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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12-14 (화) 11:42 13년전 6859  

2002 년 4 월 14 일(월)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 교회 주일낮예배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말씀 : 시편 37 편 4 절

제 목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이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딱 한 방의 총성으로 어이없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죽기도 하지만 딱 한 절의 말씀으로 한 영혼이 소생케 됩니다. 딱 한 장의 “보물지도”에 의해 수백 억대의 금괴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시편의 딱 한 절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내 팔자를 고치고 내 팔자를 활짝 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딱 스물여섯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려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너의 소원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고 하면 좀 더 쉽게 알 수 있겠는데 왜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하였을까? 이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려라!는 것보다는 좀더 넓은 뜻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글자수로는 아홉자입니다. 이것이 37 편 4 절의 전반절이라면 후반절은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열일곱 자입니다. 37 편 4 절의 문장구조는 무척 단순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면 저가 다시 말하면 여호와가 네 소원을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천지를 지으신 전능자시기 때문에 자기를 인해 기뻐하는 이들의 소원을 기쁜 마음으로 이루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에서 “또”라는 말이 왜 앞에 붙었을까? 이 말은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한번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닌 자주, 반복해서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고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상습적으로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또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와를 기뻐하였던 소년 다윗이 목동으로 있을 때 풀피리를 불면서 꿈꾸었던 소원, 푸른 초장에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상상하였던 앞 날에 대한 비전과 꿈 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혀 알려지지도 않았던 시골 소년을 뽑아서 왕으로 삼아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150 편의 찬양시를 지어 바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바친 시로 인해 또 기뻐하시어 다윗을 높이 올리시고 나중에 그 시를 성경을 삼으실 뿐 아니라 다윗의 행적을 담은 역대기, 열왕기에 수록하여 다윗의 믿음을 알리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수천억의 인류가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을 본받자고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가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데는 딱 한가지 요구사항 밖에 없습니다. 그 요구는 단지 아홉자로 되어 있는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제가 어렸을 때 무척 좋아한 것이 있습니다. 만화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최초로 다섯 살 때인가 본 만화의 이름은 “타탕카”입니다. 그때는 초등학교 다니기 훨씬 이전이었는데 형이 어디에서인가 빌려와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그 불빛에 비추이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인공이 “타탕카”라는 이름의 로봇인데 약 37 년이나 38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주인공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만화 때문에 글자를 좀 빨리 깨우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만화를 엄청나게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5 학년 때인가는 10 원에 20 권을 보여주는 만화집에 가서 20 원을 주고 만화 40 권을 밑에다 깔아놓고 매일 방학 때는 그 만화가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만화를 밑에다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만화를 볼 때 그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돈이 생기면 기뻤습니다. 왜 기뻤느냐? 만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만화집으로 향할 때 무척 신났습니다. 만화집에서 보고 싶은 만화를 추릴 때도 기뻤습니다. 막상 만화를 볼 때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만화가게는 무척 초라했지만 그 집만큼 포근하게 느껴진 집은 없었습니다. 만화를 다보고 돌아올 때 마음이 뿌듯했고 만화에서 나온 주인공이 마치 나인 것처럼 상상할 때 기뻤습니다. 비록 늦게 왔다가 야단을 맞았지만 잠자리에 들면서 만화 볼 수 있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즐거움 가운데 잠들 수 있었습니다. 만화를 보다가 걸려서 공부는 안하고 만화만 본다고 야단을 맞은 적은 부지기수였습니다. 만화에 있는 그림들을 그대로 본떠 그릴 때도 기뻤습니다. 제가 가지고 다닌 교과서들과 노트의 여백에는 거의 만화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린 그림들을 한 삼촌이 보고서 너무도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만화가가 되기로 꿈을 정하였습니다. 초등학교 6 학년 때 양림동에서 살 때 부모님이 앞으로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했을 때 만화가가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만 무척 실망하시고 그 뒤로 세계위인전집 15 권을 사주셨습니다. 그 책을 사주신 것은 만화가가 되려는 그 꿈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부모님이 제가 만화가가 되려는 꿈을 적극 밀어주었다면 저는 지금쯤 잘 나가는 중견만화가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만화라면 뭐든지 좋았습니다. 만화를 보는 것도 좋았고 만화를 빌리는 것도 좋았고 만화를 그리는 것도 좋았고 만화가게를 향하는 발걸음도 좋았고 뭐든지 만화에 대한 것은 모조리 좋았습니다. 저는 만화를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시편 37 편 4 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는 여호와와 관계된 것이라면 모든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저는 어렸을 때 수업시간에 학교수업을 끝나고 바로 만화가게로 달려가 만화 볼 것을 생각만 해도 기뻤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송가 488 장 4 절에 보면 “주 예수 복을 주시고 또 내려 주시네!!” 다시 말하면 복을 주시고 또 복을 주시는 주님을 생각만 해도 맘이 좋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좋으신 하나님!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의 죄를 씻어주시고 나에게 은혜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기뻐하게 됩니다. 찬송가 85 장은 성인 버나드가 쓴 시를 성 아그네스가 곡을 붙인 것입니다. 성 버나드는 너무도 주님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시를 지었습니다. 1 절입니다. “구주를 생각만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여호와를 생각만 해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이를 여호와는 기뻐하십니다. 둘째, 저는 어렸을 만화가게에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즐거웠습니다. 만화가게를 갈 때는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뛰어갔습니다. 한시라도 아껴서 만화를 볼 요량으로 그랬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속에는 여호와의 집 성전에 가면서 기뻐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시편 122 편 1 절을 봅시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 내가 기뻐하였도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갈 때 무지막지하게 기뻐하였습니다. 오죽 하였으면 천번제를 드리면서 매일 매일 성전에 나가는 일을 기쁨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성전에 가자고 하면 기뻐 어쩔 줄 몰라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성전에 나오시면서 가장 기뻐하시는 분 중에 한 분이 기귀남 집사님이십니다. 집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신 분이지만 가장 성전에 빨리 나오시는 분입니다. 어떤 때는 예배시간 한 시간 훨씬 전에 나오시어 주보를 보시고 성경말씀을 찾아놓고 찬송가도 찾아놓습니다. 그리고 바로 기도하십니다. 성전에 나올 때 기뻐하는 것은 성전은 여호와의 전이므로 실상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기귀남 집사님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저는 어렸을 때 만화를 읽으면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어떤 만화는 한번만 보지 않고 두 번 세 번 읽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화요일마다 화요성서통독회로 모이는데 열두명의 회원들이 열심히 성경말씀 여호와의 말씀을 읽어나가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무엘상을 다 읽었습니다만 어떤 분은 자기 혼자 집에서 읽었으면 그렇게 못 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읽은 창세기에서부터 사무엘상까지의 읽은 두께를 살펴보면서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역시 여호와를 기뻐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읽으면서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시편 119 편 103 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도 더 다니이다” 여호와를 기뻐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대하면서 기뻐함입니다. 넷째, 저는 만화를 보는데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야할 때 차비가 생기면 그 먼거리를 걸어가고 그 돈을 아껴서 만화 보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옷을 사줄 때 그 돈이 삼천원이다고 하면 그 돈으로 옷사주지 말고 날 주면 10 원에 20 권 보여주는데 가면 삼천원이면 육천권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돈을 다른데 쓰면 아까웠지만 만화를 보는데 사용한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공부하는데 시간은 아까웠어도 만화를 보는 시간만은 결코 아깝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만화를 보고 다 본 것을 아쉬워하며 아까 본 만화를 또 볼 때가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은 여호와께 봉헌하면서, 여호와께 물질을 그리고 시간을 그리고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바치면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바칠 때는 인색하거나 짜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인색한 마음으로 바칠려면 차라리 바치지 말고 넉넉한 마음이 생길 때 바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하늘 창고에 뭐가 모자라서 그것을 채워 넣기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칠 때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바쳤습니다. 다윗 시대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바치는 것은 자원하여 기쁨으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역대상 29 장 14 절을 봅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렸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봉헌하면서 기뻐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부강하게 해주었습니다. 다섯째, 저는 만화만 보고 좋아한 것이 아니라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닮으려 하였습니다. 저에게 어렸을 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만화는 길창덕 화백님이 그린 “꺼벙이”였습니다. 만화에 나온 인물인 꺼벙이는 1970 년부터 2 년 동안 만화왕국에 연재되었고 소년중앙에 4 년 동안 연재되었습니다만 “꺼벙이”는 그야말로 꺼벙하면서도 뭔가 덜떨어진 아이이지만 무척 매력있는 애였고 저는 그저 꺼벙이가 좋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상무 화백이 그린 만화에서 나온 독고 탁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꺼벙이는 당시 나의 닮으려 하는 모델이었습니다. 그래 꺼벙이를 닮으려고 꺼벙해질려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노력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은 여호와의 말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닮아 가는 일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지난 번 부흥회 때 많은 분들이 창세기 49 장 22 절의 말씀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이 말씀에서 요셉 대신에 자신의 아들이나 딸 그리고 손자나 손주의 이름을 써서 봉헌을 하자 다른 분들도 너도나도 그렇게 봉헌을 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인물들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다윗의 믿음을 본받기를 기뻐하고 솔로몬처럼 지혜있는 자가 되기를 간구하고 요셉과 같이 샘곁에 심겨진 나무로 담을 넘어가는 인물을 닮아가기를 기뻐하느 일입니다. 여섯째, 저는 어렸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만화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집에 최초로 텔레비전이 생겼을 때 김일 선수의 박치기하는 모습이 나와서 한 때 잠시잠깐 텔레비전에 눈이 팔린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다시 만화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만화를 좋아했다는 표현은 너무도 약합니다. 저는 만화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일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호와를 가장 기뻐하는 일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시편 5 편 11 절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기서 보면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를 기뻐하고 주를 기뻐하는 자는 주를 사랑한다고 노래합니다. 사람이 가장 기뻐하는 순간이 언제인 줄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 순간입니다. 여호와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호와와 관계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기뻐하면 어떻게 됩니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군 장교들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이 어렵다는 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건설업자들은 수천억이 들어간다는 2002년 월드컵 경기장을 건설하는 수주를 따기를 원합니다. 고시생들은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모두 다 거머지기를 소원합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녀를 얻기 원하며 애인이 없는 사람은 애인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꿈과 소원들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기뻐하면 여호와께서 그 꿈이 무엇이든지 성취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많은 인생들은 여호와를 기뻐하지 않으면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후반절 ”저가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에만 매달립니다. 여호와께 기쁨은 드리지 않고 자신이 기뻐할 수 있는 소원만 이루어 달라고 매달립니다. 이는 무엇과 같으냐? 화분에 씨를 뿌려 놓지 않고 거기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돋아나서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일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타는 열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 장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 천사를 아브라함에게 보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그 사람이 여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무지막지하게 기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급히 달려나가 몸을 굽혀 절하며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의 예를 갖추어 물을 떠다가 하나님의 사람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그리고 속히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고 버터와 우유를 대접하였습니다.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맛있게 요리하여 여호와의 사자를 최상급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보자 최선을 다하여 최상의 것을 최고의 정성을 다하여 대접한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들의 마음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 감격했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가슴에 직접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셨던지 자신의 사자들에게 명하여 아브라함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다름아닌 대를 이을 후사였는데 사실상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이미 끊어졌서 감히 그 소원을 이룰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여호와께선 자신의 사자들이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대접을 한 것을 기뻐하시어 아브라함과 사라의 오매불망의 소원 백세에 아들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아예 아브라함의 소원이 무엇이냐를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내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고 여호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세 사자들을 잘 대접한 것이 바로 여호와의 맘을 기쁘시게 하여 아브라함의 새애의 최대의 기쁜 소원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그때 나이가 일백이십세에 이르렀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소원을 능히 이루어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여호와를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신 이야기들을 찾았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이 시간 조서구 목사님이 지은 “악보의 쉼표와 같은 쉼”이라는 책에 고사리 교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 속에는 건축헌금에 대하여 나오지만 건축헌금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골 면서기 남편이 살기가 등등하여 아내를 잡을 듯 난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남편: 예수한테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녀! 우리 형편에 건축헌금을 5백만원을 허겠다고 약조를 했다고? 제 정신으로 한 일이엿? 아내: 미안혀유! 50만원 헌다고 적은 것이 실수로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렸내유. 남편: 으이구... 미련한 것이 똑똑치도 못허지! 5백만원이면 내 월급이 몇 달친 줄 알엇? 미쳐도 곱게 미쳐라! (노화중인 노모가 건넌방에서 기어오듯 들어서며) 노모: 아범아! 5 백만원이 아니라 오천만원을 내구서라두 아범 니가 구원을 받으면 어미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남편: 5 천만원을 내구 9원을 받아요? 식구들이 이렇게 돈 계산이 흐리니 똥그래미 하나를 더 붙이는 거라구요! 그리고 그 돈 바치고 9원 받으라구 목사님이 그랬어유? 그럼 그 목사도 틀린 목사예유! 아내: 그런 말씀 말어유, 당신! 목사님이 교회 지라구 명령하신게 아녀유 우리가 고사리 꺽어와 팔아서 교회 짓기루 한 거예유! 나는 동네서두 고사리 잘 꺽기루 소문이 났으닝께 더 많이 꺽어서 바칠 것이구요. 남편: 대한민국 고사리 다 꺽어두 5 백만원은 못 맹글어! 당장 교회가서 5백만원은 똥그라미 실수라고 말혔! 아내: 난 못해유! 무식한 것이 무식혀서 동그라미 하나 더 그려서 시험이 왔지만유 우리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실수를 허셨겠어유. 남편: 뭐가 으째? 목사가 그런 말을 했다 그거지, 책임져라 그랬단 말이지! 내 이 목사를 당장 가서 (벌떡 일어나는 아들을 아들을 붙잡다 노모가 비명을 지르다 쓰러진다) 남편: 아이구 어머니 괜찮으세요? 노모: 아범아 부탁이구먼! 아범 위혀서 30년을 기도를 해왔구먼, 마지막 효도다 생각하고 하나님 뜻을 따라줄 것이요. 남편: 아이구 어머니, 우리 텃밭을 팔아도 5백만원은 안되유, 아내: 당신한테 돈 내놓으라구 누가 혔나요? 지가 평생 고사리 꺽어서라두 5백만원 맹글어 놓을테니께유 걱정 노셔유. 남편: 아이구 이 무식한 여자야. 건축헌금 많이 한다구 돌덩이가 금때잉 되느냐. 난 예수쟁이 죽어도 안된다구. 내 주먹이나 믿구 살까라구! 무식한 꿈 좀 꾸지맛!(이튿날부터 아내는 부지런히 고사리를 꺽으러 다니고 노모는 엎드려 기도한다.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 일찍 퇴근한 남폄이 우물가에서 발을 씻고 있는데 아내가 뛰어들며 소리친다) 아내: 영준이 아부지유! 영준이 아부지유! 나 좀 봐요! 나 좀 봐유! 남편: 흥, 오라지게 보고 싶은 얼굴 또 보라하네! 아내: 이거봐유! 영준이 아부지!(고사리 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이며) 영준이 아부지 이게 뭔줄 아셔유? 남편: 도라지 아닌게벼! 아내: 여보, 산삼 뿌리여유! 산삼뿌리유! 남편: 산-삼? 아내: 야, 산삼뿌리를 여섯뿌리나 캤어유! 자 보셔유!(더 큰 산삼뿌리 다섯 개를 꺼내 보인다) 남편: 와우- 와우 이거 진짜 삼삼이네에! 진짜 신삼이네에! 아내: 영준이 아부지! 하나님이 성전건축 허라고 주신거예유 그쥬? 남편: 성전건축? 아내: 아, 고사리만 꺽어서 안되겠다 싶으니까 산삼을 캐게 하신 거예유! 안그류! 당신, 이래두 하나님 살아계신 걸 안믿어유? 못 믿어유? 당신은 못 믿어두 엄니는 믿으세유 엄니 엄니!! 물론 여기서 얘기는 끝나지 않습니다만 중간에 잘랐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자 여호와께서 무척 기뻐하시고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다윗의 이름을 존귀케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시는 집을 지으려고 하자 무척 기뻐하시고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그러나 다윗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특하다고 하여 무지막지하게 축복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고사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사시는 성전을 짓기 위해 고사리를 꺽어서 바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예쁘게 보신 하나님께서 고사리 꺽는 손길로 하여금 산삼을 캐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성도 여러분이 여호와를 기뻐하고 또 기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마음 속에 한번 감동의 물결이 출렁이시면 그 감격은 인간에게 폭포수와 같은 은혜로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내 전체의 생활 속에서 한 부분으로 인식하여 대충 적당히 종교적 문화생활의 균형을 지키거나 그저 교회 왔다 가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기뻐하고 또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화통하게 화끈하게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데살로니카전서 5 장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고 함은 항상 기분이 좋고 유쾌한 상태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살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함은 정확하게 ”여호와를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며 또 기뻐하며 사는 가나안 성도 모든 이들에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원, 여러분의 열망, 여러분의 꿈과 이상, 여러분의 목표, 여러분의 비전을 이루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항상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저희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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