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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9-24 (금) 19:51 13년전 2407  
 

2005 년 3 월 20 일(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말씀 : 히브리서 12 장 1 절 - 2 절 

제       목 :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이들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성경 히브리서 12 장 2 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눈이 있기 때문에 꼭 한군데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눈을 가졌기 때문에 실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고 삽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눈으로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다릅니다. 보는 것은 보이니까 보는 것이지만 “바라본다” 할 때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그곳을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만물의 보여지는 것을 보는 것이요 바라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바란다” 플러스 “본다”의 뜻이 아울러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란다는 것은 희망한다 소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고 나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바라본다함이요 관심과 주의를 집중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생이 진정 바라 볼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잘 못 바라볼 때 인생이 망쳐집니다. 얼마 전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서 만화가 담긴 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 소년이 길을 걷다가 발부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급히 그것을 줍고는 누가 보지 않았나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것이 내 것이다 아무 고생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소년은 가슴이 떨려왔고 자랑스런 기분마저 들었다. 그 뒤로 소년은 어디로 가든 머리를 숙여 눈을 크게 뜨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물을 찾으며 바라보며 걷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그렇게 평생 동안 1 페니 동전 262 개, 5 센트짜리 동전 48 개, 10 센트짜리 은화 19 개, 25 센트짜리 동전 16 개, 50 센트짜리 은화 2 개, 그리고 똘똘 뭉쳐진 지폐 한 장까지 총 13 달러 26 센트를 주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14000 원 정도를 줏은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죽음을 앞 둔 그는 자신이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을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귀한 것들을 잃고 살았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무지개, 가을서리에 붉게 물든 나뭇잎들, 푸른 하늘과 그곳을 지나는 새하얀 구름들, 빛나는 태양, 사람들의 미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라보지 못하여 그의 인생에 있어서 13000 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다 손해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 학년 때 일입니다. 제가 그때 칠량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원주 일산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까먹으라고 50 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학교 앞에서 노란 고무줄 두개를 가지고 큰 것을 잡으면 큰 장난감을 준다 하였습니다. 한번 해 보는데 5 원씩 주었습니다. 50 원 주고 열 번 잡았습니다만 첫 번째도 짧은 줄을 잡았습니다. 두 번 째도 짧은 줄을 잡았습니다. 세 번째는 긴 줄을 잡는가 했더니 짧은 줄을 잡았습니다. 네 번째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짧은 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 번째까지 한번도 긴 줄을 잡지 못하고 50 원을 다 내주게 되었습니다. 울면서 학교소풍을 갔습니다. 그때 아무리 잘 보아도 긴 줄인 줄 알고 잡아보아도 그것을 짧은 줄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분명 긴 줄인 줄 알고 잡았는데 짧은 줄인 경우 그래서 허탕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그린 만화 48 플러스 1 도 같은 내용입니다. 강토란 한 젊은이는 일평생 동안 화투만 치고 화투짝만 바라보았습니다. 도박꾼이 되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주인공인 강토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사기도박을 하다가 손이 짤려져서 양손에 갈퀴를 하고서도 화투짱을 쪼이는 것을 놓지 못하고 있는 비참한 인생을 보았습니다. 화투 48 장에다가 마음속에 있는 화투 한 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인생이 파토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 바라 볼 것을 잘 바라보아야지 바라보지 않을 것을 바라보면 그것으로 인생이 뒤틀려 지기 시작하고 인생이 문제로 휩 쌓이게 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보았을 때 그저 본 것이 아니라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보았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떡하였습니까? 따 먹었습니다. 따 먹고 난 다음에 어떡하였습니까? 결국 낙원에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한번 잘 못 바라보았다가 인생 전체를 잡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옥상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냥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범죄하였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 장군을 죽여 버립니다. 죄가 죄를 잉태하여 나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아 재앙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다윗이 밧세바의 목욕하는 나신을 그저 본 것이 아니라 바라보게 되었을 때 크게 범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가 망쪼가 든 인생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불평을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서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도다! 하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백성들에게 보내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 자신들의 잘못을 아뢰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어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중보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민수기 21 장 7 절에서 9 절 말씀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즉시 바라보면 생명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호세아 12 장 6 절을 보겠습니다. “그런 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성경말씀에 보면 오직 너의 하나님만 바라볼찌라 이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창세기의 가인을 보십시오! 동생 아벨을 죽여 범죄하였습니다. 아무도 카인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밭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기만 하면 죽이려 하여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죄 짐으로 말미암아 너무 무거웠습니다. 바로 그때 사면초가를 불러야 할 상황에서 가인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갔던 카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 장 13 절에서 14 절입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 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이 여호와를 바라보고 하소연하였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살인자니까 두말없이 바라보지 않으시고 뒤돌아서십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4 장 15 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살인범이라도 주를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신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성경은 주 여호와를 바라보라고 하시고 여호와를 바라본 자에게는 확실한 대책을 취해 주십니다. 여호사밧 왕입니다. 여호사밧에게 그 큰 군대를 징벌한 군대도 제대로 없었고 무기도 없었습니다. 어떤 방책을 취할 그런 전술과 전략도 없었습니다. 이 때 여호사밧이 어떻게 합니까? 역대하 20 장 12 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바로 그때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역대하 20 장 15 절 후반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일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본 여호수아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고 난 다음에 대책을 취하셨는데 어떻게 하십니까? 역대하 20 장 21 절에서 22 절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여호사밧이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책을 다 취하여 주시어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히브리서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2 장 2 절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하였습니다. 2 절 후반 절에서는 예수님을 말씀할 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 장 1 절과 2 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날 온전케 하신다 그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예수님께서 날 온전케 하신다 그 말씀입니다.


중학교 때 <벤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언젠가는 성도들과 함께 볼 예정입니다. 벤허의 대충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세기 초엽, 성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명문 출신인 벤허의 기구한 반생이 펼쳐집니다. 고향을 떠나 15년 만에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어 돌아온 벤허의 죽마고우 멧사라는 로마에 볼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충성심을 품고 있음을 빌미로 벤허를 노예선으로 추방합니다. 이 때 벤허의 집안은 한 순간에 몰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해적의 침입으로 죽을 뻔한 로마함대 사령관 아리아스를 구조한 공로로 벤허는 아리아스의 양자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멧사라의 야비한 간계에도 불구하고 전차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벤허에게 멧사라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벤허를 저주하며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갇혀 있는 곳을 알려 줍니다. 벤허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자기네 집은 거의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폐허가 되어 버린 집을 지키고 있었던 하녀 에스더와 함께 몸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어머니와 누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벤허는 절망에 몸부림을 칩니다. 마침 기적을 행한다는 예수의 소식을 들은 벤허와 가족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골고다의 언덕을 찾아 가지만, 이미 그는 십자가에 묶인 채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형집행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 속에서 언덕을 오르던 예수가 지쳐 쓰러집니다. 벤허는 쓰러진 예수를 부축하며 그에게 물을 건네지만 미처 목을 축이기도 전에 경비병에 의해 제지되고 맙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고 그 피가 쏟아져 내리면서 하늘에선 천둥과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갑작스런 비를 피해 동굴로 들어갔던 어머니와 누이의 비를 맞았던 피부에서 썩은 살이 서서히 벗겨져 내리고 있었다. 문둥병자가 온전케 된 것입니다”.


꼭 영화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로 볼 때 거기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볼 때 고난당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진정 온전케 하시고 참으로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18 절에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아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 볼 때 주님은 나의 고난을 도와주시어 고난에서 빠져 나오게 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를 화평하게 하십니다. 골로새서 1 장 20 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나려 주십니다. 십자가상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용서의 은총도 나려 주십니다.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살 때 그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 바라보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 육신이 병이 들고 여러 가지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합병증으로 인해 모든 것이 귀찮고 마음까지도 어두움이 스며들어 몸과 마음이 동시에 고통당할 때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불치의 병이 찾아들어 이렇게 저렇게 약도 써보고 치료도 받아 보지만 점점 몸이 악화되어 갈 때 소망이 점점 줄어들 때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은 늙어가서 힘이 빠지고 눈이 어두침침해지고 손을 바들바들 떨리고 걸음은 제대로 걸을 수 없고 교회를 가려 해도 걸음을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때 바로 그때도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과 같이 있는데 군중 속에 고독을 체험하고 주변에 내 편은 하나도 없는 것 같고 날 따돌리고 날 무시하고 날 만나기를 꺼려하고 나를 왕따시키려 할 때 마음속에 깊은 고독감과 소외감으로 눈물지을 때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해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일을 해도 계속 실패만 할 때 하는 일은 많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밤새 인생의 그물을 던져 보지만 잡는 것 하나도 없을 때 바로 그때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그토록 노력하고 땀을 흘렸는데 하는 일이 모두 허사가 되고 실패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하는 일마다 안되고 어렵게 되어 더욱 빚은 늘어만 가고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을 때도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해 주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말 못할 더러운 죄를 지었는데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고 양심은 가책으로 찔러오고 마음을 어디다 둘 데 없어 그저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울 때에도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나는 그토록 잘해 주었는데 나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와 적대하는 말로 돌아올 때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을 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날 때 바로 그때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세상에서 이렇게 시달리고 저렇게 힘들 때도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도 그저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저는 그 복음성가를 부를 때마다 깊은 은혜를 받는 노래가 있어 반복해서 듣곤 합니다. 가사가 대충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이 복음성가에서는 주만 바라볼찌라 하고 끝납니다만 왜 주를 바라보라고 하는지 노래 서곡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를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어느 때나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널 사랑하시어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그토록 너를 사랑하시는 그토록 너를 애끼시는 그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465 장은 이렇습니다. “맘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 주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이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나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언제나 나에게 날 도와 주시고 언제나 나를 생각하고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만 바라보며 사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언제까지나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만 바라보면 살게 해 주옵소서! 마음이 괴로울 때도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마음이 즐거울 때도 그 어느 때라도 주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 삶이 푸른 풀밭에 있을 때에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에든지 그 어느 때에든지 주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19:3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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