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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솔문

모자람의 위안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6-04-21 (목) 08:55 8년전 2247  

10년 전 회보에 쓴, <모자람의 위안> 책에 대한 서평입니다.

 

 

. 삶 읽기

 

요즘 저는 예배 인도하면서 사도신경을 암송하기 않고 성경 표지에 적힌 것을 천천히 낭독합니다. 아직 외우지 못했냐고 질타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습관적으로 암송하지 않고 의미를 마음에 새기다 보니, 속도 잃은 자전거처럼 자꾸 틀리게 되더군요. 마음을 다해 고백하면서도 인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읽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유가 솔직히 이것만은 아닙니다. 점점 기억력에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실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방책이기도 하지요. 이런 한계가 감지되면서 막연히 미루어두었던 어떤 계획도 살며시 접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감이 있지만 적어도 육신은 꼭지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신문에서 가끔 자신을 진단해보는 체크리스트를 제공합니다. 한 달 전 일중독(workaholic) 알아보는 자가진단을 해보고는 두 가지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는 점수가 제 인생에서 매우 드문 만점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헌신과 인간적 성실함에 수반되는 부작용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전문가의 경고 때문입니다. “일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건강 그리고 동료가족과의 화목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근본적인 원인이 완벽주의적 강박 사고에 있다고 합니다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26:41 공동번역) 부조화 탓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능력의 한계라고 할까요.

 

도덕성의 모자람(imperfection)도 간혹 저를 낙담케 합니다. 주보에 목회단상같은 것 쓰지 않겠다고 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신문칼럼에 쓰인 글과 필자의 실제 삶 사이의 극명한 괴리에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참회록이 아닌 한, 신변잡기에서 자기기만과 위선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칼럼도 예외가 아니겠지요. 이런 문제를 경계하고 제 삶에서 언행의 괴리를 최소화하려고 애를 씁니다만, 조금씩 쌓인 눈에 비닐하우스가 갑자기 주저 않듯이 조금씩 누적된 위선 때문에 강단에 서기가 문득 주저되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한 젊은 교육학자를 초청하여 자녀 교육을 위한 특강을 했다고 합니다. 간단명료한 이론을 자신감 넘치게 설파한 강의가 끝나자 중년의 한 교인이 와서 밀담 같은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실례지만 자녀들은 몇 살 정도 되었습니까?”. 어린아이라는 말을 듣고 질문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돌아가는데요, 그 미소에 이런 메시지가 담았을 겁니다-“살다보면 인생살이가 이론처럼 되지 않는다는 깨닫게 되시겠죠”. 제가 그 과정인 듯합니다. ‘긍정의 힘으로 외면했던 모자람과 한계를 직시하면서 인생 선배들이 겪었던 이런 저런 한계들을 차근차근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불패(不敗)의 신화가 넘쳐나는 세태에서 지금 연습중인 삶의 태도는 패배주의적 퇴물로 간주됩니다. 모자람은 우리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기에 무조건 나쁜 것, 타파되어야 할 과제로 설정됩니다. 성공지상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지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모자람의 위안>에 의하면 이런 태도는 삶의 진실과 유리되어 있습니다. 죽음처럼 한계는 우리 인생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한계들을 통해서 예기치 못한 선물과 위안을 주시고, 한계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한계를 부정하는 삶이야말로 불완전(imperfection)한 삶인 것입니다.

 

이 책은 살아가다가 봉착하게 되는 모자람과 한계 속에서 요셉처럼 주님의 숨겨놓은 은총을 발견하는 안목과 믿음으로 상황을 뒤집는 비결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 책 읽기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늘 이런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듯 가장하며 살아갑니다. 한계는 불편하다 못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려 듭니다. 그러나 효과는 일시적입니다. 뒷심은 진실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한계를 감안하고 그 현실에 적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낙관 일변도의 문화가 그런 태도 계발을 방해합니다. 완강한 적극적 태도가 삶의 많은 역경을 헤쳐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전체를 말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결심이 단호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쏙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격을 이루려면 자신의 경험 전부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즐거운 일뿐 아니라 괴로운 일도, 훌륭한 일뿐 아니라 창피한 일도, 빛뿐 아니라 그림자도, 가능성뿐 아니라 한계도 인정해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합리화하거나 좋은 일인 척 둘러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계 자체가 내 삶이라는 예술품에 기여하는 몫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이집트로 온 야곱과 감격스러운 상봉을 한 후 요셉은 형 일행과 바로의 만남을 주선합니다(46:28-34). 그 전에 바로의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예행 연습시키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는 생업(목자)을 강조하라고 조언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주류 문화로부터 그 구성원이 초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셉이 이집트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총리로서 백성들이 혐오하는 자신의 가정 환경을 밝히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단점(imperfection)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점에게서 장점을 발견합니다.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격리된다는 그 단점에게서 하나님 백성의 동질성을 유지하게 하는 장점을 보았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요셉의 이런 덕()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하나님이 펼치는 역전극의 바탕이 된 일상입니다. 우리는 불우한 자신의 환경과 한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간 요셉의 신앙적 특기를 주목해야 합니다(39:5, 23). 요셉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시간을 견디어낸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현재 상황을 수용하고 한계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감사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서론 역할을 하는 걸작품의 한계에 이어지는 몸의 한계, 인간관계의 한계, 지식의 한계, 성취의 한계, 도덕성의 한계, 영성의 한계, 로맨스의 한계, 섹스의 한계, 자신감의 한계, 인정의 한계, 돈의 한계, 경쟁심의 한계, 책임의 한계, 자유의 한계, 즐거움의 한계, 감각의 한계, 시간의 한계, 낙관의 한계 등에서 강조되고 있는 주제가 요셉의 이런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극적 사고>와의 차별성이 이 부분에 있습니다. 일상에서 봉착하는 이러한 한계(단점) 속에 내재된 은총(장점)들을 찾아먹자는 것입니다. 한계들이 우리에게 좌절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안이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픈 영화도 아름답고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은 한계의 한계라는 특이한 제목을 가졌습니다. 쇠해 가는 몸, 불행으로 치닫는 관계, 미흡한 성취, 바닥난 돈, 사라지는 시간 같은 한계를 경험하며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조차 한계로 만드시는 주님께서 모든 한계를 치유와 구속과 생명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인정할 때 모든 한계로부터 궁극적 위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계 속에 주어진 현재의 은총을 누려야겠지만, ‘해가 되는 것조차 선으로 바꾸시는’(50:20) 예비하신 미래의 은총도 바라보자는 것인데요, 요셉의 삶에는 이 두 가지 모두가 배여 있습니다.

 

 

. 다시 삶으로

 

수년 전 TV 시사프로그램에 대치동 학원가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과외 뒷바라지에 열심인 어머니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고 묻자 그 분은 어록에 남을 만한 답변을 했습니다-“아이에게 3년 고생해서 30년 편하게 살자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저기에 찍어다 붙인 집사님(추정)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요삼 1:2)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한 신자로서, 중학생 자녀를 둔 한 학부모로서 오히려 공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인터뷰를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방영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빗나간 숭배를 우회적으로 지적한 PD의 저의(底意)에도 깊은 공감을 합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영혼 만사형통 건강을 주고 이것들을 우선 순위대로 배열하라고 하면 어떤 것이 맨 앞에 놓일까요? 대부분 신자가 영혼이 가장 중요하다는 답변을 하겠지만 실제 삶에서는 전도(顚倒)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인 듯 합니다. 최근 어떤 부흥집회에서 자기 교회에는 병원심방이 아예 없다는 강사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괴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오해일 수 있지만, 신앙생활(영혼)을 만사형통과 건강으로 축소(reduction)해버리는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부는 우리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심은 삶 속에서 봉착한 한계와 모자람으로 인해 간혹 요동치는데 일시적일지라도 가치전도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제91회 총회 주제는 전복된 신앙적 가치관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만사형통의 모자람과 건강의 한계에 매몰되지 않고 그 속에서도 영혼이 잘되는, 신앙적 가치관을 바로잡는 지혜를 모자람의 위안에서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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