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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은혜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08-03 (목) 16:56 2개월전 159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에베소서 2: 1- 10

2017-08-20

 

은혜; 회복된 개념

중세기 동안, 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촉진할 목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 주입한 어떤 실체로서 초자연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는 철저하게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간격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기 전에, 이 간격을 이어주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창조하신 그 무엇으로, 순수한 인간본성과 신()의 본성사이에 가교역할을 하는 것- 일종의 중간(中間)()- 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은혜라는 개념은 일종의 교두보 또는 앞과 뒤를 연결하는 중간지대(middle ground)로 여겨졌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깊은 틈이 이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그런 은혜개념들이 혹독한 비판을 받는 주제였습니다. 16세기의 막이 열릴 무렵에는, 그러한 개념들은 대부분 나쁜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개혁자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찾아보기로 합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은혜경험 이야기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본문이 말하는 의미에 민감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근본 의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롭고 특별한 사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격이 보여주신 태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라고 하는 강력한 인격성이 개혁자들을 통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자비로우심이라는 말로 인식하는 신성한 임재와 행동의 틀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만나려 하십니다. 우리가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의 목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로부터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혼쾌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당신이 계신 본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문에 가난한 분이 되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진 깊이를 측량하여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그들의 삶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삶속에 나타난 사건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루터의 내적인 투쟁이야기

젊은 시절의 루터는 자신이 죄인임을 강렬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1483년에 태어나 1505년에 대학도시인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꼼꼼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음에도,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의 양심은 이런 죄들로 인해 격렬한 고통을 체험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절감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그는 죄로 가득한 상황이라는 올무에 걸려든 것 같았으며, 거기로부터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치 환각 약물에 중독된 자처럼, 그는 갈고리에 꿰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 그런 죄를 못 본채 넘어가실 수 있겠는가? 루터는 특히 바울이 즐겨 사용하였던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라는 문구로 인해 특별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실 로마서 1:16-17절을 보면,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 사실상 같은 것으로 봅니다. 루터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루터가 보기에 복음은 의인들에게나 좋은 소식이었지 자신과 같은 죄인들에겐 상관없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루터를 포함한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죄인임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인 1545년에 쓴 어떤 글에서 루터는 청년시절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영혼의 고통을 이렇게 되새기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를 증오 했었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나아가 그 의를 통해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한 사람의 수도사로서 흠잡을게 없는 양심을 소유한자임을 깨닫고 있었다...나는 자신에게 비참한 죄인들은 원죄(原罪)로 말미암아 영원히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게다가 구약의 율법으로 우리 어깨위에 모든 종류의 짐들을 더 많이 올려놓으시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이 복음을 통하여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드시다니,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 뒤,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1515년쯤에 루터는 자신의 죄를 포함하여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같은 말이 그에게 극렬한 공포심을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라는 테마와 잘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공의가 아니라, 도리어 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얻으며 평강을 찾을 수 있도록,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자신이 마치 낙원에 들어간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성경의 모든 면이 루터에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루터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증오하였던 바로 그곳에서, 이제는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말씀을 가장 달콤한 말씀으로 찬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바울 속에 있던 이 말씀이 루터에게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입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루터에게 은혜는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은 사랑받고 있기에 놀라운 매력이 있는 것이지, 그들이 매력이 있어서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사랑 받을 만 하기 전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죄의 권세를 부수시고 정죄를 말끔히 없애버리시고, 나아가 평온과 양심과 마음의 평강을 허락하셨다는 놀라운 통찰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은 우리에게 보이신 자비로운 행위들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끼친 영향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일- 이를테면 그의 회심(回心)을 빈번하게 증언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만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2)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도 인상적인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1484년에 태어났고, 취리히 대 예배당에서 백성들의 제사장(Leutpriest)이라는 새 직무를 시작함으로, 자신의 35세 생일(11)을 자축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개혁프로그램을 설교하고, 취리히 시()안에서 정규 목회자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늦여름에 츠빙글리는 임박해오는 죽음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해 여름에 전염병이 취리히를 강타하자 츠빙글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문하며 위로하는 일에 온전히 매달렸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취리히 전체 인구의 3분의1 가량이 숨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8월께는 츠빙글리 자신도 큰 병을 얻었고, 소생의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한편의 시()를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심정을 드러내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오로지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고 철저히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츠빙글리는 회복되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섭리와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곡조와 함께 울려 퍼졌습니다. 은혜는 인간실존의 행로(行路)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인도하시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기꺼이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의 호의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로 그 은혜는 인간의 삶속에서 그 호의가 실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은혜는, 츠빙글리에게 하나님께서 역동성과 창조성이 넘치는 모습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인생들 속에 개입하심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은혜는 츠빙글리에게 하나님께서 역동성과 창조성이 넘치는 모습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인생들 속에 개입하심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3) 1509년에 태어난 칼빈(John Calvin)은 일찍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듯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놔용(Noyon)성당의 유력한 행정책임자였고, 칼빈은 그 지역교회의 유력한 후원자가문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1529년이 되자, 이런 가망성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칼빈의 아버지는 몇 가지 회계장부의 불일치사례가 드러나면서, 성당에서 신임을 잃게 됩니다. 그 무렵 칼빈은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칼빈은 법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기질을 갖추었지만, 당시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던 새로운 복음주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였고 공감합니다. 1533년 말과 1534년 초쯤에 칼빈은 훗날 스 스로 급작스러운 회심이라 표현했던 하나의 체험을 합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자신이 마치 자신만의 방식에 얽매인 채, 친숙하고 위안이 되는 옛 종교에 견고하게 참호를 파고 그의 몸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입증할만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 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에게 옛 종교와 습속(習俗)과 관계를 끊게 하셨고, 나아가 복음을 섬기는 길로 나가도록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칼빈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고 있었습니다. 은혜는 그런 방식으로 죄와 무지(無知)에 찌든 상황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죄의 수렁에서 구출해내며, 하나님에 맞섰던 자들을 길들여 그분께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울러 칼빈은 자신과 바울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칼빈은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출판물이 되었던 책- 15363월에 출판된 <기독교강요>-를 쓰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문제로 분주하였습니다. 15367월에 그는 스트라스부르(Starsbourg)로 가서 중요한 작업을 진척시켜 완성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에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으로 파리와 스트라스부르 사이의 통로가 막혀 남쪽 도시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제네바 개혁자 파렐(Guillaume Farel)를 만나 이 도시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라는 요청을 받고 제네바에 머물러 그곳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칼빈은 여러 번의 마음의 동요(動搖)와 추방(追放)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제네바에서 사역(事役)하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강력한 자각을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나의 소명을 스스로 화신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들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은혜는 실제인간의 삶-단지 일반적인 인간의 삶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그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제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민중들의 삶속에서 창조성 넘치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새 힘을 부여하며 삶을 바꾸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썼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그 은혜 씨앗이 자신의 삶속에서 현실로 나타났음을 동시에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민중을 위하여 베푸신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도 선용할 수 있는 통찰입니다. (알리스터 매그라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좋은 씨앗, 2005, 243-255 참조)

종교개혁5백주년을 맞으며 개혁자들의 모토 가운데 중요한 항목인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영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시도해 본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들

덴마아크의 철학자, 종교사상가 키에르케고오르(1813-1855)는 자유 하는 인간실존에 대하여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심미적 단계에서의 자유와 도덕적 단계에서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 단계에서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이 세 가지 자유를 다 소유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자유 하는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의식(自意識) 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몸을 씨앗삼아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용서의 자유로운 사람을 인간들에게 심어주고, 성령의 능력을 인간성 안에 보내서 인간이 그 은혜, 즉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새롭게 자유를 누리고 살게 되는 참다운 인간상을 창조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구원운동입니다.

인간 삶의 행. 불행 역시 세상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가치관, 세계관에 좌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 역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행과 운명을 믿는, 운명중심적인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히 농경시대와 봉건시대와 피압박민족시대는 더욱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학적으로 율법주의라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모든 것이 보상이요, 보수요,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합리적이요 지성적이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기쁨과 행복보다는 자기가 무엇을 좀 이루었다고, 무엇이 되었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또 절망합니다. 셋째는 은혜를 알고,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은혜 중심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수고를 하면서 그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선재적(先在的) 은혜를 믿습니다. 은혜가 먼저요, 은혜 안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 높고 힘차게 하늘을 날아 갑니다. 그러나 날기 위해서는 먼저 공기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은혜가 먼저입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먼저 있고, 은혜 안에 내 수고도 있습니다. 내 땀 흘림도 거기에 있고, 내 모든 노력도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은혜 안에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중심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믿음이라는 그릇에 담겨있습니다. 믿음이 있고야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그는 많은 수고와 희생 그리고 땀을 흘렸고, 평생 교회를 세우고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4. 하나님의 선물로서 은혜라는 이야기

본문은 가장 큰 은혜,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을 회상해 보니 우리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라고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는 길을 가다가 만취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를 비난 하겠어요? 혹은 그를 저주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와 내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타니엘 호오손의 <주홍글씨>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간음한 사람이라는 표시로 ‘A’(Adultery)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이 여자를 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재판장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재판할 것입니까? 본질상 다 진노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은혜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을 뿐이요, 사람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문 2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큰 구원의 사건, 구원의 역사- 그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그 사건이 나에게 관계되고, 내게서 현실화하고, 내게 생명이 되는 것, 또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아무리 많이 듣고, 아무리 많은 시간을 배웠어도 믿어지지 않는 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는 그 순간부터 은혜의 현실성이 이루어집니다.

은사(恩赦)’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가시적 효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모든 세계의 사건 하나 하나에서 많은 은사를 경험합니다. 은사는 가시적(可視的) 은혜(恩惠)입니다. 구체(具體)적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믿음 또한 은혜입니다. 믿어지는 것, 깨달아지는 것, 감격하는 것, 이 자체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선물(膳物)’이란 원래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라는 것은 그 속에 깊은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물질로만 받으면 뇌물입니다. 문제는 그 선물에 담겨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선물이 선물되는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좋습니다. 그 속에 마음을 담는 자세가, 그리고 그 마음을 받는 자세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물성(膳物性)’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자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는 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받을 때에만 선물이 선물될 수 있습니다. 선물의 의미를 모르면 그것은 뇌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 때에는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뜻을 모르고, 그 사랑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랑은 본래 어떤 보수나 보상이나 댓가가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빚은 갚을 수 있으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5. 은혜의 새 윤리를 희망하며

그리스도교는 인간구원을 제일차적인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인간구원이란 것은 사후(死後)천당(天堂)”이라는 개인영혼의 영존(永存)만을 의미함이 아닙니다. 나사렛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선교선언에서 이것이 명시되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이것은 인간이 몸과 마음으로 자유하게 하려는 인간해방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인간구원이란 몸의 질병, 생활의 가난, 체제의 포로, 무지의 암혹 등등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선교생활에서 병자를 고치고,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고, 죄를 용서하고, 타락자를 치켜 올리고, 사회에서 소외당한 세리 창기 등을 친구로 사귄 것은 모두가 인간존중 인간구원의 일환(一環)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을 최종적, 운명적으로 억압 말살하는 죄책과 죽음에서 인간을 자유케 하려는 속죄와 영생에의 염원(念願)이며 그 달성(達成)이었습니다.

인간을 마치 노예같이 다루는 현실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회복시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서의 본연의 긍지를 되찾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엄한 존재로 살며 일하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이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이해아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소명을 받아 역사의 한 가운데서 수난하는 한국교회의 창조적 소수자들의 소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안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은혜로 된 것이고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榮光)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깊이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가 내 노력인 것입니까? 설익은 사람들은 99%가 자기노력이고, 1%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100%가 다 은혜요, 내가 수고한 그것도 전부 은혜입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새로운 윤리가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은혜로 살고, 은혜를 전하며, 은혜를 증거하고, 은혜로 이웃 사람을 만나는 그때에, 진실로 은혜의 새 윤리의 시대가 전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선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고 생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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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은혜 에베소서 2: 1- 10

2017-08-20

 

은혜; 회복된 개념

중세기 동안, 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촉진할 목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 주입한 어떤 실체로서 초자연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는 철저하게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간격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기 전에, 이 간격을 이어주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창조하신 그 무엇으로, 순수한 인간본성과 신()의 본성사이에 가교역할을 하는 것- 일종의 중간(中間)()- 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은혜라는 개념은 일종의 교두보 또는 앞과 뒤를 연결하는 중간지대(middle ground)로 여겨졌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깊은 틈이 이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그런 은혜개념들이 혹독한 비판을 받는 주제였습니다. 16세기의 막이 열릴 무렵에는, 그러한 개념들은 대부분 나쁜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개혁자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찾아보기로 합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은혜경험 이야기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본문이 말하는 의미에 민감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근본 의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롭고 특별한 사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격이 보여주신 태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라고 하는 강력한 인격성이 개혁자들을 통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자비로우심이라는 말로 인식하는 신성한 임재와 행동의 틀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만나려 하십니다. 우리가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의 목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로부터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혼쾌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당신이 계신 본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문에 가난한 분이 되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진 깊이를 측량하여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그들의 삶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삶속에 나타난 사건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루터의 내적인 투쟁이야기

젊은 시절의 루터는 자신이 죄인임을 강렬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1483년에 태어나 1505년에 대학도시인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꼼꼼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음에도,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의 양심은 이런 죄들로 인해 격렬한 고통을 체험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절감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그는 죄로 가득한 상황이라는 올무에 걸려든 것 같았으며, 거기로부터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치 환각 약물에 중독된 자처럼, 그는 갈고리에 꿰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 그런 죄를 못 본채 넘어가실 수 있겠는가? 루터는 특히 바울이 즐겨 사용하였던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라는 문구로 인해 특별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실 로마서 1:16-17절을 보면,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 사실상 같은 것으로 봅니다. 루터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루터가 보기에 복음은 의인들에게나 좋은 소식이었지 자신과 같은 죄인들에겐 상관없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루터를 포함한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죄인임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인 1545년에 쓴 어떤 글에서 루터는 청년시절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영혼의 고통을 이렇게 되새기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를 증오 했었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나아가 그 의를 통해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한 사람의 수도사로서 흠잡을게 없는 양심을 소유한자임을 깨닫고 있었다...나는 자신에게 비참한 죄인들은 원죄(原罪)로 말미암아 영원히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게다가 구약의 율법으로 우리 어깨위에 모든 종류의 짐들을 더 많이 올려놓으시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이 복음을 통하여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드시다니,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 뒤,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1515년쯤에 루터는 자신의 죄를 포함하여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같은 말이 그에게 극렬한 공포심을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라는 테마와 잘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공의가 아니라, 도리어 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얻으며 평강을 찾을 수 있도록,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자신이 마치 낙원에 들어간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성경의 모든 면이 루터에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루터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증오하였던 바로 그곳에서, 이제는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말씀을 가장 달콤한 말씀으로 찬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바울 속에 있던 이 말씀이 루터에게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입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루터에게 은혜는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은 사랑받고 있기에 놀라운 매력이 있는 것이지, 그들이 매력이 있어서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사랑 받을 만 하기 전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죄의 권세를 부수시고 정죄를 말끔히 없애버리시고, 나아가 평온과 양심과 마음의 평강을 허락하셨다는 놀라운 통찰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은 우리에게 보이신 자비로운 행위들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끼친 영향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일- 이를테면 그의 회심(回心)을 빈번하게 증언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만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2)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도 인상적인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1484년에 태어났고, 취리히 대 예배당에서 백성들의 제사장(Leutpriest)이라는 새 직무를 시작함으로, 자신의 35세 생일(11)을 자축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개혁프로그램을 설교하고, 취리히 시()안에서 정규 목회자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늦여름에 츠빙글리는 임박해오는 죽음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해 여름에 전염병이 취리히를 강타하자 츠빙글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문하며 위로하는 일에 온전히 매달렸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취리히 전체 인구의 3분의1 가량이 숨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8월께는 츠빙글리 자신도 큰 병을 얻었고, 소생의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한편의 시()를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심정을 드러내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오로지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고 철저히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츠빙글리는 회복되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섭리와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곡조와 함께 울려 퍼졌습니다. 은혜는 인간실존의 행로(行路)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인도하시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기꺼이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의 호의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로 그 은혜는 인간의 삶속에서 그 호의가 실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은혜는, 츠빙글리에게 하나님께서 역동성과 창조성이 넘치는 모습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인생들 속에 개입하심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은혜는 츠빙글리에게 하나님께서 역동성과 창조성이 넘치는 모습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인생들 속에 개입하심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3) 1509년에 태어난 칼빈(John Calvin)은 일찍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듯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놔용(Noyon)성당의 유력한 행정책임자였고, 칼빈은 그 지역교회의 유력한 후원자가문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1529년이 되자, 이런 가망성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칼빈의 아버지는 몇 가지 회계장부의 불일치사례가 드러나면서, 성당에서 신임을 잃게 됩니다. 그 무렵 칼빈은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칼빈은 법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기질을 갖추었지만, 당시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던 새로운 복음주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였고 공감합니다. 1533년 말과 1534년 초쯤에 칼빈은 훗날 스 스로 급작스러운 회심이라 표현했던 하나의 체험을 합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자신이 마치 자신만의 방식에 얽매인 채, 친숙하고 위안이 되는 옛 종교에 견고하게 참호를 파고 그의 몸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입증할만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 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에게 옛 종교와 습속(習俗)과 관계를 끊게 하셨고, 나아가 복음을 섬기는 길로 나가도록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칼빈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고 있었습니다. 은혜는 그런 방식으로 죄와 무지(無知)에 찌든 상황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죄의 수렁에서 구출해내며, 하나님에 맞섰던 자들을 길들여 그분께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울러 칼빈은 자신과 바울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칼빈은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출판물이 되었던 책- 15363월에 출판된 <기독교강요>-를 쓰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문제로 분주하였습니다. 15367월에 그는 스트라스부르(Starsbourg)로 가서 중요한 작업을 진척시켜 완성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에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으로 파리와 스트라스부르 사이의 통로가 막혀 남쪽 도시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제네바 개혁자 파렐(Guillaume Farel)를 만나 이 도시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라는 요청을 받고 제네바에 머물러 그곳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칼빈은 여러 번의 마음의 동요(動搖)와 추방(追放)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제네바에서 사역(事役)하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강력한 자각을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나의 소명을 스스로 화신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들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은혜는 실제인간의 삶-단지 일반적인 인간의 삶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그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제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민중들의 삶속에서 창조성 넘치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새 힘을 부여하며 삶을 바꾸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썼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그 은혜 씨앗이 자신의 삶속에서 현실로 나타났음을 동시에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민중을 위하여 베푸신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도 선용할 수 있는 통찰입니다. (알리스터 매그라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좋은 씨앗, 2005, 243-255 참조)

종교개혁5백주년을 맞으며 개혁자들의 모토 가운데 중요한 항목인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영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시도해 본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들

덴마아크의 철학자, 종교사상가 키에르케고오르(1813-1855)는 자유 하는 인간실존에 대하여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심미적 단계에서의 자유와 도덕적 단계에서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 단계에서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이 세 가지 자유를 다 소유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자유 하는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의식(自意識) 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몸을 씨앗삼아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용서의 자유로운 사람을 인간들에게 심어주고, 성령의 능력을 인간성 안에 보내서 인간이 그 은혜, 즉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새롭게 자유를 누리고 살게 되는 참다운 인간상을 창조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구원운동입니다.

인간 삶의 행. 불행 역시 세상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가치관, 세계관에 좌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 역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행과 운명을 믿는, 운명중심적인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히 농경시대와 봉건시대와 피압박민족시대는 더욱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학적으로 율법주의라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모든 것이 보상이요, 보수요,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합리적이요 지성적이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기쁨과 행복보다는 자기가 무엇을 좀 이루었다고, 무엇이 되었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또 절망합니다. 셋째는 은혜를 알고,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은혜 중심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수고를 하면서 그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선재적(先在的) 은혜를 믿습니다. 은혜가 먼저요, 은혜 안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 높고 힘차게 하늘을 날아 갑니다. 그러나 날기 위해서는 먼저 공기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은혜가 먼저입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먼저 있고, 은혜 안에 내 수고도 있습니다. 내 땀 흘림도 거기에 있고, 내 모든 노력도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은혜 안에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중심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믿음이라는 그릇에 담겨있습니다. 믿음이 있고야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그는 많은 수고와 희생 그리고 땀을 흘렸고, 평생 교회를 세우고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4. 하나님의 선물로서 은혜라는 이야기

본문은 가장 큰 은혜,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을 회상해 보니 우리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라고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는 길을 가다가 만취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를 비난 하겠어요? 혹은 그를 저주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와 내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타니엘 호오손의 <주홍글씨>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간음한 사람이라는 표시로 ‘A’(Adultery)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이 여자를 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재판장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재판할 것입니까? 본질상 다 진노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은혜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을 뿐이요, 사람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문 2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큰 구원의 사건, 구원의 역사- 그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그 사건이 나에게 관계되고, 내게서 현실화하고, 내게 생명이 되는 것, 또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아무리 많이 듣고, 아무리 많은 시간을 배웠어도 믿어지지 않는 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는 그 순간부터 은혜의 현실성이 이루어집니다.

은사(恩赦)’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가시적 효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모든 세계의 사건 하나 하나에서 많은 은사를 경험합니다. 은사는 가시적(可視的) 은혜(恩惠)입니다. 구체(具體)적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믿음 또한 은혜입니다. 믿어지는 것, 깨달아지는 것, 감격하는 것, 이 자체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선물(膳物)’이란 원래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라는 것은 그 속에 깊은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물질로만 받으면 뇌물입니다. 문제는 그 선물에 담겨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선물이 선물되는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좋습니다. 그 속에 마음을 담는 자세가, 그리고 그 마음을 받는 자세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물성(膳物性)’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자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는 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받을 때에만 선물이 선물될 수 있습니다. 선물의 의미를 모르면 그것은 뇌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 때에는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뜻을 모르고, 그 사랑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랑은 본래 어떤 보수나 보상이나 댓가가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빚은 갚을 수 있으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5. 은혜의 새 윤리를 희망하며

그리스도교는 인간구원을 제일차적인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인간구원이란 것은 사후(死後)천당(天堂)”이라는 개인영혼의 영존(永存)만을 의미함이 아닙니다. 나사렛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선교선언에서 이것이 명시되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이것은 인간이 몸과 마음으로 자유하게 하려는 인간해방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인간구원이란 몸의 질병, 생활의 가난, 체제의 포로, 무지의 암혹 등등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선교생활에서 병자를 고치고,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고, 죄를 용서하고, 타락자를 치켜 올리고, 사회에서 소외당한 세리 창기 등을 친구로 사귄 것은 모두가 인간존중 인간구원의 일환(一環)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을 최종적, 운명적으로 억압 말살하는 죄책과 죽음에서 인간을 자유케 하려는 속죄와 영생에의 염원(念願)이며 그 달성(達成)이었습니다.

인간을 마치 노예같이 다루는 현실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회복시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서의 본연의 긍지를 되찾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엄한 존재로 살며 일하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이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이해아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소명을 받아 역사의 한 가운데서 수난하는 한국교회의 창조적 소수자들의 소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안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은혜로 된 것이고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榮光)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깊이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가 내 노력인 것입니까? 설익은 사람들은 99%가 자기노력이고, 1%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100%가 다 은혜요, 내가 수고한 그것도 전부 은혜입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새로운 윤리가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은혜로 살고, 은혜를 전하며, 은혜를 증거하고, 은혜로 이웃 사람을 만나는 그때에, 진실로 은혜의 새 윤리의 시대가 전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선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고 생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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