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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6-11-16 (수) 16:01 7년전 6434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편136: 1-9, 26 골로새서 3: 15-17

Giving Thanks to God                             2016-11-20

 

1. 시작하는 말

사막의 수도승들의 이야기 가운데 보면,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기도에 대한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단 한가지만 한다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스승이 답합니다. 기도를 단 한마디만 드린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해라. 하나님께 드릴 단 한가지의 기도를 하라면 우리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이어야 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의 저서에 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성도의 사귐을 하다가 헤어질 때는 언제든지 우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것이 한 인사처럼 되었다고 전해 줍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서 억울한 이야기, 핍박당하는 이야기, 순교 당하는 이야기 등을 하다가도 마지막 헤어질 때에는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 신앙인들은 감사를 생활화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입니다.

 

2. 어떤 상황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해마다 감사절을 맞으면 감사절 起源(기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일년 동안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추수를 잘하게 되었고, 오곡과 각종채소를 하나님 제단에 바치면서 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년 동안 직장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냈다는 것을 감사 드립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일년 동안 사업 잘하고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또 어떤 이는 일년 동안 사랑하는 자녀가 상급학교에 진학했으니, 또는 직장을 구했으니, 집을 한간 마련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오랫동안 군대나 여행 중에 있었던 자녀가 돌아 왔으니 감사한다든가, 이렇게 좋은 일, 자랑스러운 일, 감격했던 일들, 기적적인 일을 우리 생활에서 경험했으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심정으로 감사절을 지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지난 일년 동안에 일생의 어려운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실패나 절망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감사절을 맞이하여 지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절을 지키는 우리의 정신과 태도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살펴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받았으니, 어떤 좋은 일이 있으니, 어떤 감사하는 일이 있으니, 감사를 한다는 심정이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명랑한 면 밝은 면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도 우리 믿는 사람의 의무는 항상 감사하는 것이니- 성경말씀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 좋은 일에서만 아니라 궂은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어도, 감사를 해야 한다는 의무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러할 때에 감사해야 합니까?

첫째, 역경과 환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흐린 날씨 후에 맑은 날씨가 있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옵니다. 아픈 후에 나음이 있고, 고통 후에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여정을 평탄하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역경을 통해 연단시켜 새로운 역사창조와 새 삶이 있게 하십니다.

역경과 환난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견뎌 지내고 나면 연단이 되고 훈련이 되어 삶을 더 견고케 하며, 평탄한 삶에서 갖지 못했던 삶의 가치와 관대함을 배우게 됩니다. 아픔이나 고독, 배반이나 이용당함, 이별이나 사업실패, 낙방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이 반드시 나쁜 것만이 아니라, 도리어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게 할 수 있고, 인생에 대해 진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소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 28).

교우 여러분, 고통이나 역경을 당할 때 실망이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은혜 주시고 더 크게 쓰시려는 섭리가 있다는 성령의 역사를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 역경 중에 감사하면 기도와 찬양이 나옵니다.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합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변하는 세상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감사가 빠진 기도에는 회의와 원망이 따릅니다.

 

3. 감사찬송에 얽힌 이야기

찬송가 66다 감사 드리세 는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찬양을 잃지 않는 링카르트(M. Rinkart, 1636) 목사님의 깊은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410년 전 종교전쟁이라고 부르는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 군대가 독일에 쳐들어 왔을 때, 아이렌 벨크시를 보호해 주던 성벽이 있었습니다. 개신교 피난민들은 이 성곽으로 피난을 왔으나 피난민으로 들끓는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는데다가 전염병마저 퍼져서 그들의 참상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죽기 시작했고, 목사들은 할 수 없이 시가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루터교 목사인 마르틴 링카르트 목사는 30년 전쟁에서 5천명을 매장했습니다. 매주간 100명을, 하루에 50명을 장례 지낸 날도 있었습니다. 성벽은 스페인 군에 의해 끊임없이 무너져가고, 집은 파괴되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그 때에 어린이를 위한 기도문을 썼는데, 바로 우리 찬송가 66장이 이 기도문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신약성서 본문말씀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권고한 말씀입니다. 3 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절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영혼 속에 살아있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둘째, 찬양의 태도는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찬송이 우리 생의 순간 순간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 생애의 어두운 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실망적이고 좌절감만을 본다면 사실 찬송을 부를 수도 없고 억지로 감사를 할 수도 없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폭넓은 신앙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유명한 찬송가 69온 천하 만물 우러러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225)의 찬송은 그의 삶이 부요 하고 평안하고 성공하고 자랑스런 행복에 둘러 쌓여 있을 때 부른 노래는 아닙니다. 젊은 날, 프란시스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허물어져가는 시골 성 마태교회에서 기도하던 중에 프랜시스야 이 성전을 수리하라는 내적인 명령을 듣고, 너무 답답하여 자기 아버지 포목상에 찾아가서 점원 몰래 비단 몇 필을 가지고 나와 그것을 팔아서 그 허물어진 성전을 깨끗하게 수축했습니다. 자기를 구속하신 예수님을 진실히 믿고 전하고자 한 열심 때문에 앗시시 지방에서도 갑부라 불리 우던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고 걸인처럼 방랑하며 예수가 사셨던 생활을 본받아 가난과 결혼한다고 스스로 맹서하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로 굶고 헐벗고, 찬 바위를 요로 삼고 구름으로 이불삼고 살아가던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생활을 못 마땅히 여기던 그의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그 아들을 상대로 법정에다 절도범으로 고발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법정에 불려가 아버지의 고소장을 들고 답변대신 다음의 유명한 영적 아버지에 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재판장님 저는 지금까지 여기 서 있는 베르나르드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살았지만 이제 이후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걸치고 있던 겉옷과 속바지까지도 벗어서 아버지 앞에 던져두고 하나도 가리움이 없는 알몸으로 법정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재판을 하던 재판관이 너무도 안타까워 자기의 까운을 벗어서 알몸을 가리우게 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그의 순례와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행과 사랑의 실천, 가난한자들 병든 자들을 위하여 살며 따르는 자들을 건사하며 보냈습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쿠라라가 이끄는 곳에 움막을 짓고 얼마간 보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태양의 노래(69장 찬송의 본래의 것)를 이태리어로 작사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로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평생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셨던 성자입니다.

육신의 아버지 앞에서 알몸으로 뛰어나간 그였지만 주 예수님을 믿게 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늘을 보고 찬양하고, 해를 보고 찬양하고, 별을 보고 찬양하고, 슬픔과 고통, 죽음까지도 자매라고 부르며 찬양할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안에 계신 여러분! 신앙의 선진들을 본받아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부흥사 스펄젼 목사는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달빛을 주실 것이요, 달빛을 보고 감사할 줄 알면 햇빛을 받을 것이요, 햇빛을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자에게는 영원히 솟는 신비의 빛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4. 구약 본문 시편기자의 감사와 우리의 감사

구약 본문 말씀인 시편 136편은 매절에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순례자들 예배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예배드릴 때, 찬양을 인도하는 한 레위인 또는 제사장과 더불어 교창한 찬양으로 추측 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모든 神()과 主()보다 뛰어나신 여호와의 사랑에 대한 찬양권면(1-3),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행위(4-9)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10-15)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16-22) 구원행위에 대한 찬양, 그리고 감사에 대한 결론적 권고(23-26)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최고의 찬양,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마음이며 주께 감사 찬송하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 충만한 심령을 가진 자는 감사의 생활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추수의 계절, 11월을 맞아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가지고 나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그네들이었지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여 출애굽의 해방과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신앙고백을 했던 것 같이, 우리 한국인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복음이 들어왔고 믿음으로 민족의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된 우리의 처지에서도 감사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삶을 회고해 볼 때도 집을 옮기고 새 직장을 가지며, 가정과 자녀들을 지켜주심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오늘이 있게 해주신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방황하면서 나그네 같은 삶이었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 신앙과 삶의 변화를 체험했다면 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1970, 80년대 인권회복과 민주주의 실현(민주화 회복기) 90년대 이후 민족의 일치와 화해(평화통일 실현, 남북관계개선) 40여 년을 보내면서, 약속의 땅을 향한 40여 년의 히브리(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물론이고 신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은 넘치고 있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척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초유의 헌정문란 사태를 맞아 새로운 헌정질서 회복을 향하여- 11 12일 주말 저녁 100만개의 촛불이 서울 중심가를 밝혔습니다. 도심을 휩쓴 촛불의 물결은 민심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대통령의 친구라는 최씨 일당이 건드리고 지나간 곳은 망가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당장 여야를 가릴 상황이 아니고, 보수진보를 나눌 계제가 아닙니다. 국민이 원하는 준엄한 명령을 이행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최순실의 배경이 사이비종교를 만든 영생교 교주 최태민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사이비종교의 농락에 빠져 놀아났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를 당혹하게 합니다. 감추어진 거짓과 불의, 우상숭배를 들쳐 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며 그럼에도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반드시 이 어둠을 밝혀 주시고 이 민족과 나라를 바로 세워주옵소서!

 

5. 마치며, 그럼에도 감사합시다 

우리의 감사가 잘 살고 성공하고 만사형통해서 감사하는 것이라면 이는 온전한 감사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없는 경우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언제나 듣고 읽어도 아름답고 공감이 가는 감사정신을 일깨우는 하박국의 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에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둘 것 없고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어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3:17-18).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3:15).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지 않아 끝없이 더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문화, 영원한 불만족의 딱지가 붙은 문화에서, 창조주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급진적인 감사를 그 특징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만족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돈의 문화에 속한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죄가 우리 속에 그 형체를 드러내고, 우리의 습관을 좌우하며,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깊이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진실로 창조에 대하여, 우리가 받은 생명의 선물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救贖(구속)과 평화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때만이 감사할 줄 모르는 문화와 그 영향력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보석이나 돈, 가죽옷이나 값비싼 물건들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으며, 오직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들 즉 믿음, 사랑, 지혜의 영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같은 것이 귀함을 알고 그런 것들을 위해 살며 그런 유산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 애썼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귀함을 알고 깨닫게 될 때 그 위력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바울, 그는 세상적인 부귀영화 같은 이 모든 것을 분토같이 여기며 그리스도가 보여주시고 가르친 그 영원한 것을 향해 진력할 뿐이라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한반도의 상황, 동서냉전의 마지막 결전지로 여기는 한반도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형제애, 평화의 새날을 이루어 낼 것이라는 남북간의 공존과 동포애, 관심으로 소통되고 평화의 감사제가 일어나는 꿈을 꾸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감사는 어느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process)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인들이 광야를 여행하고 가나안을 향해 움직이던 나그네의 길과도 같이 끊임없습니다. 우리의 감사생활 역시 추수감사절 하루만이 아니라 범사에 나타나야 합니다. 한 감사는 다른 감사를 낳고, 작은 감사는 큰 감사를 가져오며, 그런 감사의 자세는 온 나라 모든 백성에게 돌아 옵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소유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사(Thanks for Nothing)입니다.

성찬예식은 주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예식으로 Eucharist라는 영어 단어는 헬라어의 Eucharisteo라는 (감사하라)말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어 축사(축복감사)하시면서 5천명을 먹이시고 최후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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