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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1) - 김재준 목사

장공기념사… (기타,,기타) 2017-07-17 (월) 17:44 6년전 138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1)
- 마태복음 5장 1~12절


이 과학과 기술문명의 시대, 세계가 ‘가진 나라’와 ‘못가진 나라’와의 대결로 浮刻(부각)된 이 세대에 있어서의 사실상 ‘八福’(팔복)이란 예수님의 교훈이 적절하게 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지나간 세대의 ‘名言’(명언)으로 진열장에 모셔두는 정도의 대접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그렇잖으면 하늘의 무지개처럼 높고 아름다운 것임은 찬탄하면서도 일상 생활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미리부터 敬遠(경원)하는 일은 없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八福’(팔복)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복’이라면 얼른 우리 머리에 동양식의 ‘팔자 좋은’, ‘수부다남자(壽富多男子)’ 따위 개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 사용된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원래 神(신)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호이 마카리오스’ 즉, ‘복되신 분들’이란 것은 신들을 가리킨 말이었으며 신약성서에서도 ‘복되신 하나님’(딤전 1:11), ‘하나님은 복되시고’(딤전 6:15) 등의 구절이 있다. 요컨대 이것은 ‘하나님 관계에서의 복’, 즉 신앙적, 정신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다른 말로 표시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등의 표현과 같은 성질의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맨 처음으로 말씀하신 ‘복’ -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누가복음에는 ‘마음이’란 구절이 없고 다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쓰여 있다(눅 6:20). 헬라에 ‘가난하다’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페네스’로서 겨우 살아가는 형편을 말함이요 또 하나는 ‘프토코스’로서 아무 것도 없는 ‘거지’를 의미한다. ‘八福’(팔복)에 사용된 말은 ‘프토코스’다. 그러니까 ‘거지’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적빈자’를 의미한 것이다. ‘가난’이 축복이라면 현대인은 당초부터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가난’을 면하고 부요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사람이 이렇게 인간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주로 ‘가난’ 때문이 아닌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하는 속담은 한국 사람이 옛날부터 가난에 쪼들린 초라한 모습일 것이다. 집단 자살이니 윤락 여성이니 도적질이니 하는 따위 사회악의 대부분은 가난 때문이라는 사실을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을 더욱 풍성한 있음으로 창조해 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 이 인간성을 위축, 왜곡, 고갈시키는 ‘가난’을 복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동양 도덕에는 물질을 천히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물질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좋다’고 선언하신 축복의 세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신’을 이루어 인간에게 오셨고,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여 육신의 위치를 하나님에 까지 높인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창조사업에서 최고의 모습인 인간 육체를 그 창조된 법칙대로 옳게 건사하고 건강하게 하고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예법일 것이다. 섣부른 금욕주의는 자학적(自虐的)인 범죄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 자체가 덕이요 축복일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가난’(마음의 가난도 포함하여)이 복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그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그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생활 전 부문에 누룩처럼 퍼지게 하는 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함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물질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떡을 먹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그것을 내 피와 살로 소화하여 나의 활력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인간’으로의 삶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거의 전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물질만을 추구하며 물질만 부요하면 그만이라는 신념에서 富(부)를 추구하기 때문에 가난에서 좌절하고 富裕(부유)에서 부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먹지 않는 인간은 배고파도 죽고 배불러도 죽는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돌이키기에는 富(부)에 자족하여 스스로 교만한 사람보다는 가난에 시달려 하나님께 호소하는 인간이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말씀이라든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라든지에서 예수님은 이런 심경을 말씀하고 계신다. 가난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극복의 방향이 다만 富(부)의 획득인 경우에는 이리를 피하여 곰의 굴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마음의 가난’이란 구절이 붙여졌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사랑)을 지향하는 가난의 극복! 이에 반대할 현대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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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1970년대 산상수훈의 팔복에 대해서 쓰신 글입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홈페이지(www.changgong.or.kr)에도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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