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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7-20 (화) 23:04 13년전 2280  
 

2006 년 12 월 24 일 (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성서본문 : 창세기 1 장 26 절 - 31 절  

제       목 :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오늘 성전에 나아온 성도 여러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에 가장 많이 물어지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나? 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아야 우리도 성탄하신 뜻을 쫓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세기 교부 신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Athansius)는 그의 책 “말씀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the Word)”에서 왜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야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가 육신이 되신 원인입니다. 그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육체의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딱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
사랑과 구원”입니다. 사랑하시기에 구원하러 오셨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이 먼저 오고 사랑이 나중에 오지 않습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셨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 장 16 절이 그것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기 때문에 멸망시키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하셨고 사랑하시기에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성탄케 하신 큰 뜻은 사랑과 구원입니다. 성탄하신 다른 뜻을 없을까요? 구원이란 물론 땅의 차원이 있고 땅을 넘어가는 차원이 있습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뜻은 이 땅을 초월하는 영역으로 영원한 생명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탄이 이 땅 밖의 어떤 초월적인 신비한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은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 물음을 가지고 오늘 말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7-80 년대 대학가에서 잘 나가는 강사 중 한 사람이 바로 김동길 교수님이었습니다. 이제는 학계와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그 분은 한완상, 문동환 교수님과 함께 유신을 반대하고 집회하는 데 단골강사로 등장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얘기 한 토막을 나누겠습니다. “옛날 옛날 어느 산골에 덕팔이란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 때가 되어 장가를 가서 칠순이와 결혼했는데 시집온지 한 달이 못되어 자기 어머니하고 시간만 있으면 티격태격 싸웠습니다. 도대체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혼자 한숨을 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르자니 아내가 울고 아내를 따르자니 어머니가 울고. 덕팔이는 싸울 때마다 지게를 지고 바로 깊은 산중에 나무하러 가기가 일쑤였습니다. 덕팔이가 올라간 산은 사람을 99 명이나 잡아먹은 호랑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참 나무하고 있는데 집채만한 흰눈썹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오금이 저려 도망칠 수도 없어서 덕팔이는 날 잡아 잡수시오! 하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앞발로 덕팔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니 사람님 일어나십시오!“ 하였습니다. 하두 놀래서 ”아니 호랑이님! 왜 저를 안잡아 묵습니까?“ 했더니만 자기는 사람은 안 잡아먹는다 하였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시오! 이웃집 박서방도, 건너마을 정총각도 다 호랑이 형님께서 식사하신 것 아니요? 그러자 호랑이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넋두리를 늘어놓는데 나이 칠순이 되기까지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칠순이 지나고서부터 눈썹이 희어져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동물과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사람이 구별되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사람은 잡아먹지 않고 사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람 아닌 짐승들은 다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짐승들은 무척 많았어도 사람의 모양을 한 사람은 참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 없더란 것입니다. 호랑이는 덕팔이를 보는 순간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하두 반가워서 사람님! 형님!하고 경어를 쓴 것입니다. 하두 신기해하고 있을 때 호랑이는 ”덕팔이 형님! 형님도 이 흰눈썹을 끼고 보시면 사람과 사람아닌 사람이 구별되어 보일 것입니다.“ 말했습니다. 덕팔이는 그 흰눈썹을 가지고 동네에 돌아왔는데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옷을 입었는데 어떤 이는 그 형상은 늑대였고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어떤 이는 원숭이 형상을 하고 있었고 자기 껏만 유달리 챙기는 건넛집 영감님은 돼지형상을 하고 무엇인가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았더니 삶쾡이가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여우가 들어오더니 싸우고 있었습니다. 혼비백산하여 집을 튀쳐 나왔는데 그 동네에는 엿장수 아저씨 한 사람만이 사람이었고 다른 이들은 뱀이거나 곰이거나 표범이거나 그랬습니다. 덕팔이는 사람을 찾아 멀리멀리 떠났다는 얘기입니다.


김동길 교수님이 이 얘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른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때 그 강연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여우라고 하여 지목하였던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웃었습니다.


어떤 노총각이 왜 결혼을 않느냐는 질문에 여자는 많은데 여자가 없다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이래서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하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폴 투루니에라는 정신과 의사가 “삶에는 뜻이 있다” 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이유와 목적이 있다고 한 말과 대동소이합니다. 무엇인가 만들어졌을 때는 만든 이유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 장 26 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왜 사람을 만드셨습니까?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으로 살라고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19 세기 신학의 모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사람을 사람되게” (Let God be God, let man be man!)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임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비극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람임을 떠나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데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까? 창세기 3 장 5 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사람이 사람이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사람이 망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사람성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졌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니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자신을 만들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니 사람성을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그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 파괴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또 사람의 사람성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도록 사람에게 파트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산다함은 더불어 함께 살 때 사람입니다. 철학자 막스 쉘러는 인간을 말할 때 "Mitmenschlichkeit"라 하였습니다. 번역을 하자면 공동인간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함은 더불어 함께 살 때 사람입니다. 자기만 잘 살려하고 자기만 영화와 행복을 누리려 하고, 자기의 것을 추구하고 자기의 욕구만 누리려 하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것은 돼지 같은 것이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그때 그 사람은 사람성을 상실하고 그 안에 돼지성만 남습니다. 돼지는 그 누구도 나누어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둥이를 먼저 들이미는 놈이 먹을 것의 임자입니다.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살려 하지 않고 나만 잘 살려 하는 이는 사람의 형상을 하지만 그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4 장 7 절에서 8 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1 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음은 바로 사람 속에 사랑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사람이 미움을 가지고 형제를 죽이고 자매를 상처 입힐 때는 그는 사람의 형상이지만 사람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잃을 때 그는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잃으며 그는 짐승과 매한가지입니다.


사람이 된다함은 사랑한다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은 육체와 동물성 짐승성 밖에 남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어서도 안 되고 사람은 짐승처럼 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결국 사람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단 한 개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성을 잃기 시작한 것은 아담과 이브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 이후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면서부터 더욱 사람성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은 점점 짐승이 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라멕은 자기 가족들을 죽이고 날 해하여 한다면 77 배로 복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리와 늑대가 되어 갑니다. 툰드라 지대의 늑대는 동료 늑대가 싸우다가 죽으면 그 늑대를 잡아먹습니다. 인간의 짐승성은 더 도가 넘쳐 이제 사람 속에 마귀가 살게 되었습니다. 짐승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거나 물어뜯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점 인간은 포악해져서 자기들이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대량으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짐승들은 잡아먹더라도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족 간의 전쟁을 벌이면 모든 남자들은 씨를 말려 다 죽이고 상대방의 재물은 다 내 것으로 삼고 여자들은 다 성적 놀이개로 삼았던 것이 과거의 인간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던 로마제국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네 나라 독립을 위해서 봉기하여 일어난 유대의 2000 여명을 사로잡아 십자가에 다 매달아 놓고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신음소리가 천지간에 넘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이 죽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인 것입니다. 피가 철철 흘러 시내가 되어 넘쳤습니다. 힘이 있으면 정의요 칼과 창과 군마가 많으면 그것이 인간들을 죽일 수 있고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사람 속에 이제 짐승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악한 귀신들이 들어가 인간들 속에 들어가 엄청난 회오리를 일으켰습니다. 세상에 들어온 악한 영들은 인간 속에 들어가서 엄청난 파국을 맞이하였습니다. 귀신들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분탕질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많은 영웅들이 누구입니까? 영웅들의 지배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전쟁들이 일어났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예수님 이 오시기 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야만으로 인해 죽었습니까? 알렉산더 왕, 징기스칸을 역사의 영웅이라 하지만 이들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수백만이 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사람 속에 있는 사람성을 회복시키려 오셨습니다. 사람 속에 미움이 지배하지 아니하고 사람 속에 시기나 다툼이 왕 노릇하지 아니하고 사람 속에 탐욕이 지배하지 않도록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입니다. 마태복음 5 장 38 절에서 44 절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저 하늘나라만을 가르치고 영생구원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땅에서 가슴 따뜻하게 살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넉넉하게 살고 풋풋한 정이 넘치게 살도록 산상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있는 사람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귀신들을 사람 속에서 쫓아내셨습니까? 군대마귀도 쫓아내시고 일곱 마귀들도 쫓아내시고 사람 속에 사는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서 멀쩡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음을 알고 죄악에 의해서 마귀에 의해서 훼손되고 일그러진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일깨우셨습니다. 요한복음 4 장 23 절과 24 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심 속에는 저 천국에서의 구원만이 아닌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도록 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 기울이셨습니다. 오늘이 성탄절 하루 전이고 주일이어서 대림절 넷째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밤에는 성탄절 전야 예배로 드리고 각 기관이 함께 성탄을 축하하는 모임으로 갖습니다. 내일은 성탄절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가 진정 성탄을 가장 잘 맞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크리스마스 장식을 잘 해 놓는 것입니까? 금번 한 집사님과 남신도회가 합하여 성탄절 장식을 무척 세심하게 하여 무척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탄절 장식을 잘하는 것이나 성탄절을 전후하여 성탄카드를 많이 받고 많이 보내는 것입니까? 성탄절에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나도 선물을 성탄절에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쏠쏠하게 나도 받는 것입니까?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1 차 2 차 3 차 술을 마시고 이 여자 만나고 저 남자 만나고 콜라텍에 가서 춤추고 모텔 호텔 가서 광란의 밤을 지새웁니다만 또 어떤 이는 강원랜드에 가서 카지노에 미치고 어떤 이는 하루 종일 바다이야기에 가서 바를 잡아당기고 합니다만 무엇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을 잘 보내는 것입니까?


이 시간 저는 성탄절을 앞두고 덕팔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호랑이 흰눈썹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 호랑이 흰눈썹을 끼고 다른 누구를 보고 여우같다느니 늑대 같다느니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자신의 모습, 내 내면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호랑이 흰눈썹을 끼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이판사판사까다판과 같은 세상에서 눈을 요리 돌리고 저리 돌려 핑핑 돌려 내 이익은 눈보다 손이 더 빠르게 나꿔채는 박쥐와 같은 영악한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십시다. 이 시간 호랑이 흰눈썹을 끼고 내 모습 속에 내 의견과 내 주장과 다르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뱀과 같이 이간질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충돌하게 하고 이렇게 저렇게 충동질하고 돌아다니지는 않는지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이 시간 그 호랑이 흰눈썹을 끼고 내가 내 배고픔만 생각하고 나만을 배불리고 오직 내 배 채우기 위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먹어대는 돼지의 모습이 있지나 않은지 내 자신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이 시간 그 호랑이 흰눈썹을 가지고 내가 내 자랑만 하고 자아도취되어 내 공적만을 뻐기고 다니고 내가 이루어놓은 업적만을 나불대면서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공작과 같은 모습은 없는지 조용히 여러분의 모습을 스크린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그 호랑이 흰눈썹을 끼고 내 모습 속에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일을 기뻐하고 남의 상처를 할켜 더욱 덧나게 하며 삶쾡이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조용히 성찰해 보십시다. 이 시간 그 호랑이 흰눈썹을 끼고 내 속에서 남에게 저주하고 남이 실패하고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즐거워하면서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그런 백년 먹은 여우같은 것은 없는지 여러분의 내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 내 안에 그런 짐승 정도가 아니라 악한 영이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경홀히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흠집을 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어긋어긋하여 반대로 사는 모습이 내 안에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 내 안에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음란함 속에 빠져 그 쾌락 속에 빠져있음은 없는지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목회하시다가 은퇴하신, 꽤 연세 많으신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꼭 그런 말씀을 공통적으로 하실 때가 많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고 다음에 신자가 되고 그리고 나서 목사가 되십시오! 말씀을 하시는데 공감이 갑니다. 가끔 저 역시 담임목사직에 몰두하여 인간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금방 그러고 난 후 깨우쳐 주셔서 회개합니다만 순간순간 사람성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성도가 되고 직분을 받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사람으로 사는 것은 거저 먹기로 생각하지만 사람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사람 같은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땀 흘리고 노력해야 합니다. 토마스 홉즈는 당시 사람과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이리”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사람과 같은 사람이 없는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 속에 짐승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마귀들을 없애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짐승들과 마귀들은 쉽게 우리 안에서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제 속에 있는 짐승을 쫓아주옵시고 제 속에 마귀를 몰아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사오니 저희의 가슴이 따뜻한 온기가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 속에 있는 냉냉함을 치워주시옵시고 제 속에 훈훈함을 주시옵소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가 무엇입니까? 무슨 경제발전을 크게 이루는 것입니까? GNP나 GDP가 높아지고 수출을 지금 3000 억 달러에서 1 조 달러로 높이는 일입니까? 아니면 더 많은 아이를 낳아 인구가 많아져서 미래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일입니까? 아니면 선진국과 같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복지가 이루어지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문화면에서 대국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부터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개신교 인구가 줄어들었습니다. 많은 전도되어 온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내가 다시는 교회를 다니나 봐라! 내가 다시는 예수를 믿나 봐라!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면서 교회를 떠난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같지 않은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독한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인간은 있되 사람다운 훈훈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 보다 더 징하다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아주 다부지게 살림하는 어느 여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절약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늘 가게에 가면 물건 가격을 깎느라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잘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교회에서 전도행사가 있어 자주 만나는 가게의 주인 아주머니를 전도하러 갔는데, 들려나오는 이야기가, 예수믿는 사람이 더 지독하게 가격을 깎는다며 그런 사람 보고 어떻게 예수 믿겠냐며 큰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자기를 가리켜 한 말인 줄 알게 된 이분은 그날 이후로 절약도 중요하지만 좀 어리석어 보여도 착한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이후로 그 가게를 들를 때마다 제일 못나 보이는 과일을 일부러 골라서 제값을 주고 샀습니다. 물론 깎아달라고 실랑이도 벌이지 않았습니다. 이 집사님의 이런 모습에 감동을 받은 주인 아주머니도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겠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실 때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심이 왜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도 다른 차원에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년 성탄을 맞이합니다만 우리가 점점 사람이 되고 우리가 점점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성탄을 가장 잘 맞이하는 것이 되는 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사람이 되신 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성탄을 하루 앞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나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참 사람이 되어 오신 것처럼 저희도 주 예수님 닮아 사람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인정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냉냉해져 가는 이 사회 속에서 항상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해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도 더 이해하려 하고 생각을 열기 전에 먼저 가슴을 여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진읍교회 성도들 모두가 사람다운 사람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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