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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12-14 (화) 11:45 13년전 10712  

2002 년 4 월 28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 장 21 절 - 30 절

제 목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주의 거룩한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상 2 장 30 절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어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이 말씀을 들었으니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 장 30 절을 살펴보면 특이하게 강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전반부에 봅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후반부에는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함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말씀하심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세상 사람들의 말과 같이 거짓이나 공변됨이 없으십니다. 제가 아들이 사랑스러워 부를 때는 “신철아!” 부릅니다. 그런데 야단칠 것이 있으면 “배신철!” 하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사랑할 때는 “내가 너를 아끼고 사랑한즉” 그렇게 말하다가 하나님이 야단칠 일이 있거나 가르칠 일이 있으면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말하노라!” 두 번씩이나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2 장 30 절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나 자신이 말하노라고 하시면서 강조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인생은 하나님께서 존중하게 여겨주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경멸하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 까지도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와 나를 멸시하는 자를 똑같이 동일하게 취급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멸시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를 나도 관심을 가지겠다“, ”나를 높이는 자를 내가 높이 올려주고 나를 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중히 여기겠다“, ”나에게 가까이 오는 자에게 나도 가까이 가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 인생들에게 들으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첫째로 들어야 할 말씀은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여기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은 그 인생을 경멸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살아야 할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히 여기고 무시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살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아니하고 개판으로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2 장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았는가를 증언해 줍니다.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까지도 여호와를 경멸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상 2 장 12 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보면 제사장의 아들이 하나님의 드리는 제사를 거룩하게 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게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 2 장 17 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심히 큼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더라”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 즉 제사의 고기를 훔쳐서 자기의 것으로 in my pocket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성전 회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 장 22 절을 봅시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한마디로 엘리의 아들들은 성적으로도 문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아들들이 범한 악한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가볍게만 야단친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봉헌제물을 강탈하고 음행한 아들들을 가볍게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지엄하신 하나님보다는 자녀들을 더 존중히 여기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사업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자식들과 친척들 때문에 하나님을 덜 존중히 여기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에게 정확하게 이 점을 지적하여 말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짓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였느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히 여기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야단을 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봉헌을 경시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상 4 장에 16 절에서 17 절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 리가 가로되 내 아들이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소식을 전하는 자가 가로되 이스라엘이 불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육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겨나이다. 18 절에 봅시다. 자녀를 잘 가르치지 못한 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그렇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권한이 많으면 책임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그 아들로써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제물을 빼내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은 자들은 결국 전쟁에서 도망하게 되고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사무엘상 2 장 30 절에서 여호와께서 결단코 말씀하신 바 즉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신 바가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들에게는 ”화나님“ 즉 화나신 하나님이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 사무엘상 2 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6 절에서 7 절을 봅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음부에 내리시기도 하시고 올리시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며 높이시기도 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죽이기도 하시고 음부에 내리시기도 하며 가난하게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개떡“같이 여기면 아내 역시 남편을 ”개코“같이 여기게 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을 ”개털“과 같이 취급하면 남편 역시 아내를 구석에 쳐 박아둔 걸레와 같이 여깁니다. 관계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면서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해!“ 그런 노래를 부르는데 남편이 아내를 향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이라는 그런 노래를 부를 리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습니다. 손가락 다섯을 깨물어 안 아픈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고 자신을 덜 사랑하는 자식을 덜 사랑하는 것은 부모로서도 인지상정입니다. 태조 왕건에 나오는 견훤이 그랬습니다.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느냐? 자신을 더 사랑하는 아들에게 물려 줄려고 했습니다. 등창이 생겨서 전쟁에 나가려 했을 때 아들 신검이는 왕권을 받기 위해서 아비 견훤으로 하여금 전쟁터에 가야한다고 하였고 아들 금강은 땅을 잃는다 하여도 아버지가 더 중요하니 금번 전쟁을 포기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자신의 주장에 의해서 견훤은 전쟁터에 나가면서도 어느 자식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는 결국 왕위를 자신을 더 사랑하였던 금강에게 물려 줄려고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더 베풀려 합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교인들이나 성도들이 자신을 알면서도 자신을 우습게 알고 마치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물건 정도로 여기고 복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할 때만 부르고 기타 등등 필요없을 때는 서랍 속에 하나님을 넣어두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도 그 인생을 ”그렇고 그런 정도“로만 여깁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예민하시느냐 하면 말라기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라기 1 장 8 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희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자기네들과 가정을 위하여는 살진 송아지 고기를 먹으면서 자기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상관에게는 최성의 지성을 드리면서도 부모에게는 기한이 지난 깡통 같은 것을 드리면 부모가 그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속으로 내가 쟤를 왜 났을꼬!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만원짜리 한 장을 드리면서도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기나 자기 새끼들을 위해서는 팍팍 쓰면 그 바치는 예물을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예물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그 정성을 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느냐에 따라 예민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과부의 렙돈 두푼을 무척 귀하게 받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릴 때 정성이 들어가지 않고 그저 자기들이 쓰고 남은 것을 겨우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어디 좋아하시겠습니까? 

이 말씀 속에서 둘째로 들어야 할 말씀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데 반해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성경은 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을 대비시킵니다. 사무엘상 2 장 12 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여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사무엘은 어땠습니까? 사무엘상 1 장 28 절 후반절에 보면 의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여기서 거기서는 회막 즉 성전을 말합니다. 또한 사무엘은 언제나 성전 안에서 기도하며 성전 안에서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3 장 2 절에서 3 절을 봅시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 전에 누웠더라” 여기서 우리는 엘리가 자기 처소에서 편이 살았을 때 사무엘이 항상 성전 안에서 기도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3 장 15 절을 보십시다.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즉 언제나 사무엘은 성전를 중심으로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고 여호와를 경배하였습니다. 그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삼상 2 장 26 절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는 과정 속에 역사하셔서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존중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높이 들어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할 선민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하셔서 세대와 세대에 그 이름을 칭송받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상이 31 장 사무엘하가 24 장 도합 몇장입니까? 55 장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인류의 역사의 탄생 과정을 설명할 창세기 50 장보다 5 장이나 더 많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먼 조상이 성경에 이름이 나온다고 합시다. 로마서 16 장 8 절에 보면 “바울이 또 주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딱 한절 나옵니다. 암블리아는 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데 암블리아의 후손들은 성경에 딱 한절 나오는 그 이름으로 얼마나 영광입니까? 누구를 만나든지 내 조상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분이 계시지! 그럼 아니 정말! 로마서 16 장 8 절을 보시라!면서 얼마나 큰 자랑꺼리로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한절도 아니고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에 55 장에 이르도록 그 행적이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얼마나 크게 높여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존중케 해주시고 존귀케 해주십니다. 아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만약 남편이 아내를 중요시 여기고 사랑하며 평소에 말하기를 “ 당신, 내 아내가 되어 부족한 나와 함께 살아주니 나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은 ”당신이 나하고 살아주니 황공무지로소이다“ 하면서 살면 아내 역시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고 답가를 부르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중히 여기고 남편이 아내를 존중히 여기면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도 같으십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그 인생을 만 백성 가운데 높이 들어 세우시고 존중히 여겨 주십니다. 하나님을 높이 받들어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그 인생을 눈여겨보시고 그 인생을 마치 고속엘리베이터에 태워 팍 높여 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우리 인생을 면밀히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존귀히 여기는 이에게는 하나님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시고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들에게 일러 그만을 위한 특별한 파일을 만들어 놓으시고 보관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무렴은 하나님께서 무슨 오늘날과 같은 그런 행정처리를 하실려구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만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라기 3 장 16 절을 보십시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분명히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에도 같은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념책과 생명책입니다. 여호와의 생명책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명단이 적힌 책이요 여호와의 기념책은 여호와를 존중하고 높이는 사람들을 특별히 선정하여 기록하여 놓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물론 여호와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단지 기록을 위한 기록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려고 예비하신 명단들입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될 때 그 사람은 단지 미래에 하늘나라에서의 칭찬과 시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 때에도 하나님은 그 인생을 존중히 여기고 높여주신다는 약속과 축복이 아울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겠지만 한번 하나님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과연 이루어 주시나 안 이루어 주시나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모든 일에서부터 여호와를 제일로 여기고 깍듯하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높여주시나 그렇지 않은가를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102 장은 주 예수보다도 귀한 분은 없네 라는 찬송입니다. 1 절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절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절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렇습니다. 주 예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고 그를 최고로 귀하게 여길 때 주 예수님은 여러분은 존귀한 주의 자녀로 삼으시고 여러분의 인생 자체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화를 둘로 나누자면 <엘자문화>와 <삼열문화>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만 엘자문화란 엘리할 때의 엘자와 자식할 때 자자를 합성해서 엘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엘리의 자식들이 만들어 내는 문화로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인 봉헌제물을 훔치고 성적으로 타락한 이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소중히 여기고 부패한 돈과 성의 쾌락을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문화를 말합니다. 엘자문화는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문명처럼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삼열문화가 무엇입니까? 삼열은 사무엘의 한국 이름입니다. 저하고 신학교 기숙사 옆방에 살았던 교수님 아들 이름이 미국이름으로 사무엘이고 한국이름은 삼열입니다. 삼열문화란 마치 성경에 나오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에 청종하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문화를 말합니다. 오늘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엘자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주가 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본을 노래하고 있고 돈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쾌락과 권력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신앙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돈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내 호주머니를 풍족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릅니다. 자나깨나 사람들 마음 속에는 돈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돈만 있으면 나의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텐데!! 하는 돈중심주의 돈최고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엘자문화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세상 부귀와 명예보다도 물질보다도 쾌락보다도 더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높이는 <삼열문화>를 더욱 확산시켜 나가고 심화시켜 나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엘리의 아들처럼 세상의 재물을 더 중요시하고 쾌락을 더 중요시 여기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식들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인생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말씀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인생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리라고 하셨사온데 저희 모두가 여호와의 보좌 앞에 놓여 있는 기념책에 다 기록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인생, 딱 한번 뿐인 인생 한 분이신 하나님을 높이며 존귀히 여기며 살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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