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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한국장로교 신학형성의 공로자 박봉랑박사님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5-11-02 (월) 09:47 8년전 2585  

한국장로교 신학형성의 공로자 박봉랑 박사님        2015년 10월 20

                                                      기영 (전남노회 원로목사)

1. 시작의 말

박봉랑 박사님은 보기 드문 진정한 신학자, 목사요 교수이셨습니다. 그의 신학 하는 삶의 자세와 끈질긴 신학 하는 열정, 그리고 신학적 형성과 과제수행에 사명적 삶으로 본보여 주셨습니다. 박봉랑 박사 15주기 기념 추모집 발간에 즈음하여, (이하 박박사로 호칭) 당시 한국교회 교리논쟁과 교단분열사건에 제시한 성서 영감론과 한국교회에 끼친 신학사적 의미와 그가 지향했던 에큐메니칼 교회상 정립을 위한 교회의 책임소재에 대한 자의식도 크셨음을 회상 합니다. 박박사는 한국장로교, 기독교장로회 신학형성의 공로자입니다. 그는 한신대학교 (당시 한국신학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였고 때로는 설교하는 목사로,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학 하는 삶에 충실한 실천하는 신학자이셨습니다.

2. 칼 바르트의 성서 영감론과 관련하여

1947-1953년까지 6년 동안 한국장로교회는 큰 사건이 된 교리논쟁과 분열의 아픔을 겪습니다. 이것은 신학사적 의미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에 해당하는 신학의 해방 사건의 현대적 모형이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장로교의 근본주의신학으로부터 개혁교회 본래의 신학으로의 혁신의 진통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다같이 배격하고 다시 종교개혁의 원리로 돌아가려고 했던 현대의 칼빈의 종교개혁적 신앙의 부활을 지향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박박사는 젊은 교수 신학도로서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을 자세히 지켜보면서 반드시 신학적으로 이 사건을 정리하여 보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는 한국장로교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원인이 성서 영감론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분쟁사건은 실로 신학의 율법주의적, 교권주의적, 정통주의적 사고방식의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에소더스 사건에 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박봉랑, <신학의 해방> 70) 회고하면 미국 메이첸의 근본주의 영향은 당시 주류교권 세력인 평양신학교 계열의 정통보수주의적 서북지방장로교였습니다. 이들은 바르트 등의 신 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으로 둔갑시켜 매도하는 신학적 굴절상황을 연출시킨 기형적 신학을 고착화시켰다고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박박사는 <칼 바르트의 성서 영감론>으로 1958 6월 하버드대에서 신학박사(Th.D)학위를 받았습니다. 박박사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는데, 특히 바르트의 성서 영감론을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자들과 칼빈의 성서 영감에 뿌리를 두고 그의 신학을 전개하여 나갔습니다. 개혁교회적 전통의 특징을 표현하는 몇 가지 중심원리를 찾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학적 형성에 안내와 봉사를 하셨습니다.

박박사는 해방정국, 국토분단과 6.25전쟁의 비극, 국토폐허, 수백만 사상자, 일천만 피난행렬의 과정 등을 놀라움과 부끄러움으로 회고합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안과 밖의 비난과 스캔들 가운데서 분열했으니 어이할 것인가! 그는 칼빈 신학의 현대적 부활, 장로교신학의 현대적 혁신으로 칼 바르트의 성서 영감론을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신학적 대답으로서 제시한 것입니다. (<신학의 해방> 36, 37)

또한 박박사는 하나의 거룩한 에큐메니칼 교회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학의 해방> 360-63) 한국장로교의 연합은 통일의 염원, 새 세기에 한국교회에 주어진 지상의 과제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의 거룩한 에큐메니칼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교단의 신학적 형성과 나아갈 교회의 비전, 에큐메니칼 교회상의 방향을 제시해 주신 박박사님을 회상하며 자랑스럽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박박사님의 이러한 한국장로교회에 끼친 신학적 과업에 대하여 부족한 필자로서는 감히 취급할 수 없지만, 이어지는 본회퍼의 신학과 삶, 그리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관련하여 간단하게 해설을 조금 더 하고자 합니다.   

3. 본회퍼의 신학과 삶과 관련하여

한 인간, 한 인물의 인격과 사상의 이해란 그의 삶과 긴밀히 관련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전문화가 다양한 시대에 한 인격 안에서 높은 지성인 신학자이며 직업인 목사인 동시에 실천자 행동의 사람으로 나타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일 경우, 셋 가운데 하나가 제대로 되는 것만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본회퍼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단순한 신학자로서나, 목사로서 또는 행동가로서의 한 사람이 아니고 이 셋이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본회퍼, 그는 대학의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교목으로, 교회의 목회자로, 또는 고백교회의 항거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자로서 충실한 목사였습니다. 그는 신학자와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삶의 마지막 몇 해는 그가 쓴 글들을 따라서 행동으로 산 행동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과 행동과 신학적 영향은 히틀러 나치 독일의 관련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깝게도 39세의 젊음에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날 무렵 사형을 당했습니다. 순교신학자 본회퍼는 하나님 말씀에 철저한 복종과 애타는 이웃사랑 때문에 반항과 복종 사이에서 스스로 반역자의 최후를 맞아야 했던 현대판 예레미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살이 속에서 본회퍼가 더 그리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현존과 그리스도인 실존으로 역사의 증인 노릇을 한 때문입니다.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은 시퍼런 유신헌법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박박사는<기독교의 비종교화-본회퍼연구->의 노작을 출판하면서 나는 이 책을 고난 받는 우리교회와 겨레 앞에 받칩니다 라고 헌정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그가 날마다 서야 할 곳은 설교단 이나 신자들의 가정이 아니고, 강의실서재였으나 그의 관심은 항상 교회일선에서 수고하는 목회자들과 교회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박박사는 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강의실과 서재에서 본회퍼 신학과 삶을 한국교회에 이식 접목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후학들은 박박사님이야말로 참으로 한국교회의 어려운 상황에서 온갖 힘을 다하여 본회퍼의 신학과 삶을 한국교회에 이식, 접목시키는데 기여한 공로자! 잊을 수 없는 매우 귀한 신학자 목사 교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관련하여

1970 9월에 장공 김재준목사님의 <3>지가 창간 되었을 때, 나는 편집과 판로개척에 얼마 동안 참여한 바가 있었습니다. 박박사님은<3>지 초창기에 신학적인 해설과 강단의 글들을 매번 기고하셔서 그 글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과업에 참여하신 분들과 뜻을 함께 하셨습니다. 창간호에는 희망의 신학을 향하여 라는 신학해설에서 60년대에 신 죽음의 신학 세속화 신학이 등장하던 때에 희망의 신학으로 70년대를 맞이하게 되어 상징적 신학적 언어가 바뀌었다고 하며, 신의 죽음, 현재, 세속화가 아니고 희망, 미래, 혁명과 새로움!이 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박박사는 이 희망의 신학 해설에서 적어도 다음의 특수한 점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1) 예수의 부활의 사실성이 강조되었고 미래의 오심의 새로움입니다. 이 현대과학의 홍수 속에서 부활의 실재와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와 만물의 갱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출연- 새 역사의 완성과 하나님나라의 내림을 인류의 궁극적인 소망으로 내세운 것인데 참으로 놀랄 만 합니다. 2) 현대기술사회에서 교회의 자리를 찾아 준 점입니다. 세상과 유리되어 개인영혼의 위안과 종교적 향락의 자리로서의 교회, 조직화, 제도화한 기계적인 교회의 삶은 2의 바벨론 포로라고 단정합니다. 교회는 그것에서부터 끌고 나오는(Exodus)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약속된 가나안으로 끌고 나아가는 사명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또한 그릇된 이념아래서 유토피어니즘의 착각에서 강력한 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미래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와 약속된 하나님나라 성취에서 완성됩니다. (<3> 70년 창간호) 그는 <3>지에 그 외에도 부활과 정치신학(71, 4), 생태학과 신학(71, 5) 그리고 여러 편의 강단 등을 기고해 주었습니다.

5. 박박사님에 대한 회상과 추모

나는 박박사님을 항상 친근히 여기며 만나 뵈었고 그의 신학 하는 삶을 존경하면서 가까이서 지켜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북교회에서 경건히 예배하는 내외분을,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고 온유 겸손하신 선생님으로 회상됩니다. 집을 방문했을 때는 책으로 가득 찬 서재 같은 방에서 앉아서 사용하는 책상에서 책을 펴고 번역내지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당시 모두의 생활이 어려웠지만 박박사님 내외분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에 와서 박박사님의 5권의 방대한 책들을 펼쳐보며 읽어보니 진짜 알곡의 신학자가 그분 말고 누구겠느냐는 감격, 감사함과 존경스러워질 뿐입니다.

그의 아드님들, 한 분은 미국에서 교민 위한 목회사역에 종사하고 있고, 박남현목사는 행화정교회를 건축하고 참신하고 중견 자로 목회사역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서재의 책들을 보관하고 유지를 지켜가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보입니다.

1965년 경인가 싶은데 박박사님은 건국대학교로 옮겨가셨고 귀한 선생님이 떠나시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웠던 기억이 회상됩니다. 1999년에 나는 미국에 나가 미국장로교 소속교단에 목회를 하는 중에 박박사님의 서거소식을 <기장회보>에서 접하였습니다. 존경스럽고 하늘처럼 높이 보이기만 했던 스승님이라 회상하며 진심한 마음을 담아 추모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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