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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산책(5)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6-11-16 (수) 15:37 7년전 11422  

출애굽기 산책(5) / 출애굽기 3:13-22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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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에 처음 입문을 했을 때에는 꽃 이름을 잘 알 수 없으니,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을 만나면 이게 뭡니까?”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식물의 이름을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고, 약효가 되었든 모양이 되었든 이름의 내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서 쥐똥나무가 있는데, 봄이면 향기가 좋은 하얀 꽃을 다닥다닥 피워내기에 원예종 울타리로도 인기가 좋습니다. 그때는 도대체 ?” 쥐똥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줄 모르겠는데, 가을이 되면 열매가 까맣게 맺혀서 식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이것이 뭐를 닮았어?” 하면, “쥐똥!”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열매가 까만 쥐똥을 닮았습니다.

 

이름이란, 또 다른 자신이다.

 

어떤 것이 무엇인지알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대에는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는 그 사람의 무엇’, 곧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개명해준 이들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이 아버지라는 뜻이 있고,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사야는 야훼의 구원예레미야는 야훼가 세우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신분이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얻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로운 존재로 들어 쓰시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일종의 또 다른 자기였던 것입니다.

 

신의 이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묻습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을 가리키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El)’입니다. ‘에서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 엘로힘(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YHWH’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우리 말로는 여호와로 해석되었습니다만,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고 여겼기에, 발음해서 읽을 수 없는 이 단어를 아도나이()’로 읽거나 엘로힘으로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도나이도 불경스럽다고 여겨서 핫 솀(그 이름)’이라 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쉬먀(그 이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이름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위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한 존재의 본질을 규정짓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사과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사과가 아닌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과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것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는 분도 아니며, 이름 지어짐으로 인해 다른 어떤 신 중의 하나일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신을 파악할 수도,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2. ‘YHWH’라는 신비한 단어

 

모세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대답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번역한 이 말씀은 히브리번역이 아니라 그리스어 70인 역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스어 70인역은 그리스어 최초의 구약성경으로, “나는 있는 자다.”라는 뜻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나는 있다. 나는 나로 있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나는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이 대답을 통해 신은 자신이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입니다. 그래서 야훼라는 신비한 단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 그는 현존한다.“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다라는 대답은 이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대답은 신이란, 인간의 술어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나는 A라는 말은 너는 A가 아니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다라고 할 때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나는 존재다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존재가 아닌 흙으로 돌아갈(3:19) 존재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신은 존재요, 인간은 존재물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질문과 대답 앞에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다(qadosch)’갈라서다, 분리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신은 거룩한 존재이고, 인간을 포함한 다른 만물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물로서 신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호렙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을 때에 여기는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곧, 거룩하지 않은 존재물인 모세가 거룩한 곳, 존재에 거하고자 한다면, 살아왔던 모든 삶의 이력들을 버려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조금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어렵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만 제대로 이해하면 아주 명확한 신앙의 체계를 갖출 수 있습니다.

 

3. 임마누엘의 하나님, 히브리인의 하나님

 

지난주, 출애굽기 산책(4)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312절에 있는 말씀인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지요. 여기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어 사명을 주시며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모세의 조상과 맺은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보냄을 받은 자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자의 능력과 의지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명자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점입니다. 이걸 착각하면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내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뜻을 이뤄가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또 다른 이들이 더 커 보일 수밖에 없지요.

 

오늘 18절에서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히브리는 특정한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대근동지방을 떠돌던 낭품팔이 노동자, 사회밑바닥 계층들과 하층민들을 통칭하는 무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자기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사회적인 약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히브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에 자주 나오는 표현(3:18, 5:3, 7:16, 9:1, 13, 10:3)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1:11)이었으며, 학대받고 있는 이들(1:12, 3:9), 강제노동에 끌려와 신음하는 이들(1:14), 왕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들(1:15-22),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들(2:23, 3:7), 땅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땅 없이 살아가는 사람(3:8), 억지로 사로잡혀 있는 이들(9:13),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는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약속받고, 소유할 땅도 약속받은 이들이었습니다(3:7-8).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히브리인그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한국에 하나님께서 오신다면, 누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누구를 찾아가실까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와 채움과 소유의 삶이 곧 축복의 삶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을 대변하는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를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름 붙여줄 수 있는 분은 아니십니다. 규정되는 순간,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분은 아니시며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존재다.”하시며 우리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큰 복입니다.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동시에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분,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신비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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