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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리는 사랑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10-18 (월) 23:28 13년전 2411  
 

2001년 10월 21일(주일) 오후 7 시 반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밤 베다니집 헌신예배


성서본문 : 마가복음 14 : 3 - 9

제    목 : 옥합을 깨뜨리는 사랑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오늘 베다니집을 위한 여신도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오늘은 기장 여신도회가 매년 10 월 둘째주일에 드리는 베다니 집을 위한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베다니 집은 여신도회가 운영하는 집으로써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집입니다. 주로 이 집은 은퇴해도 갈 곳이 없는 여교역자님들이 기거하면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기도하는 곳인데 여신도회가 재정을 마련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기장 여신도회는 전국교회에 요청을 하여 매년 10 월 둘째 주일에 헌신예배를 드리고 거기에서 거두어드린 헌금을 여신도회로 보내어 베다니집을 돕고 있습니다. 이런 취지를 생각하시어 오늘 은퇴 교역자를 위해 정성스런 헌금으 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고향이었고 감람산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으로 유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 근처에서 축복한 후 승천하셨습니다(눅24:50-51). 마르다가 살던 집의 유적으로 전해지는 곳에 현재는 프란시스코파의 나사로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릴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바친 여인이 있었던 곳도 베다니의 한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 주변에 무척 많고 다양한 인물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과 치병이적을 베푸셨을 때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때만도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하며 구름떼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믿던 메시야가 고난을 받기 시작하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주님이 체포당하자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지킬 줄 알았던 베드로마저도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어떤 이는 배반하고 어떤 이는 부인하고 어떤 이는 군중 속으로 숨어 버리고 어떤 이는 도망가고 어떤 이는 다시 고기 잡으로 해변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막강한 힘으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울 줄 알았던 어떤 이는 “메시야인줄 알았더니만 아무 것도 아닌 꽝이었네!”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따라다녔던 기억을 씁쓰레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을 따르던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진 열 두 제자들과 호산나 열광하면서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님 주변에서 차츰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 이르러서는 예수님 주변에 열두 제자들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곁에서 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며 그의 죽음을 가슴 아파해 줄 제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12 제자들은 다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2 제자들이 모두 다 십자가의 현장에는 멀리 멀리 도망 가 있었습니다. 만일 잡히면 예수님과 한 통속이라고 해서 매를 맞을 수 도 있고, 수가 틀리면 십자가에 강도와 함께 못 박힐 수도 있기 때문에 다들 십자가가 있는 그 현장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있는 것이 이 위기를 극복하는 상책이다 혹은 이럴 때는 삼십육계가 최선책이지 자기보신을 하고자 복지부동하면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는가? 마가복음의 십자가 장면에서는 지금까지 전면에  등장했던 소위 ‘남성들 제자집단’이 뒤로 물러나는 대신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한 여인그룹의 사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십자가 장면에서 제자들이 퇴장하고 여인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는 십자가의 중심으로 접근해 가면 갈수록 이제까지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던 이름도 없던 여성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남자들, 이름 있는 제자들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다 멀리멀리 가버렸지만 이름도 빛도 없이 예수님을 따르며 감사하며 섬긴 여자들이 무대의 중앙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여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 장 40 절에서 41 절을 읽어봅시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였다. 그들은 그가 갈릴리 계실 때부터 따라다니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기적을 일으켜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벌하지도 못하는 예수님, 참으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을 이 여인들은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지켰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성냥불 같은 조그마한 빛이라도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역할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를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무척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추어집니다. 고난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치 별빛과 같이 빛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몇 사람이 매우 분개하여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도 더 받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하고 투덜거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참견하지 말아라.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으니 도우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일까? 본문말씀에는 단지 어떤 여인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즉 익명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향유 300 데나리온 어치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1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당이니 한 요즘 아줌마들이 일하면 한 5 만원 받는다고 합시다. 300 데나리온은 1500 만원 정도 될 것입니다. 굉장히 값비싸고 향기로운 기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향유는 문헌에 의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도산으로 수입품이라고 합니다. 아마 대단히 향기로운 기름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혼합물이 아니라 “순”나르드입니다. 100 % 순 진짜입니다. 향유 중에 향유 순 진짜 향유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았다가 절박한 순간에 내어 쓰는 그 어떤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향유이기에 귀중한 옥합에 담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 부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여인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여기서 잠시 궤도를 벗어나 여자들의 일반적인 심리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자가 한(미움)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합니다. 반대로 여자가 사랑하게 되면 눈보라 치는 얼음산 위에서도 그 얼음을 녹이는 훈풍이 되고 온기가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은 분명 예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았는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얼마나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어느 정도 느끼고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 향유가 300 데나리온 어치라고 했는데 양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향유와 옥합은 이 여인에게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향유와 옥합 보다도 더 귀한 것이 그 여인에게 있었다면 있었다면 그것을 예수님께 바쳤을 것입니다. 향유와 여인은 동일화(identify)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향유이고 향유가 여인입니다. 옥합이 여인이고 여인이 옥합입니다. 사실 향유옥합과 여인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은 수천만원 상당의 고급스러운 향수를 부은 것이 아니라 이미 여인이 자신의 전 존재를 주님께 부은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전 존재를 바쳐 사랑한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 약 2 천년동안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어느 시대든지 이 익명의 여인이 한 일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어떤 인구학자의 추정집계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 21 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770 억의 인간이 왔다가 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약 250 억 정도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오늘날 성경이 178 개국 이상 언어로 번역되었으니 지금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여인의 일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드라마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믿음의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향유옥합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여기서 “내게 있는 향유옥합”이란 어떤 것일까 각자에 따라서 향유옥합이 다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게 있는 향유 옥합”이 무엇인가 찾아내는 것입니다. 향유옥합의 해석학입니다. 내게 있는 가장 최고로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동방박사에게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향유 옥합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떤 어린이에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마가복음에 있는 한 가난한 과부에게 향유옥합은 자신이 가진 전 재산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였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향유옥합은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청춘을 포함한 전체의 삶을 향유옥합으로 바쳤습니다. 얼마전 시카고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 신학교 동기인 친구 이종원 목사님입니다. 지금 시카고에서 한 교회를 맡아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카고에도 지금 테러위협이 있었고 그 사람을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제가 버클리 선교사 숙소에 살 때에 이종원 목사님도 두 세집 건너에 있는 선교사 숙소에서 살았습니다. 언젠가 목사님 집으로 차를 마시러 갔는데 그 집 신발장 있는 위에 누가 기가 막히게 운동화를 잘 그려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꺼내어 바로 신으면 될 것 같을 정도로 사실감있게 그렸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렸느냐? 물어 보았습니다. 큰 딸 현진이가 그렸다고 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전자(genetic code)가 딸에게 전해진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저는 목사님과 함께 얘기하는 중에 목사님의 "life history"을 들었습니다. 이종원 여러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번에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하신 이종원 목사님은 원래 미술대학을 가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목사로서 그만큼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국 고등학교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다섯 번 받은 것 외에 그가 받은 트로피와 상장과 메달이 한 방을 가득 메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술특기자로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좋은 대학의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고 각 대학이 그를 장학생으로 스카웃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변화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 학년 때 다녔던 청주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권 재고 목사님이셨는데 그 분은 오랫동안 병으로 앓으신 때가 있었습니다. 이 종원 학생은 중고등부 회장으로서 권 목사님께 자원하여 가서 병수발을 하였고 그 집에서 목사님과 함께 잤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이종원 학생을 불러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네가 가진 성품은 목회자가 가진 성품이니 너는 서울대학을 가지말고 신학교를 가거라!” 말씀하였고 이 종원 학생은 주위의 학교의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모두 나셔서 설득시키려 했지만 이종원 학생은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신학을 택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분토로 여기는 바울과 같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소질과 열망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헌신으로 바쳤습니다. 목사님은 만일 그때 화가가 되었다면 지금쯤은 국전작가로서 중견화가로서 이름을 날리면서 사회적인 위치와 경제적인 안정생활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항상 자신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이 목사님은 넓고 큰 길, 보장된 길을 가지 않고 주님을 위해 길을 간 것은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향유옥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각자에 따라서 향유옥합은 다릅니다.


현재 여신도회 베다니 집에 있는 분들은 과거에 많이 하나님 앞으로도 가셨지만 지금 남아 있는 분들은 즉 은퇴 여교역자들은 일생동안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신 분들입니다. 베다니 집에 계신 분들은 집이 없는 분들입니다. 교역을 하시면서 자기가 살 궁리를 하지 않고 오직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젊음과 청춘 그리고 자신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넣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긴 이들입니다. 이들은 도시나 좀 규묘가 있는 교회에서 섬기는 이들이 아니라 낙도와 섬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교회에서 그야말로 단독 교역자로 봉사하다가 은퇴하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부어 넣은 분들입니다. 모든 것을 바친 후 비고 비인 마음에 항상 가난한 마음으로 더 주님께 바칠 것이 없는가, 샅샅이 살펴보며 뭔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모두를 다 주님께 바치는 즐거움으로 생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사람들은 뭘 좀 바치더라도 자신이 먹을 것 입을 것 새끼들 교육시킬 것, 그리고 여유자금을 회전시킬 것을 생각하고 바치기 바련입니다. 사람들마다 젊었을 때는 자신의 은퇴후 미래를 생각하면서 조금씩 저축을 하거나 은행에 넣어두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보통인데 베다니집에 있는 은퇴 교역자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저축통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지 않고 대부분이 빈털터리로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 있어서 빈털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을 바쳐 자신의 생을 향유옥합으로 바쳐 주님의 머리 위에 부은 그 뜨거운 감격은 아직도 그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이들 은퇴교역자들은 베다니 집에서 함께 모여 날마다 예배를 드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드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바로 평생을 향유옥합으로 바친 아름다운 여인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향유옥합을 바치는 날입니다.  


옛날 제가 살던 칠량에서는 밤에 불을 켤 때 등잔에 석유를 집어넣고 그 밑에 심지를 돋우워 불을 붙였습니다. 아무래도 석유기 때문에 불을 밝히면서 석유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만일 순 나드 향유를 그 등잔에 넣고 심지를 돋우워 불을 붙인다면 그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등잔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고 그 순나드의 향유가 여러분들이 사랑으로 헌신으로 바친 순 나-드 향유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불은 여러분의 헌신을 힘입어 비추이는 그리스도의 빛이라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불이 밝혀지면서 향유가 타면서 내는 방 안 온 천지를 향기롭게 하면서 환한 불로 구석구석 어두움을 밝힌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지난 주 여신도회는 새로 임할 임원을 선출하였습니다. 이제 2 년 임기의 여신도회가 새롭게 출범하게 됩니다. 이제 새롭게 돛을 달고 출범하기에 앞서 여신도회 회원들은 우리가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어떤 여인과 같이 바로 오늘 가나안 교회의 여신도회원들 각자가 그리고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릴 것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있다가 없어질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존재와 일체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드릴 소중한 향유옥합이 무엇일까? 이 시간 조용히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께 바치시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오늘 헌신을 드리는 여신도 회원과 가나안교회 모든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어지는 가장 소중한 것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이 예배를 참예하는 모든 이들의 삶이 바로 향유가 되고 옥합이 되어 아낌없이 주님 앞에 드리는 봉헌제물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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