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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正義)의 하나님선교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08-19 (토) 10:25 6년전 1777  

사랑과 정의(正義)의 하나님선교 누가복음 3: 3- 14

2017-08-27

시작하는 이야기

<Time>지가 2천 년대 표지에 지정한 인물은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존경하던 인물은 만유인력설을 발견해 아직도 캠부리지대학에 동상으로 서 있는 뉴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아인슈타인이 자기 방에까지 걸어놓은 존경하는 인물의 사진은 슈바이쳐와 간디로 바뀌었습니다.

슈바이쳐는 목사와 신학자요 의사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들의 몸과 정신을 돌보았습니다. 간디는 대영제국에 대항하여 비폭력으로 인도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전자가 병약자를 돕는 사랑의 자선(慈善)이라면, 후자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하는 정치적인 운동입니다. 사랑과 정의(正義), 개인구원과 전체적인 사회구원, 이를 모두 종합하였다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두 필수적인 요소를 바로 보여주는 선택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잔, 떡 한덩이를 주며, 약자를 돕고 사랑과 자선을 베푸는 박애정신을 상징하는 슈바이쳐입니다. 또 간디는 개인적인 사랑과 구원의 행동만이 아니라 피압박의 나라를 구원하려는, 정치적이며 공동체적인 집단의 애족(愛族) 애국적인 사회적 구원운동을 대표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과 정의, 약자를 돕는 것과 사회정의를 세우는 둘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사랑과 정의(正義)의 하나님선교에 대한 말씀입니다.

 

2.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의 이야기

미국은 매해 1월 셋째 월요일은 민권운동가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국경일로 지킵니다. 미국 대통령의 그 어느 생일도 단독으로 국경일이 되지 못했는데 흑인 킹 목사의 생일이 매해 미국 국경일 첫 번째로 정해진 것은 좀 이상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끈질긴 인종차별과 인권문제에 대한 승리를 내세우고 기리려는 미 국민의 의지(意志)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후퇴할 수 없고 다수(多數)종족(種族)으로 된 미합중국은 어떤 종족의 누구나 다 같은 권리를 보장하며 하나님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게 피조 된 인간임을 선언하고 따르겠다는 미국민의 이상(理想)이기도 합니다.

킹이 십대 소년시절 혹독한 차별에 실망하여 희망을 잃고 조지아의 산천을 방황하며 눈물을 닦았으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그에게 새 희망을 주었고, 간디의 비폭력운동은 그에게 새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앨라배마의 극심한 차별현장은 그로 하여금 점차 민권(民權)운동의 선봉장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쌍한 흑인에게 빵 한 조각을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색깔 하나로 차별하며 더 가난하고 천하게 취급하는 법과 제도에 맞서 싸워 인간의 권익을 되찾게 하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의 방법을 예수의 산상수훈과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찾았습니다.

1960년대 월래이스 앨라배마 주지사는 미국인종차별주의의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1963년 주지사 취임식에서 그는 지금도 인종차별, 내일도 인종차별, 영원히 인종차별’(Segregation Now, Segregation Tomorrow, Segregation Forever)을 선언했습니다. 흑인학생들이 앨라배마 주립대학에 입학하려 할 때 그는 출입을 막았으며, 킹 목사의 셀마에서 몬트고메리를 가로 놓은 에드먼드 페트스 다리(Edmund Pettus Br.)를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엄포했습니다. 행진 참여자들을 총살하겠다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6412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킹 목사는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그 다음해 196512일 민권시위의 셀마 앨라배마의 행진을 공고했습니다. 미 흑인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구하는 강력한 행진이었습니다. 그 길은 321일에서 25일까지 5일이나 걸리는 긴 거리요 엘라배마 군대의 총칼이 행진자들을 마구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무서운 행진이었습니다. 행진에 맞서 셀마가 있는 달라스 카운티의 경찰책임자 쉐리프 클라크는 시위하는 770명을 킹 목사와 함께 체포하여 투옥했고 계속 5백여 명의 시위자들을 투옥하기에 감옥도 모자라 저들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미국 미디어의 시선은 이곳에 쏠렸고 존슨 대통령이나 FBI 후버국장이나 많은 다른 지도자들도 킹 목사에게 시위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36일 흑인 민권과 투표권을 위해 주 수도 몬트고메리까지 행진할 것을 선포하고 8천여 명이 321일 셀마를 출발했습니다. 주 경찰의 구타와 각가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흙길과 돌밭에서 자면서 기필코 몬트고메리에 도착한 것입니다.

킹 목사의 우리 하나님은 계속 행진 한다’(Our God Is Marching On!)는 연설은 죽음의 페트스 강을 건너 먼 수도에 5일여의 고난의 행진을 통해 도착한 수도(首都)청사(廳舍)앞에서의 설교 문입니다. “죽은 자 외에 올 수 없다 했으나 우리는 여기에 도착했다. 나의 백성이여(My People), 얼마나 멀었던가? 얼마나? 그러나 멀지 않았다(How long? Not Long, because). 왜냐하면 거짓은 영원할 수 없고...정의는 승리하며 의로운 주의 영광이 나타남을 보기 때문이다.”이렇게 외치던 킹 목사도 3년 뒤 맴피스 테네시에서 백인 자객 레이(James Earl Ray)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은 끝나고 킹 목사의 꿈은 무산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의 선언과 같이 30주년 셀마 대행진 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전()앨라배마 주 지사였던 월래이스는 비록 훨체어에 몸을 실은 고통하는 늙은 몸이었으나 극적인 유턴(U-Turn)을 해 전혀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서부터 진정한 변화는 누구도 알 수 없으나 그의 언동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의 영원한 인종차별이란 선언은 취소되고, 대학입학을 반대하던 학생들의 하나인 멜론 존스(Vivian Malone Jones)를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킹 목사 자리를 대신한 남부 크리스천지도자협회(SCLC) 후계자 로웨이(Joseph Lowery)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는 이제야 흑인, 백인이나 황인들이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이는 듯 했습니다. 확실히 킹 목사가 꿈꾸며 싸우던 흑인차별의 철폐는 물론 인권운동이 점차 확대되며 그 혜택이 재미한인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소수종족들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완전한 성취는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평등이 법으로 보장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물 한잔, 빵 한 조각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권리와 빈익빈 부익부의 잘못된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싸우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생명을 내어놓을 만큼 위험합니다. 그러나 모세이후 바울, 루터와 킹 목사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정의 평화와 인간의 기본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 두 요소는 필수적이요, 그 어느 하나도 결코 뺄 수 없는 핵심적인 것입니다. 킹 목사의 국경일은 이를 증명하며, 최소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란 성서가 보여주고 가르친 이런 그리스도교 신앙의 그 어느 하나도 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혹 어떤 교인들은 소자에게 물 한잔, 떡 하나를 주는 구제나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전도, 선교에는 열성이나 정의(正義)문제에 대한 열정은 부족할 뿐 아니라,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경원하고 도외시하려 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 두 요소는 마차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기에 결코 그 어느 하나를 빼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이 두 요소가 다 구비되고 하나가 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복음증언과 세례요한의 회개선포 이야기

오순절 성령강림 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술렁이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친 설교요지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1)는 복음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 할꼬하소연 할 때,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 여러 말로 증거하며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2:37-40). 물론 이런 사도들의 담대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증언은 로마관원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이런 증언으로 소란할 것을 우려하여 로마 관원들은 의논하여 도무지 저들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경계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4:19)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확신이 초대교회가 로마제국과 유대교 핍박 속에서 살아가는 지침(指針)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계속적인 증언은 야고보를 순교케 하였고, 베드로는 투옥되기도 했으나 결코 중단되지 아니했습니다.

사도행전은 12장까지에서 사도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13장부터는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바울이 점점 더 담대하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로마와 이방세계에 전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사도행전이나 다른 바울서신을 점검할 때 그는 예수의 복음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로마정부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 또한 아주 신랄합니다. 초보적인 신앙은 우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착하고 봉사하며 자신과 가정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기쁘고 복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이것이 전부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적인 일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숙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갈수록 베드로와 열한 사도나 바울과 같이 그 증언의 강도는 점점 더 높습니다. 패역한세대에서 불의를 자행하거나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에 어긋날 때엔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관원과 군인 대장들에게까지 회개를 촉구하고 올바로 살기 위한 강력한 권면을 사양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탄생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다고 증언하던 세례요한의 삶과 증언은, 이런 그리스도교 신앙의 양면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의 본문은 세례요한의 삶과 관심이 하나님의 의()에 더 확고하며 그 상대는 누구든 부정과 불의 속에 있는 자들은 회개해야 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당시 세레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며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며 전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매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리라”(3:4-6).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질타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며 그들이 오만하여 아브라함이 우리조상이라 자부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기에 그런 선민의식으로 자부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으라. 그렇지 않으면 불모의 나무들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무리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요한은 로마의 관리 세리나 군인들, 부자니 지도자들을 가리지 아니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치부한 재산을 가난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세리는 정한 세외에는 부정으로 더 받아 착복하지 말 것이며, 군병들도 강포하지 말고, 무고한자들을 고소하며 탈취하지 말고, 받은 월급으로 족한 줄을 알라 했습니다. 심지어 분봉왕 헤롯이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강취한 일과 그가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책망한 일로 인하여 그는 요한을 감옥에 투옥시켰습니다. 마침내 그의 생일에 당시의 많은 로마와 유대의 초대된 고관대작 앞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딸에게 주며 그의 부정한 어머니에게 생일선물로 바치게 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사례라 하겠으나 이는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정의를 내세우는 예언자적인 하나님의 종의 운명이요, 신구약성서에 흐르는 신앙 속에 숨은 한 양상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 누구나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따르며, 그런 비극까지 당해야 함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의, 소자에게 물 한잔과 빵 한 조각을 주는 자선, 그러나 불의는 용납하지 아니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다운 사명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두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그 어느 하나만 전부인양 믿고 가르친다면 이는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다만 불쌍한 사람만 돕고, 불의한 로마관원이나 타락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규탄하거나 올바른 하나님 신앙을 위한 증언을 사양했다면 굳이 십자가 사형이 집행 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믿음이 좋고 열렬하며 세계제일의 교회를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정말로 빵 한 조각을 굶주린 자에게 주며 그들을 구제, 선교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요, 나라와 사회의 불의나 타락, 불법이 창궐하는 땅에서 사회정의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무관한 듯 주장하며 마치 태평성대를 만끽한 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통탄하며 눈물 짓던 당대의 역사보다 더한 한국교회 현실이 아닐까요?

도대체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인 정의와 사랑의 두 요소를 잘 알고 그 어느 하나의 결여도 없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에 이르기 전() 유대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과 성서학자들인 서기관들에게 호되고 무섭도록 질타하신 말씀이 절로 떠오르며 전율스럽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언제나 사랑스럽고 자비하시던 예수님의 말 같지 않을 정도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들에게 물 한잔, 빵 한 조각 준 것도 기억되리라던 예수님, 가련하고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자식을 잃고 슬피 울던 과부의 자식을 긍휼히 여기고 눈물 지으며 살려주던 예수님, 약한 자들에게 한없이 약하고 원수까지라도 용서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은 자비로 사랑하라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외식과 불의,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어기고 타락하고 오만하던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혹독한 질타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외식을 버리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의와 정의에 부합하는 새로운 변화 없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심판적인 질타였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의 전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운 정의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가 선명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한 역사적 사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얼마나 준엄한가를 보여주는 너무나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양면, 사랑과 정의에 깨달음이 필수적입니다. 그 어느 하나라도 빼고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사랑과 정의는 세상의 구원 위한 하나님 뜻의 양면성

언급한대로 2천 년대의 인물로 <Time>지가 선정한 아인슈타인이 그의 말년 존경하는 두 사람으로 사랑의 사도 슈바이쳐와 정의 사도 간디를 내세운 것은 자랑스럽고 지당한 일이었습니다. 멀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정치지도자 모세를 히브리-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대선배로 받들며, 예수님 당시의 베드로나 세례요한, 현대세계가 사랑의 수녀 테레사, 정의의 운동가 킹 목사 등을 이 시대의 인물로 추앙하는 것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수적인 두 요소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과 자선이나 한 영혼의 구령을 그리스도교 선교의 전부인양 내세우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랑만이 아니라 정의가, 물 한잔 떡 한 조각만이 아닌 대량으로 목마르고 굶주린자를 양산하는 사회제도를 개혁하도록 선도하고, 구제와 함께 사회정의를 구현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적 과제입니다. 자비와 의, 사랑과 사회정의, 이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의 양면성이요, 예수가 세상에 온 목적이며, 그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인간인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에 대해 물을 때 그 대답은 자명합니다. 슈바이쳐나 테레사 수녀같이 병약자를 돕는 사랑의 봉사와, 간디나 킹 목사와 같이 피압박 백성의 해방이나 차별하는 사회에서 평등과 정의구현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슈바이쳐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슈바이쳐가 아프리카 병원에서 치유의 봉사를 할 때 그는 병자를 돌보는 일만한 것이 아니라, 병원 잡무나 장부정리까지 했습니다. 병원을 방문하는 외국기자들에게 이런 슈바이쳐가 의아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에 환자라도 더 보지 않고...그러나 그는 이런 잡무도 치유를 하는 소중한 업무만큼 중요하다 했습니다. 어느 날 병원의 창고를 손수 짓고 있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무거운 석가래를 들어 올려야하나 혼자의 힘으론 부족했습니다. 마침 방문한 아프리카의 한 흑인에게 도움을 청하자 넥타이를 메고 정장한 그는 나는 지식인입니다하며 거절 했습니다. 슈바이쳐는 웃으며 나도 공부는 좀 한 사람이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요.’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돕기 위해 잡일 같이 보이는 일도 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중에 더 불쌍한 사람들을 간호하던 테레사 수녀의 봉사는 다 인류를 사랑한 봉사입니다.

동시에 강국에 억압을 받고 신음하는 동족의 해방을 위하여 비폭력과 비협조 등의 평화적 방법으로 투쟁하던 간디나 킹 목사의 민권운동은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세우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한 중요한 방법입니다. 소자에게 빵 하나 주는 사랑이 필요하되 만든 빵을 힘센 자들이 독점하지 않고 고루 나누어 먹도록 하는 공평한 분배와 정의가 또한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인권과 사회정의가 확립되고 모든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제도적 보장이 없다면 가진 자와 없는 자, 힘센 자나 약한 자,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들이 다같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5. 하나님 선교와 우리교회의 선교적 정체성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교회의 선교는 변화하는 역사의 흐름에 새롭게 대응해야 합니다.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성레전 중심, 교권중심, 성직자 중심의 교회라고 특징 지울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교회에서는 성례전 보다는 말씀중심의 신학, 특히 설교가 목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특징은 설교중심, 목회중심, 회중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교회와 신학은 급변하여 에큐메니칼시대, 교회혁신의 시대, 2의 종교개혁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한 변화는 계속하고 있으며,’하나님-세계-교회의 상호관계를 신학적으로 재정리하게 되었고,’하나님의 선교신학이 출현하였습니다. 하나님 선교에서 새로운 발견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인 이해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재발견과 하나님-세계-교회의 관계정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인간이 발딛고 살고 있는 곳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독생자까지 주신 선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구원받을 세계의 한 표징일 때에만 참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세계구원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선교에 동참하는 동역자(Partner)인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며 봉사하는 소금의 역할과, 세상역사에 개입하여 변화시켜나가는 의 역할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보살피는 일, 훈련하고 조직해서 하나님의 해방의 일꾼으로 만들어가는 일, 또 교회자체가 하나님나라의 산 표징의 하나로 항상 자기 갱신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교회의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 교단교회는 하나님선교의 헌신적인 실천을 해오고 있으며, 7-80년대에 새로운 선교신학의 정리, 자기개혁을 하면서, 한국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그리고 통일운동에 성실히 참여 인도하여 왔습니다. 1995년 한반도 통일희년을 내다보면서 선교 2세기를 열어가기 위한 우리의 고백과 선교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교회일치운동에 헌신적 봉사와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대항해서 예언자적 실천에 앞장서 왔습니다.

특별히 우리교단은 출발부터 하나님의 선교를 바탕으로 하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해오고 있습니다. 우리교단의 5가지 기본정신을 음미해 보겠습니다. 1)우리교단은 자유의 전승에 똑바로 섭니다(5:1). 신앙양심의 자유와 진리탐구의 자유와 항상 개혁해가는 개혁교회의 자유전통을 지켜갑니다. 2)우리교단은 예언자적 해방 전승에 똑 바로 섭니다(4:18).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표출된 정의, 사랑,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이라는 포괄적인 하나님의 약속인 샬롬의 실천에 헌신적으로 동참합니다. 3)우리교단은 자주와 자립의 전승에 똑바로 섭니다.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을 통한 우리 민족의 평화공동체에 진력하며, 세계각국교회들의 다양한 문화전통과 협력하면서 우리자신의 문화전통을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복음의 입장에서 발현시키며, 신학과 선교와 봉사, 교회운영의 모든 측면에서 자주와 독립을 통한 주체적 역할을 해나가려 합니다. 4)우리교단은 자주와 자립을 지향하고, 민족적 교파적 지역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에큐메니칼 연대성으로 승화시켜 갑니다. 세계교회들의 일치와 사랑의 연대를 위해 전향적인 노력과 헌신을 다하려 합니다. 5)우리교단은 항상 개혁하는개혁교회의 전승에 충실하려 합니다. 일체의 명예와 권력욕, 물질욕, 지배욕을 벗고 봉사와 헌신으로 거듭나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2)을 지니려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교의 성실한 도구로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6)끝내면서; 인류역사상 오늘 시대만큼 인간의 생명이 죽음의 위험을 당하는 시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로 인한 공동체의 내적와해와 사회범죄의 증가, 민족과 종파간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과 테러, 지구전체를 여러 번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의 위협, 자연 생태계의 파괴와 지구온난화로 인한 모든 생물의 총체적 죽음의 위험은 이 시대의 위기상황을 반영합니다.

이와 같은 시대상황을 직면하여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생명의 영으로 파악합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랑의 영입니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땅위의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파멸시키고자하는 죽음의 세력에 대항해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과 불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있는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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