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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전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12-14 (화) 14:57 13년전 7478  

2003 년 12 월 3 일(수) 오후 7 시 광주가나안교회 삼일밤예배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3 장 16 절 - 17 절

제 목 :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전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생활과 가정과 자녀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영혼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전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전이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시는 집을 말합니다. 聖殿은 거룩할 <聖>에다가 큰 궁궐 혹은 큰 집 <殿>입니다. 거룩한 집, 거룩한 궁궐입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시는 집을 말합니다. 御殿이라고 할 때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을 말하고 성전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시는 집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전서 3 장 16 절에서 17 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성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전의 1 차적인 개념은 성전이란 건물의 형태로 지어져 있어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집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는 집을 성전으로 생각합니다만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보면 성전에 대한 전혀 새로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함이 무슨 뜻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나타난 성전에 대한 초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성전은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사는 동산에 성전이나 성소나 어떤 특별한 터전이 따로 지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살았고 하나님께서도 에덴동산에서 거니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하시던 터전이었지만 성전이란 개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자식들인 카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무슨 제물을 드리는 지정된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저 아담과 이브가 자기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을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셋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창세기 4 장 26 절에 보겠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의 자손 에노스 시대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단지 이름만 불렀다고 하였을 뿐이며 그때에도 무슨 일정한 하나님의 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불렀을 때 이름을 부르는 특별한 곳이 예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이후에 노아가 홍수이후에 방주로부터 땅으로 내려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8 장 20 절입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를 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자신이 생각한 좋은 곳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21 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가 드린 번제의 향기를 흠향하셨으니 노아가 드린 번제의 장소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전이나 성소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터전이 거룩한 터전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고 가라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하여 떠났는데 아브라함은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성소라 할 수 있는 첫 단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전은 없었지만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으니 제사를 드리는 그 터가 바로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번 성소로 삼았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성소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일 좋은 장소를 택하여 제사를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제사를 드리는 바로 그 터전이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는 일정한 장소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들이 가는 곳마다 성소가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애굽으로 들어가 약 480 년간을 살았는데 바로 그 기간은 그야말로 영적으로 황무지였습니다. 애굽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은 급속하게 인구가 불어났습니다. 바로 그곳이 고센 땅입니다만 거기에서 몸붙여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제단을 쌓지도 않았고 번제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담을 쌓고 지낸 영적 공허기였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애굽에서 살았던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든가 어떤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을 따라 섬기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억압 가운데서 해방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고 하고 그 명분을 광야에 나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한다 하였습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 희생이란 다시 말하면 동물을 잡아 피를 흘려 죽여 바치는 번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희생을 드리겠다는 모세의 말은 다만 명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광야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임의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드려 구체적으로 그 내용과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할 때 비로소 제사를 드리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 그리고 눈으로 보이는 성막이 제시됩니다. 성막이란 텐트를 쳐서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 그 안에서 두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 즉 지성소가 마련된 것입니다. 텐트를 치되 - 이를 성막이라 하지만 -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텐트를 치고 그 안에 성소 안의 성소라 할 수 있는 지성소를 두어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시는 장소를 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지성소가 성소다운 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전신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 년 동안 생활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텐트를 치고 살았는데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머무를 때는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대로 거룩한 텐트 즉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머물렀습니다. 어떻게 머물렀느냐 하면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동서남북에 세 지파씩 진을 쳤고 그 동서남북 중앙에는 성막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눈만 뜨면 그들 진 가운데 있는 성막을 바라보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단일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사사시대가 있었지만 성막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왕조가 형성되면서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성막 대신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다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에든지 국가적인 경사나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경사 혹은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무슨 해결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며 성전을 중심으로 축제를 즐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이 없는 생활이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멀리 출타하게 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먼 곳에 산다 하더라도 그들은 기도를 할 때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곳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영적인 구심체였고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후 외적의 침입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살 때에도 다시 성전을 지어 성전을 여전히 그들의 생활의 구심체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절기때마다 이 성전에 오셨고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에 관한 생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 하고 너희가 바로 성전이라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게 되는 근거가 어디 있을까요? 16 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성전이라고 사용한 원어는 헬라어로 “나오스”입니다. 이는 성전을 가르키는 “히에론”과는 구별되는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나오스“는 하나님께서 사시는 터전인 성소라는 뜻입니다. 성소란 거룩한 터전인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하나님이 사시는 곳을 예루살렘 성전 한 곳으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시는 곳은 그 어디든지 성소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거하시는데 성전이 있고 바로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바로 성소가 된다 그 말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시는 것으로 인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어디든지 거하시며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전이 되는데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거룩한 무리들 안에 하나님이 사시는 터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고백 속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 바치면서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인간이 지어 바친 어떤 집에만 유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다 담아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 생각은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생각에서부터 훨씬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 우주에 편만하시다는 것이고 자신이 지은 성전에서 다만 분향을 하고 제사를 올릴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은 사도 바울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거하신다고 믿고 너희는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이라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이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삶 속에 믿는 자들 안에 사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겠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게 될 때 바로 그 터전이 바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는 곳은 그것이 어디이든지 성소가 되고 성전이 되고 거룩한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터전을 확 열어 놓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7 장 48 절에서 50 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으신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의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짖겟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온 우주가 하나님이 사신 집이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면 그곳이 성전이 되고 예루살렘 성전이라도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그냥 잘 지은 건축물이지 성전이 아니라는 관념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사시는 터전이 어디일까?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전 바깥뜰입니다. 그리고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바깥뜰을 성전의 일부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였습니다. 성전안은 거룩 거룩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서 거룩 거룩 거룩한 장소라 하였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지으신 바깥뜰이라 한다면 그 몸 안에 있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 안에는 마음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지으시어 특별히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하나님과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동물들은 육체만 있지 마음이나 영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혼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이 영혼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 영혼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이 영혼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의 영혼 안에는 그리스도가 거하시고 성령이 거하시며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영혼은 하나님이 사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 장 16 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영혼은 성령이 거하시는 터전인 것입니다. 그 옛날 성전은 붙박이식으로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여겼습니다. 즉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유폐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줍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하나님은 특별히 너희 안에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자, 잘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사업주가 큰 건물을 지어 각 상인에게 분양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방을 임대하거나 구입하여 자기가 사용하기에 알맞게 방을 아름답게 꾸미기도 하고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알맞게 개조하여 사용합니다. 사업주는 1 층을 은행이 들어와야 하겠다 여기면 은행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은행을 하겠다는 사람에게만 분양하거나 임대합니다. 쉽게 말하여 하나님께서 건물을 하나 지어놓고 어떤 사람에게 그저 은총으로 모든 건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삼으시고 전권을 위임하였습닏가. 그리고 건물에서 나오는 모든 임대료나 분양하는 책임을 그 사람에게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관리책임자에게 자신이 드나들 수 있는 방을 하나 만들어 놓고 자신이 그 방에 들려 그 책임자와 만나 얘기하고 건물 관리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 차도 한잔 거기서 마시겠다 하고 그 건물의 가장 가운데 있는 로얄층에서도 가장 좋은 방을 지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실제 소유주와 비슷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관리총책임자는 주인인 하나님을 위하여 그 방을 최고로 잘 꾸며 놓지 않겠습니까? 최고급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고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최고급 음향기기를 들여 놓고 최고급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그 안에 하나님이 앉을 수 있는 소파를 중앙에 위치 해놓고 방바닥에는 양탄자를 깔아 놓지 않겠습니까? 언제 하나님이 오시면 그 곳으로 인도하여 기분을 좋게 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의 건물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그 건물의 로얄층이고 영혼은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시고 언제나 들러 자기 방으로 여기시고 찾아오시는 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아름답고 정결하게 단장해 놓지 않겠습니까? 영혼의 방을 청소도 하지 않고 인테리어도 하지 않고 문을 잠궈 둔다면 그 건물의 실소유주인 하나님이 찾아올 때 무척 불쾌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을 찾아왔는데 그 방에서 제일 좋은 의자, 중앙에 놓여져 있는 의자에 자기가 앉고 접는 의자를 그 방 주변에 놓고 거기에 하나님이 앉으시게 한다면 하나님인들 기분이 좋으실리 있겠습니까? 내가 건물 전체를 다 주고 딱 한방만 지정하여 내 방을 삼겠다고 하였는데 자신이 오만하게 실소유주가 된 것처럼 행세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집에 들르시지 않거나 그 사람을 좇아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영혼의 방을 가장 아름답게 가장 거룩하게 단장해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주님이 앉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의자를 준비해 놓고 언제 주님이 오시던지 문을 열어드리면서 환영합니다. 꽃다발을 안겨 드리면서 주님 오시기를 정말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말하면 얼마나 주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 영혼을 하나님 거하시는 지성소로 아름답게 단장해 놓아야 합니다. 영혼의 방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방을 도배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불러 드리며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있다가 선물로 드리며 하나님이 오실 때 좋은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높여 드리며 최고로 맛있는 것으로 예비해 놓을 때 영혼의 방은 아름답게 단장되고 준비됩니다. 우리 영혼은 기도할 때 아름답게 단장됩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을 때 단장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단장됩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좋은 예물을 준비하여 드릴 때 영혼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주님이 거하시기에 기뻐하는 방이 됩니다. 그래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시게 되며 떠나지 않으시고 더 대접을 받으시고 즐거워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방을 자신만의 용도로 사용하도록 해놓고 하나님이 오셔도 잠궈져서 그냥 돌아가시게 한다면 주님을 홀대당한 기분으로 그 방을 떠나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사시는 터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살면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시는 거룩한 터전이 됩니다. 오늘 본문 17 절에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라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면 우리는 거룩한 몸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몸으로 음행을 하거나 아내 아닌 여자와 몸을 섞어 산다든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시는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으로 불의를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시는 전을 불의의 두구로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사시는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시는 터전이니 거룩하게 간직하라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몸속에 세속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등 인간의 정욕이 뛰어노는 터전으로 함부러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성전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혼의 방을 아름답게 단장해 놓을 때 주님은 그 방에 오셔서 흡족해 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선물을 나리어 주시고 더 큰 영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 더 좋고 더 큰 하나님의 집에 있는 좋은 공간을 에비해 놓고 기다리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사시는 성전입니다. 우리 영혼을 아름답게 그리고 거룩하게 단장하시어 항상 주님 기쁨으로 머무시고 행복을 누리시는 그런 지성소로 매일 매일 잘 단장하고 치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성경에 있는 말씀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주님 저희안에 지성소가 건축되어 주님이 언제나 저희 안에 사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 안에 오시어 저희 역시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 영혼 가운데 내주하여 주옵소서! 저희 안에 좌정하시어 떠나지 마시고 늘 항상 계속 계셔주시옵소서! 저희 영혼 속에 오시어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저희에게 지시하여 주옵시고 저희를 다스려 주옵소서! 저희를 주님 뜻대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02:11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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