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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과 영성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04-12 (수) 08:57 6년전 2142  

부활신앙과 영성 마가복음 16:1-8, 요한복음 11:25-26, 고린도전서 15:3-8

2017-04-16 부활주일

 

1.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

예수님의 부활은 의로운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불의와 죄악의 세상 한 복판에서 정의와 사랑 그리고 치유와 생명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희망이요 소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핵심쟁점으로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의로운 자에 대한 핍박은 어찌된 일인가? 의로운 자를 무고하게 박해하고 죽이는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롭고 무고한 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하나님은 어찌 할 것인가? 등의 질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을 죽여 모든 이의 배를 불리는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이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신약성서의 전승 사이에 부활사상의 공통점은 예수는 의롭고 죄가 없으나 세상 법정에서 정죄 당하고 십자가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인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문구에서 잘 나타납니다(4:24, 8:11, 1:1, 1:20). 이는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을 변형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부활의 하나님으로 발전한 경우입니다. 부활이란 죽임 당한 예수를 인치신 행위이면서 동시에 믿는 자에 대한 구속적인 의미로 확장됩니다. 부활신앙의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의 혼탁한 세태에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의 바른 이해는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오늘 메시지는 부활신앙과 영성이라는 제목입니다.

2. 복음서의 부활전승의 이야기

복음서의 부활이야기는 빈 무덤 설화출현 설화의 전승으로 요약됩니다. 마가복음에는 부활의 첫 증인을 무서워 떨게 하고 침묵시키는 당혹스런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몇 여인들이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여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는 장면이 제시 됩니다(16:1-2). 무덤 문 앞에 선 그들의 무기력함과 좌절감이 잠시 표출됩니다(16:3). 연이어 그들은 열린 돌문과 함께 무덤에 진입하여 흰옷 입은 정체불명의 한 청년과 마주칩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16:6)는 현장부재의 메시지와 함께 그들에게 전합니다. 갈릴리 재회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을 때 그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당황합니다. 마가복음은 놀람 떨림 도망 무서움 등의 어휘들로 표현하는데, 여인들은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서 아찔한 침묵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텅 빈 부재의 무서움을 통해 그 목격자들의 말문을 막았고, 그 부재의 영성이 예수님 부활의 진귀한 메시지입니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의 찬송 시(2:6-11)가 포함하고 있는 비움의 기독론(Kenotic Christology)은 바울 이전의 빈 무덤 전승에로 소급됩니다. 이 찬송 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초기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심으로 자신을 비워 남루한 종의 형체를 입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그에게 복종의 방식은 겸비한 섬김이었고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이승에서 채우고 모으는 탐욕적 소유가 아니라 비워내고 내보내는 텅 빈 존재로서의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삶이 본시 이러했듯이, 그의 십자가죽음도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는 텅 빈 공허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재하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무로서, 무궁한 생명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마태복음에 와서 그들의 침묵과 두려움은 점점 경이로운 황홀 감으로 번져 갑니다. 돌문이 열린 배경에 큰 지진이 있었고, 그 정체불명의 청년은 하늘에서 내려온 주의 천사로 명시됩니다. 무덤을 방문한 여자들의 무서움은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 천사를 본 무덤지기들에게 전가되는 반면, 여자들에게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평안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28:3-5). 그 여자들에게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 공존합니다(28:8). 예수님은 부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샬롬의 인사를 전하고,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은 곧 실현됩니다(28:10,16). 아울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역으로 변증하는 차원에서 그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둑질 했다는 소문을 오히려 추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28:11-15). 마침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재회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십니다.

모든 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낙담한 제자들에게 희망을 부활시켰고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출현, 나타남의 전승을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성경대로 살아나서 게바와 열 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났으며, 이후에 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또 바울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전15:4-8)고 전해 줍니다. - 예수님의 부활은 좌절과 낙담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희망을 부활시켰고, 그 무기력을 넘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상명령 선교운동의 에너지를 공급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은 교회 안에 머물며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본래 인생에는 육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이 있습니다. 영과 육은 치열하게 서로 싸웁니다. 영을 따르는 삶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지만, 육을 따르는 삶에 대한 심판은 죽음뿐입니다(5-6). 바울의 경험과 성찰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촉매제가 됨을 발견하게 합니다.

3. 카타곰베와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과 영성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은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카타곰베 순례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형성과 예배관습 그리고 성인숭배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재 로마시내에 분포되어 있는 카타곰베는 총 66여 개이며 미로처럼 뚫려있는 그 지하터널 길이만도 모두 합치면 약 900km에 이릅니다.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를 새로운 삶을 기다리며 쉬는 안식휴식의 공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카타곰베는 부활을 기다리며 잠자는 안식처였습니다. 부활사상은 카타곰베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장지는 중요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화장보다 매장을 선호하여 묘지조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타곰베는 박해시기 순교 당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은신할 곳이 필요하면서 증축과 개축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 후 313년 박해가 종식되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카타곰베 양식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카타곰베 지하에는 소규모 강당(카펠라)이나 제단, 모임공간, 각종 조각 상들이 조성되었고, 바로 위 지상이나 인근에는 바실리카 성당이 세워져 수많은 순례 객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순례 객들은 순교 당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종 기도회와 추모회, 장엄한 예식들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순교자들과 이들 소유물에 대한 경배는 중세시대 성인과 성물 숭배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처럼 카타곰베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부활을 기다리며 평안한 안식과 쉼이 있는 신성한 공간이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한 정거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를 매우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방문을 통해 기도와 예배를 드림으로 부활의 영생소망을 기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 신앙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순교정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기독교사상 2015, 4월호)

카타곰베를 통해 형성된 문화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양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에도 원시 그리스도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근거한 믿음이요, 그 믿음은 카타곰베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카타곰베는 박해의 산물이요, 그리스도교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에서 부활신앙을 확인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체포와 구금, 잔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박해도, 죽음도 새 생명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의 증거로서 카타곰베의 역사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카타곰베는 죽음의 세력조차 무력화되고 악과 불의가 맥을 추지 못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은 실로 이세상뿐 아니라 죽음너머의 세계까지도 통치하시는 분임을 증언해 줍니다. 카타곰베는 실로 부활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요, 동터오는 하나님나라의 현실성을 현재화시킨 역사적 실례입니다.

4. 키에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부활과 영성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1849<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펴 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11:4)고 하신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책 속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 속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절망이며, 절망이란 자기를 있게 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라 말하고 이 상실이야말로 죄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와 신앙으로만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두 명의 죄수도 함께 못박혀 죽습니다. 왼쪽 죄수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을 모욕합니다. 그러나 오른쪽 죄수는 죽기직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주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로써 평생 죄짓던 흉악범은 바로 오늘 인류최초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들 인생은 주님 곁에서 함께 못박혀 죽어가는 두 명의 죄수와 같습니다. 실로 우리는 스스로 한 짓을 보아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님은 아무 잘못 없이 우리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간다 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나를 데리고 낙원으로 함께 들어갈 우리의 왕, 예수께서 바로 우리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약속하는 하늘나라의 낙원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며 우리가 평생 죄를 지었다 해도 과거를 묻지 않고 바로 이순간부터 새신랑처럼 내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의 결혼식장으로 행진해 들어갈 것을 소망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던 나사로가 죽자 그의 누이들 두 자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요한11:25-26)고 말씀하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요한11:43)하고 외치심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살려 내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신앙에 눈이 뜬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일흔 살이 넘는 나이에 마지막 걸작품인 <부활>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공명심,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이런 정열에 불태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전쟁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고 도박을 했으며 유부녀와 간음했으며 만취 폭행 살인 등 저지르지 않은 죄악이 없었다. 내가 글 쓰는 것은 오직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문인들과 교제함으로써 추파와 아첨을 소나기처럼 덮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과 부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열 번에 가깝도록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탄식하였듯 어둠의 무덤 속에 이미 죽어 있던 톨스토이에게 어느 날 톨스토이야 나오너라 고 한마디 함으로써 톨스토이를 부활시킨 빛의 주님!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죽음에서 일어난 새 사람이 되어 마침내 <부활>이란 소설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입구는 돌로 막혀있는 무덤 속에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공명심, 권세, 이기심,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쾌락의 어둠 속에 갇혀서 우리들의 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까지 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위해 눈물을 흘려 주옵소서. 우리 위해 기도하여 주시고 큰 소리로 외쳐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5. 예수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영원한 생명

부활의 계절에 즈음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왜 우리에게 부활이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한 개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인류의 새 아담으로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장자로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계기로 모든 인류는 마지막 때에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죽음의 세계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변화된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죄인 된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인간의 대 역전을 경험케 하는 사건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이고, 악이 아니라 선이 이긴다는 것이고,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록 오늘의 현대세계가 생태계의 위기로 치닫고 있고, 문명, 종교간의 무참한 살육과 전쟁, 테러와 폭력이 세계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시며 삶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 부활의 승리가 나 자신과 우리 교회, 사회와 역사 안에서 구현될 수 있을 때, 부활의 주님과 만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이 보장되어 살 수 있을 때 부활신앙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6. 부활신앙을 4.19와 민족통일운동의 새 영성에

부활이란 말의 의미는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의미로서 일어나다, 깨어나다 살아난다, 대항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부활은 잠에서 깨어나든지, 넘어졌다 일어나거나, 병으로부터 일어서거나, 죽음으로부터 또는 억압과 압제에서 일어나는 의거, 봉기의 뜻도 내 포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일단 정지되고 묶이고 죽은 가운데서 생명의 힘을 얻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절망한 자나 포기한 자, 죽음을 시인한 자 등은 부활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좌절과 절망의 씁쓸한 가슴을 안고 부활한 주님을 만났으나 이미 체념했기에 주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사건을 역사의 종말로 믿었고, 부활의 희망으로 펼쳐질 미래의 새 것을 외면하였습니다. 억압의 사슬을 굴종적으로 알고 사는 자들은 미래의 희망을 품지 못하고 삶의 노예로 살아 갑니다. 하지만 잘못된 불의의 억압과 압제를 깨닫고 사슬을 끊고 자유에의 희망을 품고 사는 자는 부활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을 포기한 자는 끝내 죽음에 이르지만 거부하고 생명에의 도전으로 일어서는 자는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어부들이 사람 낚는 제자가 되었고, 앉은벵이가 일어섰고, 병든 자들이 질병에서 해방을 얻으며, 죽은 자가 살아났고, 절망자가 희망을 얻어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십자가사건은 죽임 세력을 극복하여 살림의 새 세계로 향하는 길목이며 부활사건으로 변혁되는 자궁입니다.

21세기 초엽, 지금은 동토의 얼어붙은 만물이 녹아 내리는 봄 4월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56년 전 순수한 민중봉기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부정선거 결과로 무너지게 하였던 4.19의거 사건을 기억하고 깊은 회개의 회상을 해야 합니다. 해방 후 분단시대의 민중운동사에 4.19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틀에서 재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은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악마적으로 몰아간 민족의 사슬입니다. 민중운동은 민족통일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결국 교회의 역할에 의문과 기대를 던집니다.

한국교회는 분단 고착을 외면하고 이대로의 평화에 집착해 왔던 과거와 현재를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민족통일운동은 우리시대의 당면 과제이며 민족운동의 초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분단현실을 뼈 속 깊이 아파하며 인식하고 평화적 민족통일의 미래를 향해 매진하여야 합니다. 이 통일운동 과제 앞에서는 좌우를 향하려는 유혹을 과감히 버리고 앞만을 향하여 전진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여!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희망으로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지혜와 온갖 힘을 발휘하여 신앙고백적인 자세로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분단은 역사의 단절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죄악은 깨끗이 근절시켜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진실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분단현실을 깨뜨리고 민족통일운동의 주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한반도에서 새로운 부활의 경험이 되리라 믿습니다.

정리한다면, 해방 후 민중운동사에서 4.19는 민중운동의 시발로서 혁명적 사건이요, 민중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분단시대에 민족운동의 첫 골고다 십자가사건이 4.19운동으로 집약된 것입니다. 따라서 4.19는 민족운동사의 십자가 사건화되어 이 땅에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으로 민족의 부활을 촉구한 사건입니다. 이기백은 4.19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부정재벌과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활의 달, 4월에 4.19혁명은 억압된 민중이 죽임의 세력을 극복하고 천부의 인권을 되찾으려는 거족적 자기죽음의 희생을 넘어서 부활하게 하였습니다. 4.19혁명이 십자가사건으로 조명될 때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민중운동사는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으로 지향되게 하였고, 줄기찬 악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새 시대 새 사명에 적응하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실현되도록 영적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루돌프 오토는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거룩성의 종교체험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는 거룩성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깊고 오묘한 비합리적인 것으로 종교체험 안에서 발견되는 것, 곧 누미노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미노제는 표현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로서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인 황홀경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신앙과 영성 마가복음 16:1-8, 요한복음 11:25-26, 고린도전서 15:3-8

2017-04-16 부활주일

 

1.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

예수님의 부활은 의로운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불의와 죄악의 세상 한 복판에서 정의와 사랑 그리고 치유와 생명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희망이요 소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핵심쟁점으로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의로운 자에 대한 핍박은 어찌된 일인가? 의로운 자를 무고하게 박해하고 죽이는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롭고 무고한 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하나님은 어찌 할 것인가? 등의 질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을 죽여 모든 이의 배를 불리는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이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신약성서의 전승 사이에 부활사상의 공통점은 예수는 의롭고 죄가 없으나 세상 법정에서 정죄 당하고 십자가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인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문구에서 잘 나타납니다(4:24, 8:11, 1:1, 1:20). 이는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을 변형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부활의 하나님으로 발전한 경우입니다. 부활이란 죽임 당한 예수를 인치신 행위이면서 동시에 믿는 자에 대한 구속적인 의미로 확장됩니다. 부활신앙의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의 혼탁한 세태에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의 바른 이해는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오늘 메시지는 부활신앙과 영성이라는 제목입니다.

2. 복음서의 부활전승의 이야기

복음서의 부활이야기는 빈 무덤 설화출현 설화의 전승으로 요약됩니다. 마가복음에는 부활의 첫 증인을 무서워 떨게 하고 침묵시키는 당혹스런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몇 여인들이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여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는 장면이 제시 됩니다(16:1-2). 무덤 문 앞에 선 그들의 무기력함과 좌절감이 잠시 표출됩니다(16:3). 연이어 그들은 열린 돌문과 함께 무덤에 진입하여 흰옷 입은 정체불명의 한 청년과 마주칩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16:6)는 현장부재의 메시지와 함께 그들에게 전합니다. 갈릴리 재회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을 때 그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당황합니다. 마가복음은 놀람 떨림 도망 무서움 등의 어휘들로 표현하는데, 여인들은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서 아찔한 침묵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텅 빈 부재의 무서움을 통해 그 목격자들의 말문을 막았고, 그 부재의 영성이 예수님 부활의 진귀한 메시지입니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의 찬송 시(2:6-11)가 포함하고 있는 비움의 기독론(Kenotic Christology)은 바울 이전의 빈 무덤 전승에로 소급됩니다. 이 찬송 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초기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심으로 자신을 비워 남루한 종의 형체를 입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그에게 복종의 방식은 겸비한 섬김이었고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이승에서 채우고 모으는 탐욕적 소유가 아니라 비워내고 내보내는 텅 빈 존재로서의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삶이 본시 이러했듯이, 그의 십자가죽음도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는 텅 빈 공허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재하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무로서, 무궁한 생명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마태복음에 와서 그들의 침묵과 두려움은 점점 경이로운 황홀 감으로 번져 갑니다. 돌문이 열린 배경에 큰 지진이 있었고, 그 정체불명의 청년은 하늘에서 내려온 주의 천사로 명시됩니다. 무덤을 방문한 여자들의 무서움은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 천사를 본 무덤지기들에게 전가되는 반면, 여자들에게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평안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28:3-5). 그 여자들에게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 공존합니다(28:8). 예수님은 부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샬롬의 인사를 전하고,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은 곧 실현됩니다(28:10,16). 아울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역으로 변증하는 차원에서 그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둑질 했다는 소문을 오히려 추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28:11-15). 마침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재회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십니다.

모든 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낙담한 제자들에게 희망을 부활시켰고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출현, 나타남의 전승을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성경대로 살아나서 게바와 열 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났으며, 이후에 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또 바울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전15:4-8)고 전해 줍니다. - 예수님의 부활은 좌절과 낙담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희망을 부활시켰고, 그 무기력을 넘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상명령 선교운동의 에너지를 공급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은 교회 안에 머물며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본래 인생에는 육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이 있습니다. 영과 육은 치열하게 서로 싸웁니다. 영을 따르는 삶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지만, 육을 따르는 삶에 대한 심판은 죽음뿐입니다(5-6). 바울의 경험과 성찰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촉매제가 됨을 발견하게 합니다.

3. 카타곰베와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과 영성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은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카타곰베 순례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형성과 예배관습 그리고 성인숭배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재 로마시내에 분포되어 있는 카타곰베는 총 66여 개이며 미로처럼 뚫려있는 그 지하터널 길이만도 모두 합치면 약 900km에 이릅니다.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를 새로운 삶을 기다리며 쉬는 안식휴식의 공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카타곰베는 부활을 기다리며 잠자는 안식처였습니다. 부활사상은 카타곰베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장지는 중요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화장보다 매장을 선호하여 묘지조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타곰베는 박해시기 순교 당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은신할 곳이 필요하면서 증축과 개축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 후 313년 박해가 종식되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카타곰베 양식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카타곰베 지하에는 소규모 강당(카펠라)이나 제단, 모임공간, 각종 조각 상들이 조성되었고, 바로 위 지상이나 인근에는 바실리카 성당이 세워져 수많은 순례 객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순례 객들은 순교 당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종 기도회와 추모회, 장엄한 예식들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순교자들과 이들 소유물에 대한 경배는 중세시대 성인과 성물 숭배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처럼 카타곰베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부활을 기다리며 평안한 안식과 쉼이 있는 신성한 공간이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한 정거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를 매우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방문을 통해 기도와 예배를 드림으로 부활의 영생소망을 기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 신앙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순교정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기독교사상 2015, 4월호)

카타곰베를 통해 형성된 문화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양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에도 원시 그리스도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근거한 믿음이요, 그 믿음은 카타곰베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카타곰베는 박해의 산물이요, 그리스도교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에서 부활신앙을 확인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체포와 구금, 잔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박해도, 죽음도 새 생명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의 증거로서 카타곰베의 역사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카타곰베는 죽음의 세력조차 무력화되고 악과 불의가 맥을 추지 못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은 실로 이세상뿐 아니라 죽음너머의 세계까지도 통치하시는 분임을 증언해 줍니다. 카타곰베는 실로 부활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요, 동터오는 하나님나라의 현실성을 현재화시킨 역사적 실례입니다.

4. 키에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부활과 영성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1849<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펴 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11:4)고 하신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책 속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 속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절망이며, 절망이란 자기를 있게 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라 말하고 이 상실이야말로 죄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와 신앙으로만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두 명의 죄수도 함께 못박혀 죽습니다. 왼쪽 죄수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을 모욕합니다. 그러나 오른쪽 죄수는 죽기직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주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로써 평생 죄짓던 흉악범은 바로 오늘 인류최초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들 인생은 주님 곁에서 함께 못박혀 죽어가는 두 명의 죄수와 같습니다. 실로 우리는 스스로 한 짓을 보아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님은 아무 잘못 없이 우리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간다 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나를 데리고 낙원으로 함께 들어갈 우리의 왕, 예수께서 바로 우리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약속하는 하늘나라의 낙원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며 우리가 평생 죄를 지었다 해도 과거를 묻지 않고 바로 이순간부터 새신랑처럼 내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의 결혼식장으로 행진해 들어갈 것을 소망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던 나사로가 죽자 그의 누이들 두 자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요한11:25-26)고 말씀하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요한11:43)하고 외치심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살려 내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신앙에 눈이 뜬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일흔 살이 넘는 나이에 마지막 걸작품인 <부활>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공명심,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이런 정열에 불태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전쟁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고 도박을 했으며 유부녀와 간음했으며 만취 폭행 살인 등 저지르지 않은 죄악이 없었다. 내가 글 쓰는 것은 오직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문인들과 교제함으로써 추파와 아첨을 소나기처럼 덮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과 부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열 번에 가깝도록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탄식하였듯 어둠의 무덤 속에 이미 죽어 있던 톨스토이에게 어느 날 톨스토이야 나오너라 고 한마디 함으로써 톨스토이를 부활시킨 빛의 주님!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죽음에서 일어난 새 사람이 되어 마침내 <부활>이란 소설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입구는 돌로 막혀있는 무덤 속에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공명심, 권세, 이기심,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쾌락의 어둠 속에 갇혀서 우리들의 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까지 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위해 눈물을 흘려 주옵소서. 우리 위해 기도하여 주시고 큰 소리로 외쳐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5. 예수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영원한 생명

부활의 계절에 즈음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왜 우리에게 부활이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한 개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인류의 새 아담으로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장자로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계기로 모든 인류는 마지막 때에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죽음의 세계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변화된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죄인 된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인간의 대 역전을 경험케 하는 사건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이고, 악이 아니라 선이 이긴다는 것이고,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록 오늘의 현대세계가 생태계의 위기로 치닫고 있고, 문명, 종교간의 무참한 살육과 전쟁, 테러와 폭력이 세계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시며 삶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 부활의 승리가 나 자신과 우리 교회, 사회와 역사 안에서 구현될 수 있을 때, 부활의 주님과 만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이 보장되어 살 수 있을 때 부활신앙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6. 부활신앙을 4.19와 민족통일운동의 새 영성에

부활이란 말의 의미는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의미로서 일어나다, 깨어나다 살아난다, 대항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부활은 잠에서 깨어나든지, 넘어졌다 일어나거나, 병으로부터 일어서거나, 죽음으로부터 또는 억압과 압제에서 일어나는 의거, 봉기의 뜻도 내 포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일단 정지되고 묶이고 죽은 가운데서 생명의 힘을 얻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절망한 자나 포기한 자, 죽음을 시인한 자 등은 부활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좌절과 절망의 씁쓸한 가슴을 안고 부활한 주님을 만났으나 이미 체념했기에 주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사건을 역사의 종말로 믿었고, 부활의 희망으로 펼쳐질 미래의 새 것을 외면하였습니다. 억압의 사슬을 굴종적으로 알고 사는 자들은 미래의 희망을 품지 못하고 삶의 노예로 살아 갑니다. 하지만 잘못된 불의의 억압과 압제를 깨닫고 사슬을 끊고 자유에의 희망을 품고 사는 자는 부활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을 포기한 자는 끝내 죽음에 이르지만 거부하고 생명에의 도전으로 일어서는 자는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어부들이 사람 낚는 제자가 되었고, 앉은벵이가 일어섰고, 병든 자들이 질병에서 해방을 얻으며, 죽은 자가 살아났고, 절망자가 희망을 얻어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십자가사건은 죽임 세력을 극복하여 살림의 새 세계로 향하는 길목이며 부활사건으로 변혁되는 자궁입니다.

21세기 초엽, 지금은 동토의 얼어붙은 만물이 녹아 내리는 봄 4월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56년 전 순수한 민중봉기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부정선거 결과로 무너지게 하였던 4.19의거 사건을 기억하고 깊은 회개의 회상을 해야 합니다. 해방 후 분단시대의 민중운동사에 4.19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틀에서 재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은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악마적으로 몰아간 민족의 사슬입니다. 민중운동은 민족통일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결국 교회의 역할에 의문과 기대를 던집니다.

한국교회는 분단 고착을 외면하고 이대로의 평화에 집착해 왔던 과거와 현재를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민족통일운동은 우리시대의 당면 과제이며 민족운동의 초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분단현실을 뼈 속 깊이 아파하며 인식하고 평화적 민족통일의 미래를 향해 매진하여야 합니다. 이 통일운동 과제 앞에서는 좌우를 향하려는 유혹을 과감히 버리고 앞만을 향하여 전진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여!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희망으로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지혜와 온갖 힘을 발휘하여 신앙고백적인 자세로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분단은 역사의 단절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죄악은 깨끗이 근절시켜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진실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분단현실을 깨뜨리고 민족통일운동의 주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한반도에서 새로운 부활의 경험이 되리라 믿습니다.

정리한다면, 해방 후 민중운동사에서 4.19는 민중운동의 시발로서 혁명적 사건이요, 민중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분단시대에 민족운동의 첫 골고다 십자가사건이 4.19운동으로 집약된 것입니다. 따라서 4.19는 민족운동사의 십자가 사건화되어 이 땅에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으로 민족의 부활을 촉구한 사건입니다. 이기백은 4.19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부정재벌과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활의 달, 4월에 4.19혁명은 억압된 민중이 죽임의 세력을 극복하고 천부의 인권을 되찾으려는 거족적 자기죽음의 희생을 넘어서 부활하게 하였습니다. 4.19혁명이 십자가사건으로 조명될 때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민중운동사는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으로 지향되게 하였고, 줄기찬 악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새 시대 새 사명에 적응하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실현되도록 영적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루돌프 오토는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거룩성의 종교체험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는 거룩성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깊고 오묘한 비합리적인 것으로 종교체험 안에서 발견되는 것, 곧 누미노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미노제는 표현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로서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인 황홀경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신앙과 영성 마가복음 16:1-8, 요한복음 11:25-26, 고린도전서 15:3-8

2017-04-16 부활주일

 

1.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

예수님의 부활은 의로운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불의와 죄악의 세상 한 복판에서 정의와 사랑 그리고 치유와 생명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희망이요 소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핵심쟁점으로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의로운 자에 대한 핍박은 어찌된 일인가? 의로운 자를 무고하게 박해하고 죽이는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롭고 무고한 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하나님은 어찌 할 것인가? 등의 질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을 죽여 모든 이의 배를 불리는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이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신약성서의 전승 사이에 부활사상의 공통점은 예수는 의롭고 죄가 없으나 세상 법정에서 정죄 당하고 십자가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인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문구에서 잘 나타납니다(4:24, 8:11, 1:1, 1:20). 이는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을 변형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부활의 하나님으로 발전한 경우입니다. 부활이란 죽임 당한 예수를 인치신 행위이면서 동시에 믿는 자에 대한 구속적인 의미로 확장됩니다. 부활신앙의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의 혼탁한 세태에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의 바른 이해는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오늘 메시지는 부활신앙과 영성이라는 제목입니다.

2. 복음서의 부활전승의 이야기

복음서의 부활이야기는 빈 무덤 설화출현 설화의 전승으로 요약됩니다. 마가복음에는 부활의 첫 증인을 무서워 떨게 하고 침묵시키는 당혹스런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몇 여인들이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여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는 장면이 제시 됩니다(16:1-2). 무덤 문 앞에 선 그들의 무기력함과 좌절감이 잠시 표출됩니다(16:3). 연이어 그들은 열린 돌문과 함께 무덤에 진입하여 흰옷 입은 정체불명의 한 청년과 마주칩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16:6)는 현장부재의 메시지와 함께 그들에게 전합니다. 갈릴리 재회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을 때 그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당황합니다. 마가복음은 놀람 떨림 도망 무서움 등의 어휘들로 표현하는데, 여인들은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서 아찔한 침묵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텅 빈 부재의 무서움을 통해 그 목격자들의 말문을 막았고, 그 부재의 영성이 예수님 부활의 진귀한 메시지입니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의 찬송 시(2:6-11)가 포함하고 있는 비움의 기독론(Kenotic Christology)은 바울 이전의 빈 무덤 전승에로 소급됩니다. 이 찬송 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초기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심으로 자신을 비워 남루한 종의 형체를 입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그에게 복종의 방식은 겸비한 섬김이었고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이승에서 채우고 모으는 탐욕적 소유가 아니라 비워내고 내보내는 텅 빈 존재로서의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삶이 본시 이러했듯이, 그의 십자가죽음도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는 텅 빈 공허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재하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무로서, 무궁한 생명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마태복음에 와서 그들의 침묵과 두려움은 점점 경이로운 황홀 감으로 번져 갑니다. 돌문이 열린 배경에 큰 지진이 있었고, 그 정체불명의 청년은 하늘에서 내려온 주의 천사로 명시됩니다. 무덤을 방문한 여자들의 무서움은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 천사를 본 무덤지기들에게 전가되는 반면, 여자들에게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평안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28:3-5). 그 여자들에게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 공존합니다(28:8). 예수님은 부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샬롬의 인사를 전하고,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은 곧 실현됩니다(28:10,16). 아울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역으로 변증하는 차원에서 그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둑질 했다는 소문을 오히려 추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28:11-15). 마침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재회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십니다.

모든 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낙담한 제자들에게 희망을 부활시켰고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출현, 나타남의 전승을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성경대로 살아나서 게바와 열 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났으며, 이후에 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또 바울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전15:4-8)고 전해 줍니다. - 예수님의 부활은 좌절과 낙담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희망을 부활시켰고, 그 무기력을 넘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상명령 선교운동의 에너지를 공급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은 교회 안에 머물며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본래 인생에는 육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이 있습니다. 영과 육은 치열하게 서로 싸웁니다. 영을 따르는 삶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지만, 육을 따르는 삶에 대한 심판은 죽음뿐입니다(5-6). 바울의 경험과 성찰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촉매제가 됨을 발견하게 합니다.

3. 카타곰베와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과 영성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은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카타곰베 순례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형성과 예배관습 그리고 성인숭배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재 로마시내에 분포되어 있는 카타곰베는 총 66여 개이며 미로처럼 뚫려있는 그 지하터널 길이만도 모두 합치면 약 900km에 이릅니다.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를 새로운 삶을 기다리며 쉬는 안식휴식의 공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카타곰베는 부활을 기다리며 잠자는 안식처였습니다. 부활사상은 카타곰베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장지는 중요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화장보다 매장을 선호하여 묘지조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타곰베는 박해시기 순교 당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은신할 곳이 필요하면서 증축과 개축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 후 313년 박해가 종식되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카타곰베 양식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카타곰베 지하에는 소규모 강당(카펠라)이나 제단, 모임공간, 각종 조각 상들이 조성되었고, 바로 위 지상이나 인근에는 바실리카 성당이 세워져 수많은 순례 객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순례 객들은 순교 당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종 기도회와 추모회, 장엄한 예식들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순교자들과 이들 소유물에 대한 경배는 중세시대 성인과 성물 숭배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처럼 카타곰베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부활을 기다리며 평안한 안식과 쉼이 있는 신성한 공간이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한 정거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를 매우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방문을 통해 기도와 예배를 드림으로 부활의 영생소망을 기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카타곰베는 원시 그리스도인 신앙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순교정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기독교사상 2015, 4월호)

카타곰베를 통해 형성된 문화는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양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에도 원시 그리스도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근거한 믿음이요, 그 믿음은 카타곰베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카타곰베는 박해의 산물이요, 그리스도교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카타곰베에서 부활신앙을 확인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체포와 구금, 잔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박해도, 죽음도 새 생명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의 증거로서 카타곰베의 역사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카타곰베는 죽음의 세력조차 무력화되고 악과 불의가 맥을 추지 못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은 실로 이세상뿐 아니라 죽음너머의 세계까지도 통치하시는 분임을 증언해 줍니다. 카타곰베는 실로 부활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요, 동터오는 하나님나라의 현실성을 현재화시킨 역사적 실례입니다.

4. 키에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부활과 영성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1849<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펴 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11:4)고 하신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책 속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 속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절망이며, 절망이란 자기를 있게 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라 말하고 이 상실이야말로 죄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와 신앙으로만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두 명의 죄수도 함께 못박혀 죽습니다. 왼쪽 죄수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을 모욕합니다. 그러나 오른쪽 죄수는 죽기직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주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로써 평생 죄짓던 흉악범은 바로 오늘 인류최초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들 인생은 주님 곁에서 함께 못박혀 죽어가는 두 명의 죄수와 같습니다. 실로 우리는 스스로 한 짓을 보아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님은 아무 잘못 없이 우리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간다 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나를 데리고 낙원으로 함께 들어갈 우리의 왕, 예수께서 바로 우리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약속하는 하늘나라의 낙원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며 우리가 평생 죄를 지었다 해도 과거를 묻지 않고 바로 이순간부터 새신랑처럼 내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의 결혼식장으로 행진해 들어갈 것을 소망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던 나사로가 죽자 그의 누이들 두 자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요한11:25-26)고 말씀하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요한11:43)하고 외치심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살려 내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신앙에 눈이 뜬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일흔 살이 넘는 나이에 마지막 걸작품인 <부활>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공명심,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이런 정열에 불태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전쟁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고 도박을 했으며 유부녀와 간음했으며 만취 폭행 살인 등 저지르지 않은 죄악이 없었다. 내가 글 쓰는 것은 오직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문인들과 교제함으로써 추파와 아첨을 소나기처럼 덮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과 부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열 번에 가깝도록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탄식하였듯 어둠의 무덤 속에 이미 죽어 있던 톨스토이에게 어느 날 톨스토이야 나오너라 고 한마디 함으로써 톨스토이를 부활시킨 빛의 주님!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죽음에서 일어난 새 사람이 되어 마침내 <부활>이란 소설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입구는 돌로 막혀있는 무덤 속에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공명심, 권세, 이기심,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쾌락의 어둠 속에 갇혀서 우리들의 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까지 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위해 눈물을 흘려 주옵소서. 우리 위해 기도하여 주시고 큰 소리로 외쳐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5. 예수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영원한 생명

부활의 계절에 즈음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왜 우리에게 부활이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한 개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인류의 새 아담으로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장자로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계기로 모든 인류는 마지막 때에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죽음의 세계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변화된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죄인 된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인간의 대 역전을 경험케 하는 사건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이고, 악이 아니라 선이 이긴다는 것이고,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록 오늘의 현대세계가 생태계의 위기로 치닫고 있고, 문명, 종교간의 무참한 살육과 전쟁, 테러와 폭력이 세계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시며 삶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 부활의 승리가 나 자신과 우리 교회, 사회와 역사 안에서 구현될 수 있을 때, 부활의 주님과 만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이 보장되어 살 수 있을 때 부활신앙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6. 부활신앙을 4.19와 민족통일운동의 새 영성에

부활이란 말의 의미는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의미로서 일어나다, 깨어나다 살아난다, 대항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부활은 잠에서 깨어나든지, 넘어졌다 일어나거나, 병으로부터 일어서거나, 죽음으로부터 또는 억압과 압제에서 일어나는 의거, 봉기의 뜻도 내 포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일단 정지되고 묶이고 죽은 가운데서 생명의 힘을 얻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절망한 자나 포기한 자, 죽음을 시인한 자 등은 부활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좌절과 절망의 씁쓸한 가슴을 안고 부활한 주님을 만났으나 이미 체념했기에 주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사건을 역사의 종말로 믿었고, 부활의 희망으로 펼쳐질 미래의 새 것을 외면하였습니다. 억압의 사슬을 굴종적으로 알고 사는 자들은 미래의 희망을 품지 못하고 삶의 노예로 살아 갑니다. 하지만 잘못된 불의의 억압과 압제를 깨닫고 사슬을 끊고 자유에의 희망을 품고 사는 자는 부활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을 포기한 자는 끝내 죽음에 이르지만 거부하고 생명에의 도전으로 일어서는 자는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어부들이 사람 낚는 제자가 되었고, 앉은벵이가 일어섰고, 병든 자들이 질병에서 해방을 얻으며, 죽은 자가 살아났고, 절망자가 희망을 얻어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십자가사건은 죽임 세력을 극복하여 살림의 새 세계로 향하는 길목이며 부활사건으로 변혁되는 자궁입니다.

21세기 초엽, 지금은 동토의 얼어붙은 만물이 녹아 내리는 봄 4월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56년 전 순수한 민중봉기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부정선거 결과로 무너지게 하였던 4.19의거 사건을 기억하고 깊은 회개의 회상을 해야 합니다. 해방 후 분단시대의 민중운동사에 4.19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틀에서 재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은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악마적으로 몰아간 민족의 사슬입니다. 민중운동은 민족통일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결국 교회의 역할에 의문과 기대를 던집니다.

한국교회는 분단 고착을 외면하고 이대로의 평화에 집착해 왔던 과거와 현재를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민족통일운동은 우리시대의 당면 과제이며 민족운동의 초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분단현실을 뼈 속 깊이 아파하며 인식하고 평화적 민족통일의 미래를 향해 매진하여야 합니다. 이 통일운동 과제 앞에서는 좌우를 향하려는 유혹을 과감히 버리고 앞만을 향하여 전진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여!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희망으로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지혜와 온갖 힘을 발휘하여 신앙고백적인 자세로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분단은 역사의 단절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죄악은 깨끗이 근절시켜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진실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분단현실을 깨뜨리고 민족통일운동의 주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한반도에서 새로운 부활의 경험이 되리라 믿습니다.

정리한다면, 해방 후 민중운동사에서 4.19는 민중운동의 시발로서 혁명적 사건이요, 민중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분단시대에 민족운동의 첫 골고다 십자가사건이 4.19운동으로 집약된 것입니다. 따라서 4.19는 민족운동사의 십자가 사건화되어 이 땅에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으로 민족의 부활을 촉구한 사건입니다. 이기백은 4.19혁명은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부정재벌과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활의 달, 4월에 4.19혁명은 억압된 민중이 죽임의 세력을 극복하고 천부의 인권을 되찾으려는 거족적 자기죽음의 희생을 넘어서 부활하게 하였습니다. 4.19혁명이 십자가사건으로 조명될 때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민중운동사는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으로 지향되게 하였고, 줄기찬 악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새 시대 새 사명에 적응하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실현되도록 영적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루돌프 오토는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거룩성의 종교체험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는 거룩성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깊고 오묘한 비합리적인 것으로 종교체험 안에서 발견되는 것, 곧 누미노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미노제는 표현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로서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인 황홀경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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