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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탈출(脫出)의 신앙과 영문(營門)밖의 제단 창세기 12:1-9, 22:1-19 2017-03-05,12 1. 시작하며-탈출의 역사(歷史) …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03-06 (월) 17:48 7년전 2232  
  아브라함.hwp (30.0K), Down : 2, 2017-03-06 17:48:08

아브라함-탈출(脫出)의 신앙과 영문(營門)밖의 제단 창세기 12:1-9, 22:1-19

2017-03-05,12

1. 시작하며-탈출의 역사(歷史)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1)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탈출합니다. 당시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 즉 동족에게서 이탈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때에만 가능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베델, 이집트, 네겝, 다시 가나안 그리고 헤브론 등으로 배회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많은 순례의 지명들을 보면 그것은 끝없이 떠 돌아야 하는 유목민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을 떠돌이 아람사람들이라고 고백합니다(26:5). 방랑하는 아람사람은 이스라엘 족장들의 칭호이기도 합니다. 떠돌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런 생명의 보장도 받지 못한 떠돌이는 숙명적으로 싸우면서 살길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떠돌이 생활은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의 40년 광야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탈출! 그것은 과거를 단절하는 행위이며, 가진 것에서 해방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탈출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입니다. 본향을 떠나라고 지시한 하나님은 내가 장차 보여줄 땅을 향해 가라”(12:1)고 합니다. 탈출의 목표는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12:2-3). 이것은 나아가야 할 궁극적 목적을 나타냅니다. 목적을 가진 나그네의 길, 끝없는 순례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적(動的)인 삶의 양태(樣態)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삶은 끝없이 나아가는 삶으로 성격지어 집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생리적(生理的)으로 출산(出産)할 가능성이 없는 처지인데도 하나님은 사라의 몸을 통해서 축복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즉 그 아이 이삭을 낳게 하였고, 그 이삭이 장차 민족들을 다스릴 왕의 선조가 되리라고 고지(告知)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공포와 전율 속에서 영문(營門)밖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지평을 넘어섭니다. 이삭의 생명은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의 담보물입니다. 따라서 그를 죽이는 행위는 종교적 지표도 넘어섭니다. 이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한 개인의 죽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절단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뜻에 복종하려고 아들을 이끌고 가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오직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신앙에서만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1:19)라고 해석합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아브라함-탈출의 신앙과 영문 밖의 제단입니다.

 

2. 아브라함의 신앙과 성서의 구원역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야기는 대표적 모형으로 모든 소명 받은 자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고향땅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보여줄 그 불확정적 미래의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명하신 것은 그의 신앙적 복종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탈출하는 신앙에서 나타난 두 가지 사건에 유념해야 합니다. 1) 창세기 12:1-3절은 명령형식으로 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즉각적인 순종이었습니다(4-9). 그런데 이 무기력한 75세의 중늙은이와 10살 아래인 그의 아내 사래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 즉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이 찾아 왔습니다. 75세가 되기까지 자식도 낳지 못하고 불임의 세월을 살아온 이 늙은 부부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상에서 아주 소박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과 믿음의 삶으로 일관하며 그 후손을 통해 세상만민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항상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결단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순종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 결단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볼 교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아브라함의 소명(召命)사건은 바벨탑의 거인(巨人)주의적인 오만(傲慢)을 가지고 끊임없이 신()에게 항거하는 저 구제불능의 인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구원에로 이끌어내는 일을 하여야 할 모범적 구원공동체의 한 조상(祖上) 즉 아브라함을 이 인간역사 속에 꼭 등장시켜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구원사적 결단의 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민(選民)공동체의 선조(先祖)로서 선택하신 후, 그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땅의 모든 민족을 살리는 자가 되어라(12:1-9)라는 이 사명부여는 성서전체의 문맥에서 볼 때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은 족장들 아브라함-이삭-야곱의 그 선민공동체로 하여금 내던져진 험악한 세월(47:9)에 고난의 세상에서 고난과 구원을 통한 하나님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2-3).

하나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리라고 확언합니다(26:16-19).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 신()의 약속의 성취를 자신의 고난역사 속에서 경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그 받은바 축복의 은혜를 곧 망각했고, 예언자들의 끊임없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배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는 앗시리아제국과 신흥 바빌론제국의 포로가 되어 마침내는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고 유배(流配)생활로 방황할 즈음 그들 이스라엘공동체로 하여금 그 잃어버린 약속의 땅으로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수 있도록 섭리(攝理)하셨습니다(126:1-6).

마른 풀과 같고 시드는 꽃 같은((40:7-8), 길 잃은 양같은 포로유민 이스라엘을 목자같이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어(40:11) 꿈에도 그리는 그들 이스라엘의 조국으로 광복(光復)시키고 그 동터오는 새 역사를 여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소명 때와 꼭 같이 그 조국귀환의 새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너를 다시 일으켜 열국(뭇 민족)의 빛(a light to the nations)으로 삼았노라”(49:6)라고.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소명은 이젠 똑같은 언어로 반복(反復) 전이(轉移)되어 하나님의 인류구원역사의 선구자 아방가르드(avantgarde), 즉 열국의 빛으로의 사명을 또다시 저 포로귀환 이스라엘 새공동체가 위임(委任)받게 된 것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은 바빌론포로의 비극이 토라를 불이행(不履行)한 죄의 결과라는 것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토라에 대한 철저한 기계적/문자적 이행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 부름 받은 자의 사 명을 바르게 인식함에 실패하였습니다. 저들 이스라엘은 불행히도 토라에 대한 문자주의적, 기계주의적인 신봉에만 전 운명을 걸고 매달렸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주의라는 또 하나의 악을 낳고 말았습니다. 즉 구약성서의 히브리신앙을 왜곡시킨 유대교(Judaism)의 바로 그 범죄현실입니다. 이것은 실로 인간역사가 겪는 지겨운 악순환(惡循環)입니다. 율법주의의 이러한 이기적 배타주의 교조라는 또 다른 거인주의적인 오만(titanic hubris)이 우리의 종교역사 속에 뿌리내리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Judaism)는 바로 이러한 오만(傲慢)이 낳은 대표적 산물(産物)입니다.(김이곤, <죽음을 극복하는 길> 2013, 106-113)

유대주의적인 배타적 율법주의의 이 악()은 마침내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게 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에 나타난 복음적 진리를 왜곡 해석하는 유대교의 근본주의 교조주의 신앙을 바로 잡으려고 올바른 성서해석으로 맞서서 싸우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운동을 하시면서 열 두 제자들을 모으고, 교회ecclesia를 세우고(16:18), 교회공동체에도 아브라함의 소명 때와 꼭 같이 예수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새이스라엘로서의 예수공동체-오늘의 교회공동체에로 이어지는 이 소명 받은자의 정체성(identity)이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2:1-9절의 소명에 대한 정의(定意)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새이스라엘, 그리고 예수공동체와 오늘의 교회공동체에게로 정확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란 순례자가 되어야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의 교회(모이는 교회)와 디아스포라의 교회(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형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요하려고만하고, 높아지려고만 하고, 온 세계가 다 기독교국가(theocracy)가 되도록 힘으로 강요한다면(마치 십자군, the Crusader처럼)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2). 교회는 단지 메시아의 비밀(16:20-21)을 간직한 채 주님과 함께 비아 돌로로샤(Via dolorosa)“를 걸어야 참교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교회는 이 길을 걷는 동안만은 참교회일 것입니다.

3.그리스도교 역사는 어떤가요?

본래 그리스도교는 가난한자들과 함께하며 시작된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낡은 질서에 사랑과 자유의 정신으로 나아갔기에 로마제국을 흔들 수 있었습니다. 세계제국인 로마는 가진게 너무 많아 수호적이고 안전제일주의였고 로마의 평화(Pax-Romana)를 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랑의 공동체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승리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그것에 예속되고, 로마제국 안에서 특권계층이 되어 권력, 명예, 재산 등을 가진 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정착의 종교로, 국가권력과 야합하면서, 기득권 수호위한 종교로 변신되었습니다.

이에 항거하고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인데, 그것은 안정을 추구하며 기성세력화한 체제(로마가톨릭교회)를 탈출하여 자유를 찾아 나선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에 의해 이뤄진 신교(新敎)는 프로테스탄트교회(Protestant-Reform-Church)입니다. 그러나 신교마저도 자유하는 탈출의 공동체로써 본래 모습에서 실패한 것은, 자유의 길보다 안정을, 탈출의 길보다 정착을 택하며 권력과 야합이 주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때를 같이해서 일어난 르네상스 물결, 자유와 평등을 생명으로 한 프랑스혁명, 그 뒤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큰 변동이 일어날 때에나, 프로레타리아 해방을 기치로 내세운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지 못하고 무관심의 방관자세로 자기방어태세만 견지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와 무관한 자세,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리스도교 역사는 반성하고 역사의 주 예수와 함께 탈출과 순례자의 길에 나서야 한다는 자의식(自意識)입니다. 바울의 도상(途上)의 나그네로서 자의식이겠습니다.

 

4. 공포와 전율의 제단에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창세기22장은 성서주석가들에 의하여 결박의 본문으로 불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의 결박당함 속에서 예수님의 결박십자가상에서의 도살당함을 봅니다. 창세기22장은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상 최악의 위기였고 동시에 아브라함신앙의 최고 순도(純度)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적 신앙 안에는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모순적인 요구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허공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 같은 모험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고 후손의 약속을 25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이삭을 통해 절정의 성취를 이룬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삭탄생 자체가 후손약속의 절정이 아니라 번제단에서 쪼개진 이삭, 즉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제단에 바친 아브라함의 순종이야말로 후손약속의 궁극적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추상같은 명령,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22:1-2, 참조, 11:17-19)는 말씀 앞에 세차게 뒤흔들립니다. 이렇게 요구하는 하나님이 과연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시고 25년 만에 약속의 성취인 이삭을 선물로 주신 그 하나님인가? 이삭을 중심으로 펼쳐질 후손과 큰 민족 형성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될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만큼 번성하리라는 후손약속은 폐기되었단 말인가?(15:5) 사랑하는 독자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수 있는 가장 반인륜적인 요구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부조리해 보이는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천근(千斤)의 침묵에 바쳐진 말없는 순종이었습니다(22:3-6). 그러나 실상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묘사한 그 공포와 전율을 가득안고서 3일 길의 먼 여정을 떠났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의 거리는 약100km 정도 됩니다. 아브라함은 3일간의 여정에서 이삭을 얻기까지 겪었던 인내의 세월들, 이삭을 낳고 기뻐한 일, 이삭을 위해 맡아들 이스마엘을 좇아냈던 일 등 만감이 교차되는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3일간의 여정동안 과연 아브라함의 마음에 일관성 있는 태도가 유지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사환들에게 아들과 함께 경배하고 오겠다고 말하며 이삭과 자신 둘이서만 마지막 제단으로 걸어갑니다.

그는 엄청난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안고 심연처럼 깊은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진입합니다. 이 비장하고 고독한 신앙의 여정 속에 깃든 침묵을 깨는 이삭의 질문에 그는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예상외로 담담합니다. “하나님이 번제로 쓸 양을 친히 준비할 것이다”(8). 아브라함이 말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은 이삭자신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대체제물인 어린양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또 최악의 경우 자신이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이삭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 까지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11:19). 그러나 이 부활신앙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었을 공포와 전율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이삭을 결박하고 도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칼을 잡고 아들을 도살하려고 했습니다(22:9-10). 이때쯤에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사태의 진상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십대의 소년 이삭은 노인 아버지에게 잠잠히 결박당하는 장면을 보면 이 번제사건이 아브라함신앙의 절정이면서 이삭의 신앙의 진수(眞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순순히 결박당했던 경험속에서 이삭은 아마 수동형 능동신앙을 배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이삭은 하나님과 아버지 모두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결박을 마친 아브라함이 빠른 동작으로 이삭을 도살하려고 그를 강압적으로 붙들고칼을 내려치려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간섭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22:11-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풀에 뿔이 걸린 채 멀찍이 서있는 한 마리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13).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곤경은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여호와이례) 때문에 부활의 축제와 환희로 반전되었습니다. 결국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연단하사 하나님과 더 깊은 신뢰를 맺고 믿음의 반석위에 굳건히 세우기 위한 시험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독생자를 떼어내는 고통도 감수할 만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복주심에만 탐닉하는지,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만 탐닉하는지 검증하는 시험(11-14)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심리적으로는 도살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의탁과 순종에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창세기22장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명제가 성립되는 현장입니다. 결국 천하 만민은 하나님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한 사람만이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매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영문(營門)밖의 제단(祭壇)

후일 우리가운데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시(豫示)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이삭이야말로 메시아 예수의 진정한 예표(prefigurqtion)가 아니고 무엇이랴! 예수와 이삭 사이의 이러한 동형 (同型) 유비(typological analogy)는 무엇보다 그분들의 신앙적 승리가 일어난 곳이 모두 영문밖 이라는 점에서 그 일치점을 찾을 수 있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마을도 성소도 옆에 없는 한적한 산에서 즉 영문(營門)밖에서 이삭을 바친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선교 3년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세상은 철저히 어둠이고, 예수는 대속(代贖)의 죽음과 3일만에 새창조로서의 부활은 그를 죽여야 할 이단(異端)으로 내어 몬 유대교의 성전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복되는 종교의식과 종교행사만 요란하게 반복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오늘의 교회는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영문밖, 모리아산과 골고다 언덕은 모두 성전밖, 또는 교회밖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온 인류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또 우리를 영원히 살리실 확실한 한 표징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곳, 그곳은 성전(聖殿)제의(祭儀)밖이었습니다. 교회/성소는 단지 인류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선교의 전진기지 즉 아방가르드 avantgarde)일 뿐이지, 천국(天國)()을 여닫는 권세 열쇠를 가진 곳(16:19)은 결코 아닙니다.(김이곤, 같은 책, 193-198)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모두 함께 영문밖으로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 새사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배우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1) 그가 탈출의 족장이 된 것은 잘못된 첫역사를 끝맺고 거기서 탈출한 새역사의 시작임을 뜻하며 또한 이스라엘민족사의 모델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역사의 목적을 설정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지금 여기의 삶을 인도하는 것과 유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전()역사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저들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이다음에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몰라 끊임없이 좌절에 부닥쳤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느끼는 출구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2)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축복의 약속 밑에서 시작되었다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사상역시 평탄한 삶과 번영의 구가(謳歌)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오히려 폐허와 역경, 고투 속에서도 마침내 그것들을 뚫고 전개될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선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이 신앙은 그들의 역사의 황혼기에, 아니 박해와 시련의 오랜 밤의 역사에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들 민족의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라”(12:3). 이것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예언이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위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이 3천년 전의 역사기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지구 한구석의 극히 작은 한민족이 세계 인류의 운명의 열쇠를 제 몸에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민족의 선민(選民)사상이라고 하며, 바로 그래서 이들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의 선민사상은 저들의 자질이나 도덕성, 자신이 소유한 자랑스러운 것들에서 오는 우월감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신앙의 철저함에서 온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나타냅니다. 이에 대하여는 위에서 자세하게 전개하였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공포와 전율, 아니 절망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불신앙을 뉘우치게 합니다. 믿음에의 현실을 아브라함에게서 배우려는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침묵에 주목합니다. 성서의 편자 (E자료)는 인륜에 반하는 악습을 전하는 이야기를 아브라함설화에 담아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이스라엘 속에 남아 계속 기적을 낳는 역사를 형성했습니다.

5) 마지막으로 주목한 것은 3천년 전의 역사과정을 거슬러 봅니다. 그때에는 세계적인 강대민족들이 있었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는 세력화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와 힘을 가지고 침투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와 바빌론입니다.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굉장한 위세를 보였는가 하는 것은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려하고 장엄하던 신()들과 종교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춘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미미하던 이스라엘의 종교, 저들의 신앙은 세계의 구석구석에까지 퍼짐으로써 세계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안병무, <역사와 해석> 1993, 67-77)

땅위의 있는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으리라”(22:18). 이 고지(告知)는 이제 분명히 한낱 약한 민족의 교만으로 웃어 버릴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들 민족의

화고한 신앙의 힘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저들이 믿는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이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신앙의 조상들의 역사세계를 순례하시며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의 정립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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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탈출(脫出)의 신앙과 영문(營門)밖의 제단 창세기 12:1-9, 22:1-19

2017-03-05,12

1. 시작하며-탈출의 역사(歷史)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1)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탈출합니다. 당시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 즉 동족에게서 이탈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때에만 가능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베델, 이집트, 네겝, 다시 가나안 그리고 헤브론 등으로 배회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많은 순례의 지명들을 보면 그것은 끝없이 떠 돌아야 하는 유목민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을 떠돌이 아람사람들이라고 고백합니다(26:5). 방랑하는 아람사람은 이스라엘 족장들의 칭호이기도 합니다. 떠돌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런 생명의 보장도 받지 못한 떠돌이는 숙명적으로 싸우면서 살길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떠돌이 생활은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의 40년 광야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탈출! 그것은 과거를 단절하는 행위이며, 가진 것에서 해방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탈출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입니다. 본향을 떠나라고 지시한 하나님은 내가 장차 보여줄 땅을 향해 가라”(12:1)고 합니다. 탈출의 목표는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12:2-3). 이것은 나아가야 할 궁극적 목적을 나타냅니다. 목적을 가진 나그네의 길, 끝없는 순례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적(動的)인 삶의 양태(樣態)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삶은 끝없이 나아가는 삶으로 성격지어 집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생리적(生理的)으로 출산(出産)할 가능성이 없는 처지인데도 하나님은 사라의 몸을 통해서 축복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즉 그 아이 이삭을 낳게 하였고, 그 이삭이 장차 민족들을 다스릴 왕의 선조가 되리라고 고지(告知)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공포와 전율 속에서 영문(營門)밖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지평을 넘어섭니다. 이삭의 생명은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의 담보물입니다. 따라서 그를 죽이는 행위는 종교적 지표도 넘어섭니다. 이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한 개인의 죽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절단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뜻에 복종하려고 아들을 이끌고 가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오직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신앙에서만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1:19)라고 해석합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아브라함-탈출의 신앙과 영문 밖의 제단입니다.

 

2. 아브라함의 신앙과 성서의 구원역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야기는 대표적 모형으로 모든 소명 받은 자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고향땅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보여줄 그 불확정적 미래의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명하신 것은 그의 신앙적 복종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탈출하는 신앙에서 나타난 두 가지 사건에 유념해야 합니다. 1) 창세기 12:1-3절은 명령형식으로 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즉각적인 순종이었습니다(4-9). 그런데 이 무기력한 75세의 중늙은이와 10살 아래인 그의 아내 사래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 즉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이 찾아 왔습니다. 75세가 되기까지 자식도 낳지 못하고 불임의 세월을 살아온 이 늙은 부부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상에서 아주 소박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과 믿음의 삶으로 일관하며 그 후손을 통해 세상만민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항상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결단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순종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 결단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볼 교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아브라함의 소명(召命)사건은 바벨탑의 거인(巨人)주의적인 오만(傲慢)을 가지고 끊임없이 신()에게 항거하는 저 구제불능의 인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구원에로 이끌어내는 일을 하여야 할 모범적 구원공동체의 한 조상(祖上) 즉 아브라함을 이 인간역사 속에 꼭 등장시켜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구원사적 결단의 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민(選民)공동체의 선조(先祖)로서 선택하신 후, 그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땅의 모든 민족을 살리는 자가 되어라(12:1-9)라는 이 사명부여는 성서전체의 문맥에서 볼 때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은 족장들 아브라함-이삭-야곱의 그 선민공동체로 하여금 내던져진 험악한 세월(47:9)에 고난의 세상에서 고난과 구원을 통한 하나님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2-3).

하나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리라고 확언합니다(26:16-19).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 신()의 약속의 성취를 자신의 고난역사 속에서 경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그 받은바 축복의 은혜를 곧 망각했고, 예언자들의 끊임없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배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는 앗시리아제국과 신흥 바빌론제국의 포로가 되어 마침내는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고 유배(流配)생활로 방황할 즈음 그들 이스라엘공동체로 하여금 그 잃어버린 약속의 땅으로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수 있도록 섭리(攝理)하셨습니다(126:1-6).

마른 풀과 같고 시드는 꽃 같은((40:7-8), 길 잃은 양같은 포로유민 이스라엘을 목자같이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어(40:11) 꿈에도 그리는 그들 이스라엘의 조국으로 광복(光復)시키고 그 동터오는 새 역사를 여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소명 때와 꼭 같이 그 조국귀환의 새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너를 다시 일으켜 열국(뭇 민족)의 빛(a light to the nations)으로 삼았노라”(49:6)라고.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소명은 이젠 똑같은 언어로 반복(反復) 전이(轉移)되어 하나님의 인류구원역사의 선구자 아방가르드(avantgarde), 즉 열국의 빛으로의 사명을 또다시 저 포로귀환 이스라엘 새공동체가 위임(委任)받게 된 것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은 바빌론포로의 비극이 토라를 불이행(不履行)한 죄의 결과라는 것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토라에 대한 철저한 기계적/문자적 이행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 부름 받은 자의 사 명을 바르게 인식함에 실패하였습니다. 저들 이스라엘은 불행히도 토라에 대한 문자주의적, 기계주의적인 신봉에만 전 운명을 걸고 매달렸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주의라는 또 하나의 악을 낳고 말았습니다. 즉 구약성서의 히브리신앙을 왜곡시킨 유대교(Judaism)의 바로 그 범죄현실입니다. 이것은 실로 인간역사가 겪는 지겨운 악순환(惡循環)입니다. 율법주의의 이러한 이기적 배타주의 교조라는 또 다른 거인주의적인 오만(titanic hubris)이 우리의 종교역사 속에 뿌리내리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Judaism)는 바로 이러한 오만(傲慢)이 낳은 대표적 산물(産物)입니다.(김이곤, <죽음을 극복하는 길> 2013, 106-113)

유대주의적인 배타적 율법주의의 이 악()은 마침내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게 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에 나타난 복음적 진리를 왜곡 해석하는 유대교의 근본주의 교조주의 신앙을 바로 잡으려고 올바른 성서해석으로 맞서서 싸우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운동을 하시면서 열 두 제자들을 모으고, 교회ecclesia를 세우고(16:18), 교회공동체에도 아브라함의 소명 때와 꼭 같이 예수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새이스라엘로서의 예수공동체-오늘의 교회공동체에로 이어지는 이 소명 받은자의 정체성(identity)이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2:1-9절의 소명에 대한 정의(定意)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새이스라엘, 그리고 예수공동체와 오늘의 교회공동체에게로 정확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란 순례자가 되어야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의 교회(모이는 교회)와 디아스포라의 교회(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형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요하려고만하고, 높아지려고만 하고, 온 세계가 다 기독교국가(theocracy)가 되도록 힘으로 강요한다면(마치 십자군, the Crusader처럼)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2). 교회는 단지 메시아의 비밀(16:20-21)을 간직한 채 주님과 함께 비아 돌로로샤(Via dolorosa)“를 걸어야 참교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교회는 이 길을 걷는 동안만은 참교회일 것입니다.

3.그리스도교 역사는 어떤가요?

본래 그리스도교는 가난한자들과 함께하며 시작된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낡은 질서에 사랑과 자유의 정신으로 나아갔기에 로마제국을 흔들 수 있었습니다. 세계제국인 로마는 가진게 너무 많아 수호적이고 안전제일주의였고 로마의 평화(Pax-Romana)를 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랑의 공동체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승리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그것에 예속되고, 로마제국 안에서 특권계층이 되어 권력, 명예, 재산 등을 가진 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정착의 종교로, 국가권력과 야합하면서, 기득권 수호위한 종교로 변신되었습니다.

이에 항거하고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인데, 그것은 안정을 추구하며 기성세력화한 체제(로마가톨릭교회)를 탈출하여 자유를 찾아 나선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에 의해 이뤄진 신교(新敎)는 프로테스탄트교회(Protestant-Reform-Church)입니다. 그러나 신교마저도 자유하는 탈출의 공동체로써 본래 모습에서 실패한 것은, 자유의 길보다 안정을, 탈출의 길보다 정착을 택하며 권력과 야합이 주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때를 같이해서 일어난 르네상스 물결, 자유와 평등을 생명으로 한 프랑스혁명, 그 뒤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큰 변동이 일어날 때에나, 프로레타리아 해방을 기치로 내세운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지 못하고 무관심의 방관자세로 자기방어태세만 견지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와 무관한 자세,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리스도교 역사는 반성하고 역사의 주 예수와 함께 탈출과 순례자의 길에 나서야 한다는 자의식(自意識)입니다. 바울의 도상(途上)의 나그네로서 자의식이겠습니다.

 

4. 공포와 전율의 제단에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창세기22장은 성서주석가들에 의하여 결박의 본문으로 불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의 결박당함 속에서 예수님의 결박십자가상에서의 도살당함을 봅니다. 창세기22장은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상 최악의 위기였고 동시에 아브라함신앙의 최고 순도(純度)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적 신앙 안에는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모순적인 요구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허공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 같은 모험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고 후손의 약속을 25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이삭을 통해 절정의 성취를 이룬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삭탄생 자체가 후손약속의 절정이 아니라 번제단에서 쪼개진 이삭, 즉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제단에 바친 아브라함의 순종이야말로 후손약속의 궁극적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추상같은 명령,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22:1-2, 참조, 11:17-19)는 말씀 앞에 세차게 뒤흔들립니다. 이렇게 요구하는 하나님이 과연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시고 25년 만에 약속의 성취인 이삭을 선물로 주신 그 하나님인가? 이삭을 중심으로 펼쳐질 후손과 큰 민족 형성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될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만큼 번성하리라는 후손약속은 폐기되었단 말인가?(15:5) 사랑하는 독자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수 있는 가장 반인륜적인 요구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부조리해 보이는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천근(千斤)의 침묵에 바쳐진 말없는 순종이었습니다(22:3-6). 그러나 실상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묘사한 그 공포와 전율을 가득안고서 3일 길의 먼 여정을 떠났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의 거리는 약100km 정도 됩니다. 아브라함은 3일간의 여정에서 이삭을 얻기까지 겪었던 인내의 세월들, 이삭을 낳고 기뻐한 일, 이삭을 위해 맡아들 이스마엘을 좇아냈던 일 등 만감이 교차되는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3일간의 여정동안 과연 아브라함의 마음에 일관성 있는 태도가 유지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사환들에게 아들과 함께 경배하고 오겠다고 말하며 이삭과 자신 둘이서만 마지막 제단으로 걸어갑니다.

그는 엄청난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안고 심연처럼 깊은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진입합니다. 이 비장하고 고독한 신앙의 여정 속에 깃든 침묵을 깨는 이삭의 질문에 그는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예상외로 담담합니다. “하나님이 번제로 쓸 양을 친히 준비할 것이다”(8). 아브라함이 말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은 이삭자신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대체제물인 어린양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또 최악의 경우 자신이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이삭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 까지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11:19). 그러나 이 부활신앙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었을 공포와 전율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이삭을 결박하고 도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칼을 잡고 아들을 도살하려고 했습니다(22:9-10). 이때쯤에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사태의 진상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십대의 소년 이삭은 노인 아버지에게 잠잠히 결박당하는 장면을 보면 이 번제사건이 아브라함신앙의 절정이면서 이삭의 신앙의 진수(眞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순순히 결박당했던 경험속에서 이삭은 아마 수동형 능동신앙을 배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이삭은 하나님과 아버지 모두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결박을 마친 아브라함이 빠른 동작으로 이삭을 도살하려고 그를 강압적으로 붙들고칼을 내려치려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간섭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22:11-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풀에 뿔이 걸린 채 멀찍이 서있는 한 마리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13).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곤경은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여호와이례) 때문에 부활의 축제와 환희로 반전되었습니다. 결국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연단하사 하나님과 더 깊은 신뢰를 맺고 믿음의 반석위에 굳건히 세우기 위한 시험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독생자를 떼어내는 고통도 감수할 만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복주심에만 탐닉하는지,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만 탐닉하는지 검증하는 시험(11-14)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심리적으로는 도살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의탁과 순종에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창세기22장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명제가 성립되는 현장입니다. 결국 천하 만민은 하나님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한 사람만이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매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영문(營門)밖의 제단(祭壇)

후일 우리가운데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시(豫示)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이삭이야말로 메시아 예수의 진정한 예표(prefigurqtion)가 아니고 무엇이랴! 예수와 이삭 사이의 이러한 동형 (同型) 유비(typological analogy)는 무엇보다 그분들의 신앙적 승리가 일어난 곳이 모두 영문밖 이라는 점에서 그 일치점을 찾을 수 있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마을도 성소도 옆에 없는 한적한 산에서 즉 영문(營門)밖에서 이삭을 바친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선교 3년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세상은 철저히 어둠이고, 예수는 대속(代贖)의 죽음과 3일만에 새창조로서의 부활은 그를 죽여야 할 이단(異端)으로 내어 몬 유대교의 성전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복되는 종교의식과 종교행사만 요란하게 반복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오늘의 교회는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영문밖, 모리아산과 골고다 언덕은 모두 성전밖, 또는 교회밖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온 인류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또 우리를 영원히 살리실 확실한 한 표징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곳, 그곳은 성전(聖殿)제의(祭儀)밖이었습니다. 교회/성소는 단지 인류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선교의 전진기지 즉 아방가르드 avantgarde)일 뿐이지, 천국(天國)()을 여닫는 권세 열쇠를 가진 곳(16:19)은 결코 아닙니다.(김이곤, 같은 책, 193-198)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모두 함께 영문밖으로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 새사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배우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1) 그가 탈출의 족장이 된 것은 잘못된 첫역사를 끝맺고 거기서 탈출한 새역사의 시작임을 뜻하며 또한 이스라엘민족사의 모델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역사의 목적을 설정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지금 여기의 삶을 인도하는 것과 유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전()역사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저들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이다음에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몰라 끊임없이 좌절에 부닥쳤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느끼는 출구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2)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축복의 약속 밑에서 시작되었다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사상역시 평탄한 삶과 번영의 구가(謳歌)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오히려 폐허와 역경, 고투 속에서도 마침내 그것들을 뚫고 전개될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선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이 신앙은 그들의 역사의 황혼기에, 아니 박해와 시련의 오랜 밤의 역사에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들 민족의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라”(12:3). 이것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예언이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위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이 3천년 전의 역사기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지구 한구석의 극히 작은 한민족이 세계 인류의 운명의 열쇠를 제 몸에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민족의 선민(選民)사상이라고 하며, 바로 그래서 이들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의 선민사상은 저들의 자질이나 도덕성, 자신이 소유한 자랑스러운 것들에서 오는 우월감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신앙의 철저함에서 온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나타냅니다. 이에 대하여는 위에서 자세하게 전개하였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공포와 전율, 아니 절망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불신앙을 뉘우치게 합니다. 믿음에의 현실을 아브라함에게서 배우려는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침묵에 주목합니다. 성서의 편자 (E자료)는 인륜에 반하는 악습을 전하는 이야기를 아브라함설화에 담아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이스라엘 속에 남아 계속 기적을 낳는 역사를 형성했습니다.

5) 마지막으로 주목한 것은 3천년 전의 역사과정을 거슬러 봅니다. 그때에는 세계적인 강대민족들이 있었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는 세력화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와 힘을 가지고 침투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와 바빌론입니다.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굉장한 위세를 보였는가 하는 것은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려하고 장엄하던 신()들과 종교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춘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미미하던 이스라엘의 종교, 저들의 신앙은 세계의 구석구석에까지 퍼짐으로써 세계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안병무, <역사와 해석> 1993, 67-77)

땅위의 있는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으리라”(22:18). 이 고지(告知)는 이제 분명히 한낱 약한 민족의 교만으로 웃어 버릴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들 민족의

화고한 신앙의 힘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저들이 믿는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이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신앙의 조상들의 역사세계를 순례하시며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의 정립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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