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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6-02-23 (화) 12:33 8년전 4370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3:6-10                                                                2016.02.21. 박용래 목사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최초로 사람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3:9,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4: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가인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이 두가지 질문은 아담과 가인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오늘은 두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에 영생의 길이 있고, 또한 영생 얻은 자의 삶의 자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낯을 피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숨게 되었습니다.

3:8~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일반적으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습니다. 눈을 마주 쳐다볼 수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8절 하반 절에 보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숨었다는 것은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먹해 졌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는데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동산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네가 강가에 있느냐? 네가 동산나무 뒤에 있느냐? 하는 어떤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너는 떳떳하게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자리에 있느냐?

너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너는 지금아버지하고 부르면, 오냐하고 응답하시는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사느냐? 바로 그것을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떳떳한 관계를 맺고 사느냐? 하나님의 얼굴과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부끄러움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고 사느냐? 그런 질문인 것입니다.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3~7), 잃은 돈의 비유 (8~10), 잃은 아들의 비유(11~32)가 나옵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적인 주제는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위치를 떠난 것들이, 바른 관계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우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양이 목자의 우리 안을 떠나면 양이 아닙니다.

돈은 주인의 주머니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위치를 떠난 것 때문에 타락하게 되고 범죄 하게 되어 관계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이유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재산을 둘러메고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고 해방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 아버지의 책망, 아버지의 지시,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로서 지켜야 할 도리 책임감으로부터도 해방입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사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사고, 놀고 싶은 것 마음대로 놀고, 입고 싶은 것 마음대로 입으며, 아버지의 눈치 안보고 사는 완전 자유인으로 아버지를 떠나갔습니다. 러면 아들은 참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즐거울 것 같습니다. 신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행복인 줄 알았는데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일 것 같았는데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즐거울 것 같았는데 그것은 한때일 뿐 슬픔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날 것 같았는데 신나는 것은 잠시일 뿐 고통이 되어 밀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결과는 굶주림 불안과 고독 실패와 죽음뿐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다시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져서 즐겁고 행복하고 신나고 자유를 누릴 줄로 알았는데 무서운 불안과 공포와 죽음뿐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지금 어느 장소에 있느냐? 는 질문이 아니라 왜 네가 숨어 있느냐?

네 죄가 무엇이냐? 왜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고 숨어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아담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2.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음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는 것이 사는 길이 아니고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날 용서해주실까? 하나님을 두려워 피하지 말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을 두려워서 피하고 숨지 말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과연 아버지가 나 같은 탕자를 아들로 맞아 주실까?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실까?

15:20~24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제가 죄를 많이 졌습니다. 이젠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 여겨 주 십 시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 하셨습니까?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잔치였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탕자의 비유의 가장 감동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돌아오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바르게 살았는지, 깨끗하게 살았는지, 들추어내고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의 과거를 묻는 내용은 단 한글자도 없습니다.

 

아들은 이젠 아버지의 아들이란 자격도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여겨 주십시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죄를 안 지으면 내 아들이고 죄를 지으면 내 아들이 아니 더냐 !

너는 내 아들이야! 잘 돌아왔다.”그리고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회개 하고 돌아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시 회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최초로 질문하셨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진정으로 아담과 하와가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범죄하고 숨어 있는 인간을 찾으시고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들아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음성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A Walk to remember,

언제인가 외국 영화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한 목사님의 딸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딸의 소원은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기적밖에는 더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고 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기적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그래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짧은 치마 짧은 머리로 다닐 때에 이 학생은 늘 스웨터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면서 내가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좋은데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는 약속을 한다면 친구가 되자고 말을 했습니다. 친구가 되는 조건이 사랑하지는 않기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같이 하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사랑은 싹이 터서 점점 깊어졌습니다. 마침내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학생은 이것은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사랑은 안 된다고. 그래도 남자는 사랑을 고백을 합니다. 여자는 남학생에게 자기만의 비밀을 털어 놓았습니다.

내가 사랑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백혈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라고 털어 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남자가 너무 많이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백혈병 환자인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자고 청혼을 합니다.

이런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아마도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럽게 생각되었겠어요.^^

남들처럼 대학 갈 생각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나는 이렇게 여기서 인생을 끝내야 하는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좀더 살고 싶고, 나도 행복 하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스럽게 생각하며 불평하겠습니까?

이 남자와 여학생은 괴로워하면서 많이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루는 여학생은 남자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고, 당신 같은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서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너와 같은 착한 사람을 내게 주어서 사랑을 알게 해주시고 이 어려운 고통과 고독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너를 선물로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감사 감사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큰 감동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사는 행복은 환경이 좋은데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다 축복이요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인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여학생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할 때 애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딜 수 있도록 남자친구를 만나게 해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내 정체가 무엇입니까?

피하지 말고 숨지 말고 자신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쓴 수필 가운데에 의사들이 제일 괴로운 시간이 언제인가 하면 환자를 다 진찰하고 나서 그 환자의 병이 깊은 것을 알려줄 때라고 합니다.

이제 진실을 말해줘야 할 때 의학적으로 당신은 6개월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며칠밖에 살 수 없을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형선고 같은 진단을 내릴 때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무능함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더 괴로운 것은 이 분이 이 병을 가진 것은 대체로 보면 어떤 큰 충격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이제 발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환자가 죽고 살고를 떠나서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남은 인생을 좀 더 뜻있게 의미 있게 소중하게 좀 더 값지게 살아왔을 터인데 그래서 의사는 괴롭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네가 지금 어느 지경에 있느냐?”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이 무슨 짓을 했고 어디 있는지를 모르시겠습니까?

알고 물으시는 것은 아담 스스로 알고 인정하고 말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대답은 무엇입니까? 숨기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고백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대답을 기다리며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아담은 대답을 피해갑니다.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의 대답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하더냐? 왜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왜 불순종했느냐? 왜 죄를 지었느냐?

그래도 아담은 끝내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잔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있을 때에는 불안과 두려움과 괴로운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숨고 피해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옴으로 잔치 인생 축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담은 두려워하면서도 그 원인을 감추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움의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중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병의 원인을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무려 70%가 한 번 이상은 점을 본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69%는 부적을 가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를 조사해 보면 아이들 주머니마다 부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국회 당에서 굿판을 벌린 것 기억하시지요? 왜들 이럽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두렵고 사람이 두렵고 질병이 두렵고 환경이 두렵고, 총선이 두렵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숨고 피하려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로 인하여 잘못된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왜 두려워하고 왜 초조해 하고 왜 피하고 왜 숨으려 하는 것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무엇 때문입니까?

때문입니다.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을 멀리하면 어떤 현상이 올까요?

내적으로는 긴장, 불안, 압박, 좌절, 절망, 방황, 자학, 고독, 불만, 도피 등의 그늘진 현상이 일어납니다.

외적으로는 미움, 증오, 투기, 질투, 경쟁심, 원수맺음, 저주, 악담, 욕설 등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탕자처럼 방황 할 때도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음성입니다. 범죄하고 불순종하고 타락한 것에서 회개하고 돌아와야 산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공포와 불안과 방황이 끝나고 치가 벌어지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순절기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회개하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잔치 인생, 축제 인생,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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