 이 합리성에 아담은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에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유혹자는 배고픈 자의 동정자로, 예수를 가장 존경하고 위해주는 자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굶주릴 필요가 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십시오. 이것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음직한 합리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고난의 길을 버린다면 메시아의 사명이 무너지지 않는가? 이것이 실패되자 유혹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천사가 발이 땅에 부딪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실 겁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서 아주 함정에 빠지기 쉬운 합리성이었습니다. 이것도 실패하자 유혹자는 최후적인 유혹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내게 절하시오. 그러면 천하의 영광을 드리겠소. 영광을 바라는 인간에게는 더할 바 없는 유혹입니다. 예수는 이 세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리고, 목마르고, 수치와 천대, 고난과 아픔, 하나님께도 저버림을 받는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걸어 갔던 것입니다.

 

4. 약속의 세계, 하나님나라의 비밀

우리가 룻기에서 얻는 또 하나의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르바는 나오미와 같이 살았지만 진정으로 나오미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속해 있는 베들레헴이 어떤 곳인가, 나오미의 백성이 어떤 백성인가, 나오미의 역사가 어떤 역사인가를 오르바는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합리성의 세계, 계산의 세계,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사랑이지 자기를 희생하는 그러한 사랑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르바가 나오미를 따라 모압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를 사랑했으나 아직 계산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르바는 약속의 세계, 영의 세계, 은총의 세계에서 하나님나라의 증인으로서는 추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것은 비범한 것, 합리성을 넘는 것,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육의 세계, 물질의 세계, 높은 정신의 세계, 계산의 세계, 인과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나라의 세계, 영의 세계입니다. 성서가 오르바를 추천하지 않고 룻을 추천하는 것은 합리성의 세계, 계산의 세계에 항거하고 나오미를 따라가는 사랑의 어리석음의 논리 때문입니다. 룻이 모압을 택하지 않고 베들레헴을 택한 것은 계산의 세계가 아닌 신앙과 영의 차원입니다.

외국 땅 베들레헴과 나오미에게서 룻이 기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향의 집과 부모형제, 안전한 미래가 아니고, 외국인, 수치, 나그네의 삶, 가난, 굶주림, 애씀 뿐이 아닐까? 그럼에도 룻이 모압의 경계선을 넘어서 베들레헴까지 나오미를 따라간 것은 의무를 넘는 일입니다. 룻은 완전히 나오미의 삶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집이 그의 집이고, 나오미의 고향이 그의 고향이고, 나오미의 고난이 그의 고난, 나오미의 운명이 그의 운명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서 어떤 미래의 희망을 보고 따른 것이 아니고, 목적이나 희망을 계산에 넣고서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순히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룻은 가난과 수치를 무릅쓰고 나오미를 위해서 이삭을 줍습니다. 룻은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가지지 않고 늙은 보아스를 택하여 죽은 남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택합니다. 그녀는 약속의 계승을 위해서 자신의 청춘마저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룻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고 타자(나오미)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추천하는 사람입니다.

룻기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세속의 역사가 거룩한 역사로, 자연의 영역이 은총의 영역이 됩니까? 어떻게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합리성의 세계에서 은혜와 사랑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경계선을 넘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앙의 길이며 역설적인 신앙인의 사명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길과 사명적인 삶에도 오르바의 논리가 아니고 룻의 논리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창세기 11 31-32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바벨론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그의 아버지(데라)는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찾고 있던 알지 못하는 약속된 가나안을 향해서 고난과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생소한 그곳으로 떠날 것인가? 기름진 고향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안전한 삶을 찾을 것인가? 아브라함 앞에 놓인 상황은 오르바와 룻의 상황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갈림길에 있을 때 결정적인 하나님의 부름이 왔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12:1).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가나안을 찾아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도 신앙의 결단과 부르심의 새 출발을 감행하여, 모압의 경계선을 넘어서 저 베들레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신앙모험을 해야 합니다.

 

5. 한국 개신교 전래 당시 선교방식과 여성 이야기

한국에 찾아온 선교사들은 긍정적인 면이 많아 크게 이바지 하였지만 부정적인 비판할 면도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 근대화와 교육과 의료, 사회문화전반에 영향을 미친 그들의 헌신적인 면을 큰 교훈으로 삼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인 신앙유형, .속을 분리시키는 신앙유형을 갖고 있었고, 피선교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전환에 대해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보다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조선인을 대한 것 같은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즉 그들 자신들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장에 놓고 겸허하게 조선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는지는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유대. 기독교에 입각한 서구의 문명을 복음(케리그마)과 쉽게 동일시해서 서구적인 문명을 척도로 해서 한국의 상황을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우월한 입장에서 미개한 토착민들을 상대로 은혜를 베푼다는 식의 자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월한 입장에서 은혜를 베푸는 식의 선교사들의 태도는 그들의 생활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가난한 조선인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그들은 고난 받는 민중이 그들과 같은 존엄한 인간이요, 이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다른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언더우드는 백만장자의 선교사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었습니다.(F.H.해링톤, 이광진역, <개화기의 한미관계> 서울, 일조각, 1983, 102, 이우정, <한국기독교 여성 백 년의 발자취> 1985, 민중사, 27에서 인용하고 있음)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셨듯이 그들 스스로를 낮추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대다수 선교사들이 거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12년 간호원이며 선교사로 온 서서평 선교사는 처음 얼마 동안 군산과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광주 제중병원 간호원장으로 있으면서 의료선교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기에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정성을 다 바쳤다고 합니다. 가진 것을 전부 나누어주는 서서평 선교사에게는 늘 가난이 따랐고 언제나 한국사람과 같이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193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집에는 밀가루 두 홉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끝내 병명을 밝히지 못하여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남은 육체도 의학연구에 써달라고 유언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서서평(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은 작은 예수로 살다간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학교 (한일장신대 전신)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해 이 땅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전라도 일대의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 살다가 이 땅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광주에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나환우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습니다.

서서평이 활동했던 광주. 전남은 1930 45만 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 명, 걸인이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서서평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전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달 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서평은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엄마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 감을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4만 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 받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깨웠습니다. 서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 밑에 걸려있던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서서평의 후계자들로는 유화례, 김필례, 아라, 고든 에비슨, 이현필, 강순명, 최흥종, 이준묵, 고허번 등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님을 따라 광주. 전남지역을 섬겼습니다. ( 양창삼, <조선을 섬긴 행복-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2012, Serving the People, 참조).

 

6. 마감 정리: 룻기의 중요한 교훈들

1) 사랑과 인정에 관하여;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그들 고부간에 맺힌 사랑과 인정을 교훈합니다. 자부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 위해서 희생하려고 합니다. 모압의 경계선 요단강이 문제 아니고, 낯선 외국이 문제 아니고, 생사를 같이하려는 결심이 동서고금에 고부관계의 본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서로간에 신뢰하며 사랑하고 최선의 삶을 본보여 주었습니다.

2) 의리관념에 대하여; 룻과 나오미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는 사랑과 인정을 넘어 의리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부부일신을 의미합니다. 남편은 부모를 봉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이 만일 죽으면 그 며느리가 남편의 책임을 지는 것이 의리요 마땅히 할 일입니다. 룻의 중심에는 이런 의리관념이 있은 것입니다.

3) 나오미와 룻의 신앙에 관하여; 이 가정이 이렇게 사랑과 의로 뭉치게 된 또 다른 원인의 하나는 그들의 신앙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음 외에 어머니를 떠날 것이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룻기 1:16-17). 모압 백성은 원래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룻도 물론 이런 우상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룻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그것은 나오미에게 전도를 받고 룻의 마음속에 여호와 신앙을 굳게 심어진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고부간은 신앙으로 뭉친 가정이 되었고 신앙으로 하나가 된 가정입니다. 여러분! 시어머니들, 며누리들, 남편과 아내들, 부모자녀들이여, 상대에게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며 본 보이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참 신앙은 가족들에게 참으로 전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룻과 나오미의 가정에는 사랑과 의와 신앙이 있는 여호와께서 함께하는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극복하며 그것들을 발판 삼아서 새 출발, 새 역사를 이룩하는 가정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룻기는 여호와를 인도 자로 삼은 자와 그 나라는 복되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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