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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 세상이 주는 평안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7-27 (화) 20:30 13년전 7392  
 

2007 년 4 월 15 일(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요한복음 14 장 25 절 - 31 절    

제       목 :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 세상이 주는 평안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성전에 나아오신 모든 성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부활하신 후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최초로 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8 장 8 절에서 9 절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부활하신 주님께서 “평안하냐?” 물으셨습니다. 인생의 평안은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잇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으신 똑같은 질문으로 묻겠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어때요? 평안하십니까?” 바로 이 질문 앞에 나 자신을 한 번 세워 보십시다. 성도 여러분들은 ‘내 인생의 평안’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일 내가 평안함을 누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이 누리는 평안을 그만한 값어치의 돈을 지불하고 사고 싶다고 제의하였을 때 만약 내가 누리고 있는 그 평안을 팔아버릴 때 더 이상 내 안에 내가 누리는 평안이 없어진다고 가정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평안을 선뜻 팔겠습니까?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져지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팔아치웠다고 해서 무슨 큰 변화나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닐 텐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평안을 얼마 정도 주면 거래에 응하시겠습니까? 누가 한 1000 만원쯤 현찰로 준다면 나는 내 속에 있는 평안을 팔 수 있다면 팔겠다 하시는 분 혹 여기에 계시면 손 한 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음의 평안을 어찌 그리 싼 값에 넘길 수 있겠습니까? 1000 만원은 너무도 싸고 그 20 배 정도 약 2 억원 정도 준다면 고려해 보겠다는 분! 손 한 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싸다가 준다고 해도 나는 내게 있는 평안을 팔수는 없다 하시는 분! 손 한 번 들어주세요!


그러면 한 번만 더 묻겠습니까? 세상 그 많은 돈으로도 팔지 않겠다는 그 평안을 더 풍성하게 얻기 위해 최근 한 달 동안 평안을 달라고 한 번이라도 기도하신 분!! 손 한 번 들어주세요! 대형슈퍼마켓에서 무공해 유기농업으로 지은 쌀 40 kg 을 200 푸대에 한정하여 선착순 4 분의 1 의 가격에 주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장사진을 이루는데 그토록 평안이 중요하고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그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힘을 쓰고 애를 쓰거나 기도하지 아니할까요?


요한복음 14 장 27 절 말씀 전반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이 말씀 속에서 “끼친다!”는 말씀의 원어는 물을 골고루 뿌려 준다는 말씀입니다. 아내가 어디 나갈 때 “꽃나무에다가 물 좀 뿌려줘요!” 하고 나갑니다. 어디 다녀왔을 때 뿌렸는지 안 뿌렸는지 점검하고 그러니까 말이 나오기 무섭게 얼른 바가지에다가 물을 담아가지고 대충 확 ~ 부서주고 들어옵니다. 관찰력이 많은 아내는 그렇게 뿌리는 것을 알았는지 언제부터인지 조로를 사다 놓았습니다. “여보! 조로에 물을 담아서 꽃나무에 물을 좀 줘요!” 합니다. 그렇게 하라면 꼭 그렇게 하는 것이 가정의 평안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 말 그대로 조로에 수돗물을 담아가지고 화분에다가 뿌리게 되면 꽃나무의 이파리와 줄기와 뿌리에 이르기까지 물이 골고루 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가지로 물을 확~ 부서버리고 끝내는 것과 조로에 물을 담아 골고루 뿌려주는 것과 꽃나무가 자라는 양태가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사랑으로 뿌려주는 것과 그냥 바가지로 물을 부셔버리는 것과 이파리가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폼새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되 조로로 물을 뿌리듯이 평안의 물을 우리 영혼에도 뿌려 주시고 우리 마음에도 뿌려주시고 우리 육체에도 뿌려주시고 내 인생에 골고루 뿌려주시겠다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실 때 예수님 안에 있는 평안,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평안을 주시겠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평안을 어디서 얻으셨을까요? 에베소서 6 장 23 절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3 절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입니다. 평안은 예수님께로부터 오고 그 예수님의 평안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평안은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가 내려 주시는 평안입니다. 天衣無縫(천의무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 天 옷 衣 없을 無 꿰멜 逢입니다. “하늘의 옷에는 꿰맨 흔적이 없다”는 말로써 완벽하고 완전한 것을 일컬어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늘에서 하나님 내려주시는 天衣無縫한 평안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 주시는 평안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평안을 누릴 수 있는 평안인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살았고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동산 안에다 평안을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범죄함으로 인해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가득한 동산 바깥으로 쫓겨났는데 거기에는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만 가득 하였습니다. 세상은 참 평안을 모르고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로 탐욕과 욕심이 부딪쳐서 서로 싸우고 전쟁하고 서로 죽고 죽이는 가운데 그야말로 평안이 없었습니다. 평안이 없는 세계, 평안이 없어 시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세상에 예수님은 조로에다가 하늘평안을 가득 담아 평안을 뿌리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평안을 세상 곳곳에 뿌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먼저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평안을 집집마다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 장 5 절에서 6 절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예수님은 온 유대를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각종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 따돌림을 받고 사랑이 없어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샬롬의 평안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 하늘평안을 뿌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 장 16 절에서 17 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 먼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처처소소마다 평안을 끼치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상에서도 한치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하늘의 평안을 지니고 계셨고 그 평안을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도 나눠주셨고 그 평안을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도 나눠주셨습니다. 보통 인생들이 위기를 겪거나 어려움을 겪으면 마음의 평안을 쉽게 상실해 버리고 고통스럽게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통의 십자가상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평안을 잃지 않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기도 중에 그런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23 장 34 절에서 35 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를 뽑고 서로 나누고 너 자신이나 구원할지어다! 하였을 때 만일 예수님 안에 평안이 없었다면 예수님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아버지여! 저런 독사의 새끼들이 자신의 잘못도 알지 못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저 무리들에게 하늘의 불벼락을 내려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미워하거나 증오할 때 그 때는 우리 안에 있는 평안이 사라지고 도망갈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움을 가질 때 우리는 평상심을 잃어버리고 우리 자신까지도 상실해 버립니다. 미움과 증오, 탐욕이 우리 안에 들어왔을 때 그것들이 왕 노릇을 할 때 어느새 평안은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의 장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고 난 다음 욕하고 비난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을 보면서 다시금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 평안이 강같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가득 찬 평안을 가지고 자신을 죽이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으시면서 흔들리지 않은 짱짱한 그 평안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왔습니다. 마가복음 14 장 32 절에서 34 절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이 없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이신 예수님 달리실 십자가가 얼마나 처절한 아픔이고 고통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를 앞에 두고 33 절에 보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하였고 34 절에 보면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십자가 달리시기 직전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시고 고민과 슬픔이 압도하였을 때 예수님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로 이때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36 절에서도 기도하시고 39 절을 보십시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을 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 십자가와 그 고통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내려 주시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금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보십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이란 “세상이 주는 평안”을 말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구호가 바로 “팩스 로마나” (Pax Romana)입니다. “팩스”(Pax)하면 평화란 뜻입니다. 로마나(Romana) 하면 “로마의” 해서 Pax Romana는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제국은 “팩스 로마나”의 기치를 들고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모든 나라들의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한 평화는 힘의 절대적인 우위에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로마제국이 100 의 힘을 가지고 있고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속국들이 2 나 3 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100 의 힘으로 2 나 3 을 꼼짝 못하게 압도적으로 짓밟아버리고 묵사발 내버리고 그 가운데 꼼짝 못하여 침묵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평화입니다. 쥐죽은듯한 조용한 침묵만이 있는 평화는 평화가 아닌 평화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다 잡힌 자는 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림으로 감히 저항할 수 없게 하였고 그래서 움쩍달싹 하지 못하여 복종할 수밖에 없어 더 이상 분쟁이 없고 싸움이 없는 상태를 로마제국은 “로마의 평화”라고 불렀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평화는 그런 “로마의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초강대국들이 만들려고 하는 평화가 무엇입니까? 자신은 엄청난 양의 핵무기와 수소폭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약소국들이 핵무기 하나나 둘 가지려 하면 세상의 평화가 무너질듯하며 6 자 회담이니 4 자 회담이니 하여 엄청난 국제적 압력을 행사하여 핵무기를 못가지게 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세계의 질서를 강대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이러한 평화가 바로 팩스 로마나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사이비 평화입니다. 핵무기가 더 많을수록 평안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더 죽음과 멸망으로 더 다가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평안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안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돈과 물질을 통해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누가복음 12 장에 보면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였을 때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하고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합니다. 예수님 부자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돈과 물질을 더 축적하려 할 때 탐욕이 생기게 되고 탐욕이 우리 안에 머물고 있는 한 내 영혼과 마음에 평안이 결코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히로뽕이나 마약을 흡입함으로 평안을 누리려 합니다. 그것은 평안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편안함과 쾌락을 누리게 하지만 깨어나면 오히려 더 고통스럽기만 하고 몸을 술과 마약의 노예가 되게 하여 인생을 비참과 멸망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런 평안은 평안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편안케 하여 결국 망하게 하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 안에서 열심히 평안함을 구하려 하지만 이렇게 평안하려고 하고 저렇게 평안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마치 캄플주사 효과와 같이 잠시잠간 고통에서 면제될 뿐 그 잠시잠간이 지나면 더 고통스런 불행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세상의 평안은 더 탐욕스럽게 더 소유해야 느끼는 평안 아닌 평안이지만 하나님 주신 평안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도 누리게 하시는 평안입니다. 하박국은 다 빼앗기고도 몸의 질병으로 신음할 때에도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된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이 참된 평안입니다.


지난 주간에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마다 무엇인가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넘쳤습니다. 한 번은 중국의 큰 탑을 보려 가려는데 두 명의 여자가 진주목걸이와 같이 생긴 것을 가지고 팔았습니다! 한 여자가 어설픈 한국말로 “저 사람꺼 가짜 !! 그리고 비싸!! 내꺼 진짜! 값이 싸!!” 만원에 한 개! 하더니 떠날 때는 만원에 세 개! 하면서 팔려 하였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거리에서 파는 것은 100 % 짝퉁이고 가짜라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중국에서 공사를 두고 운영하는 진짜진주를 파는 곳에 갔습니다. 거기서 진짜 진주와 가짜 진주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진짜 진주는 진주들끼리 서로 비비면 미세하게 진주가루가 떨어지지만 가짜 진주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진주가 내는 빛을 비교해보니 가짜 진주가 훨씬 더 윤택이 나고 반질반질하였고 이에 비해 진짜 진주는 상대적으로 그 빛의 광택이 가짜 진주보다는 덜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주는 평안이란 더 평안과 같은 평안을 주는 것 같지만 100 % 가짜고 짝퉁인 평안이지만 예수님 주시는 평안은 참 평안이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그저 일시적으로 반짝하고 한시적인 것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지속적이고 영원합니다. 이 땅에서만 소용되고 거기서 끝나는 평안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넘어 부활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기까지 연결이 되고 하늘나라에서 까지 연속이 되는 평안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잠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안정을 주고 금방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리면서 근본적인 문제에는 전혀 해결이나 도움이 안 되는 평안 아닌 평안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위기와 문제 가운데서 오히려 짱짱하게 빛을 발하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술 취한 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갈팡질팡하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것들이 더 큰 고통이요 더 큰 문제요 결국 멸망이요 종착역이 지옥이지만 그렇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우고 그 위에서 찬송을 부르게 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함은 이 세상 안에만 있는 제한적인 평안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와 영생으로 연결되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죽어도 천국인데!” 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흔들려지지 않습니다. 참 평안은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이것은 뭘 말하느냐? 예수님 밖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평안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 박사가 한번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애쓰는 유엔에서 특별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신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유엔 대표들을 향하여 "여러분, 여러분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각국을 대표하여 이곳에 모여 연구하고 토의하고 결의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여러분이 아무리 연구하고 토의하고 결의한다고 해도 여러분을 통해서는 세계평화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세계의 평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내 것으로 만들어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좋습니다. 내 인생을 복되게 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예수님 주시는 평안에는 단순히 평안만 있지 아니합니다. 평안 안에는 기쁨이 샘솟게 하는 터전이 그 안에 있습니다. 기쁨이 자꾸 차오르게 되면 기쁨 플러스 기쁨은 행복입니다. 예수님 주시는 이 평안함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이 크고 비쌉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평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일정한 값을 받으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조건이나 제한사항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주시겠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평안을 달라고 하면 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말씀하셨습니다. 역대하 15 장 15 절입니다.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그저 단순히 주시겠다고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9 장 11 절에서 12 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 하셨고 기도할 때 그 평안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평안은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세상에서 경험이 그렇습니다. 저 역시 평안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평안을 잃는 경우는 누군가를 미워할 때 평안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험한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움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그 미움의 에너지가 100 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미움이 우리 가운데 씨앗으로 뿌려졌을 때 그 미움은 언제까지나 100 정도 에너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미움은 우리 정신과 마음을 빙빙 돌아다니면서 마치 코일이 칭칭 감겨진 변압기와 같이 미움의 에너지를 갑자기 증폭시켜 미움의 에너지가 갑자기 500 이 되고 1000 이 되고 다시 그것이 일만이 되고 십만의 에너지로 빅뱅을 해 버립니다. 그때 이 미움의 에너지는 마음뿐만 아니라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내 몸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골치를 지끈거리게 하고 속을 불편하게 하여 소화가 안되게 하고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낍니다.


미움의 조그마한 씨앗을 발아하여 내 존재의 기초를 흔들게 하는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순식간에 평정을 잃어버리고 잠도 안 오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됨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여 저 놈들을 싹 쓸어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나오려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이러한 때 저는 두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합니다. 이 미움의 에너지를 소멸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증폭해 버린 미움의 에너지가 쉽게 소멸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이의 영상이 보이고 또 분노가 일어납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미워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엄청난 손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잡았던 손을 다시 꼭 잡으면서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찬송을 계속해서 부르면서 “예수님 주신 평안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있는 그 자리를 겟세마네동산으로 만들어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래도 천장끝까지 증폭해 버린 미움이 다시금 고개를 쳐듭니다. 그러면 가슴에다가 손을 얹고 또 기도하면서 이번에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또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잠이 들던지 마음의 분진이 가라앉게 되고 미워하였던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으면서 평안을 간구할 때 확실히 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내려 주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남의 목숨을 끊거난 어떤 이는 자신 속에 있는 두려움과 수치를 참지 못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거나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장국영은 세계적인 배우입니다. 정몽헌은 세계적인 기업가인데도 그 안에 평안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있을 때 근심한다고 근심이 해결되지 않으며 염려한다고 염려할 만한 것들이 없어지지 않으며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불안해한다고 해서 평안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때가 예수님 주신다고 약속하신 평안을 청구할 때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 제 2 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독일군의 연이은 폭격으로 불안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국 런던 시에서 평안히 잠을 자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매일 밤 기도한답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들어 평안하게 잠자리에 들게 되지요. 사실 하나님과 내가 둘이 다 깨어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평안은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너무도 소중한 우리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평안을 채워 달라고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제 사랑하는 친구 한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할지 몰라 하였는데 그는 오히려 빌립보서 4 장의 말씀을 가지고 위로하려는 저를 오히려 위로하였습니다. 6 절에서 7 절 말씀을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 장 6 절 - 7 절)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세상이 주는 평안에 속지 않게 하시고 저희 모두에게 예수님의 평안으로 넘치게 해 주옵소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기도하셨던 그 평안을 저희에게도 나리어 주시옵소서!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기도할 때 마다 약속하신 평안, 예수님의 평안을 넘치게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27:30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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