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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신실한 종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09-17 (일) 17:28 6년전 2074  

착하고 신실한 삶 마태복음 25:14-30

2017-09-17

성서본문 이야기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가 십자가 길을 떠나기 전 하늘나라의 비유로 가르친 달란트 비유(25:14-30)가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할 큰 교훈입니다.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그의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 이야기입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 한 달란트씩 주고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하여 다섯, 두 달란트를 남겼으나 하나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한 달란트 돈을 숨겼습니다. 한 달란트는 대략 5000 데나리온에 해당되며, 이는 한 시골 일꾼의 15년간의 임금보다 많은 액수입니다. 연 수입 1만 불로만 쳐도 15만불 이상이나 되는 돈이기에 상당한 액수입니다. 오랜 뒤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셈하게 될 때, 배로 이윤을 남긴 그들은 다 같이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15만 불 이상의 돈을 맡은 그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보고 무서워 땅에 묻었다가 그 돈을 그냥 내놓자 그에게는 아주 무서운 철통같은 징벌이 떨어졌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그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 이자라도 가져와야 하지 않느냐며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신실한 자에게 주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만약 이를 재물로만 본다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의 횡포를 정당화하고 가난한 자를 더 비참하게 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이치를 합법화하는 발언 같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의가 물질이 아니고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생의 자세(life style)나 신앙인이 저들에게 주어진 재질이나 직임들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가 하는 것이기에 바른 해석을 요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재질이나 조건, 얼마나 크고 작은 직책이나 책임을 맡게 되더라도 얼마나 충실하게 그 소임을 다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소흘히 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살 때 그 결과는 참으로 무서울 만큼 징벌의 대상이 되고 더욱이 그런 생의 자세는 한 사람의 일생을 불우하게 끝낸다는 것입니다.

 

2.한 달란트 받은 자는 위임받은 삶을 불충한 것으로 큰 책임을 평가받는다는 이야기

문제는 한 달란트 위임 받은 자가 그의 삶을 최선을 다하여 살지 못하고 땅에 숨겨 묻어드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게으르고 불충한 자세는 그 주어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쓸모없는 종으로 심판되어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기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불행하고 안타까운 생의 자세입니다. 그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보고 무서워 그랬다는 것을 보면 사물을 보는 자세나 생각자체가 부정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셋째 사람은 주인이 자기를 믿고 오늘의 15만 불도 넘는 돈을 주고 맡겼으나, 오히려 주인을 의심하고 잘못했다가는 주인에게 꾸지람을 받을까 염려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주어진 달란트나 재질, 직임과 그의 생을 과감하고 활달하게 펼쳐보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좋은 가문이나 여건도 되지 못하고 신분이나 교육의 부족에도 주인은 그를 믿고 큰 책임을 주었으나 주인은 무섭고 엄한 사람으로 잘못 알아 기회가 주어졌으나 써보지도 못하고 상실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도 두렵고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모험도 잘못도 못해 보았습니다(no risk, no fault). 신중한 것이 덕이 될 수도 있으나 주어진 기회나 재질, 선물 등 귀한 책임을 시도해 보지도 못한 채 상실하는 것은 올바른 생의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 표현으로 그는 그의 달란트를 사용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능력과 기회 같은 달란트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탁된 재질이나 생은 자신을 믿고 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한 번 멋있게 살아보는 시도가 있어야 합니다.

포드자동차회사의 창설자인 헨리 포드는 할 수 없다고 잘못알고 있는 전문가들보다는 무한한 능력을 믿는 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생각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의 사람들입니다. 사실 달란트를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달란트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기회를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이를 사용하여 더 유익한 일들을 하고 값지게 만들라는 위탁입니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주어진 달란트를 시도해 보지도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달란트나 자질, 직임과 책임 등은 다 상실하고 맙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루벤스타인(Arthur Rubenstein)은 피아노 연습을 어찌 그리 매일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내가 하루를 연습안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내가 연습하지 않으면 비평가들이 알며, 3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모든 청중이 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이런 확신으로 매일을 열심히 피아노연습을 하듯, 실은 어떤 분야의 그 누 구든 그와 같은 확신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런 끝없는 연습과 실행이 없으면 그 명성은 물론 그의 피아노 연주 역시 오래가지 못해 쇠퇴하고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비전도 없고 주어진 재능이나 기회도 다 망가져 버리고 맙니다. 이 달란트는 물질이나 재질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직임과 지위, 시간과 보화 등 그의 생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어진 선물들을 최선으로 살지 않는 그들은 그것들을 다 사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불충한자가 주인에게 무서운 징벌을 받듯 참으로 불행하고 부끄러운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는 이야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의 벌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지각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러한 상태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든 세상일이든 아니 자신의 일과 자신의 생이든 하루 속히 그런 불충하고 게으르며 핀잔의 자리에서 돌이켜 일어서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삶의 자세를 잠자는 자와 죽은 자로 비유하며 속히 일어나라고 격려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5:14-15).

바울은 이런 권면 끝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5:16-17)고 덧붙였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받았으나 그 가치를 모르기에 사장하고 무의미하게 삽니다. 아니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재능이나 직임의 선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다 쓸모없게 소진합니다. 그러나 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려는 자는 그런 어리석음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와 다름이 없기에 그런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악하기에 세월을 더 아껴야 합니다. 악한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주어진 생명과 시간을 다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건국의 한 지혜로운 조상 벤자민 프랭클린(B. Franklin)이 그토록 강조하듯 만일 네가 네 인생을 사랑한다면 네 시간을 사랑하라. 시간은 인생의 가장 귀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살았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요 죽었다는 것은 시간이 없어진 것을 뜻합니다. 시간은 곧 생명이요, 생명은 시간입니다. 시간은 생명의 주된 구성요소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은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아무렇게나 쓰는 것은 생명을 낭비하며 아무렇게나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간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요 자기의 시간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시간과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시간과 생명도 사랑하며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시간이나 생명, 자기에게 주어진 직임이나 책임, 그 어떤 보화든 이토록 사랑하고 아끼며 소중하게 여기면서 산다면 그는 더 이상 한 달란트의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나 직임 등 그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내게 주어지는 임무나 책임, 위임되는 달란트의 직임이 중요하고 클수록 그 성취나 완성은 쉽지 않고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 직임이나 소명이 별것이 아닌 경우는 특별히 어려울 것도 힘들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그 임무와 책임이 중하기에 더 힘들고 당할 시련을 극복할 용기와 인내,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동양의 현자요 철인이던 맹자(孟子)(372-289 BC)<사서삼경(四書三經)>에서, 하늘이 큰 임무를 줄 때엔 먼저 정신적.육체적인 시련을 주고 인내성을 키우며 이 모든 것을 이길 능력을 준 다음 그 임무를 성공케 한다고 했습니다. <맹자> 고자편에 나오는 고전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고로 하늘이 이들에게 큰 임무를 내리고자 하면 우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괴롭히고 그들의 살과 뼈를 수고롭게 만들고 몸을 굶주림에 시달리고, 몸에 걸칠 옷도 없게 한다. 이는 하늘이 그들에게 시련을 주어 마음을 분발시키고 인내성을 키워서 그들이 하지 못하던 경지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켜 주겠다는 하늘의 배려에서 한 것이다.”

동양의 성현들도 벌써 여러 천 년 전에 이런 생의 이치를 깨닫고 전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생의 진리는 동서의 구별이 없음을 증명해 주는 명언입니다. 세계적인 일본의 성현 우찌무라 도 그의 아버지에게 배운 이 말씀이 이러한 시련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어찌 우찌무라 부자뿐이겠습니까? 어려운 세월, 열악한 생의 조건에서 나마 위임받은 그 누구나 그 큰 뜻을 초지일관하게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 이러한 시련과 인내가 따름을 다시 일깨우는 동양의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4. 착하고 신실한 종들의 삶 이야기

모르건 목사(Rev. Campell Morgan)는 그의 은퇴식에서 평생 목회하며 설교하던 경험을 회고하며 설교하기 가장 힘든 회중은 잘 듣는 것 같지만 그들의 신앙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는 회중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형식적인 교인, 설교가 좋고 감동적이었다고 고백하지만 마치 매너리즘에 빠진 자들과 같이 아무런 변화의 움직임이 없는 목석같은 교인,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실은 또 한 번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타성적인 설교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자세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강단의 말씀을 듣든지 글로 된 훌륭한 신앙의 증언을 읽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될 때는 온 마음과 심혼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회개하고 변하며 새롭게 돼야합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 듯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또 하나의 지식의 습득이나 저축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아는 지식만으로는 생기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의사로서 아프리카의 첫 선교사가 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73)의 생은 늘 새로운 감동을 줍니다. 그가 어린 시절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교회에서 아프리카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할 때입니다. 헌금 쟁반이 자기 앞에 돌아오자 한 소년이 그 쟁반을 깔고 앉았습니다. 교인들은 어리둥절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바칠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아프리카를 위해 몽땅 바치겠습니다.” 바로 이 소년이 훗날 그 약속대로 아프리카의 첫 의사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며 선교하던 리빙스턴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생을 신실한 의사선교사로 봉사했을 뿐 아니라, 그의 말년의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진실하며 착한 하나님의 종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1873년 리빙스턴이 60세로 병들어 쇠약하던 때입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실종이 되어 소식이 끊겼을 때 스탠리(Henry Stanley)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탐험대가 여러 곳을 헤매다 마침 한 시골 마을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했습니다.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 오지에서 토인들과 생활하며 문등병자와 다른 병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병들고 쇠약해진 그의 건강은 염려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스탠리는 영국으로 귀국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아프리카에 머물겠다고 했으며 바로 그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873319, 그의 생일에 쓴 마지막 일기는 그가 어떤 자세로 일생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나의 예수여 나의 왕이여 다시 나를 바칩니다. 자비하신 나의 아버지 나를 받아 주소서. 독생자를 나에게 주셨는데 이 못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체를 다 바칩니다. 받아 사용하여 주소서. 아멘 주님 아멘.” 그의 시체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묘비는 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사람에게는 조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살았고 응답하다 죽었습니다. 스코트랜드 에딘버라 공원광장에는 민족의 영웅의 한 사람으로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에 그곳을 찾는 순례 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5. 착하고 신실한 종은 청지기직(Stewardship)이라는 이야기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착하고 신실한 종이란 그들이 달란트와 같은 재질을 얼마나 받고 맡은 직임이 얼마나 높고 귀한 것인가, 혹은 얼마나 많이 남기고 가졌는가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며 얼마만한 업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도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실은 다섯이나 둘, 한 달란트를 능력에 따라 주었듯이 우리의 재질, 직임, 그 어떤 선물도 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탁하여 맡긴 것입니다. 청지기직(Stewardship)인 것입니다. 이를 사는 동안 얼마나 충실하게 관리하며 잘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게 준 달란트, 재능과 직임, 소명과 책임 등을 얼마나 현명하게 잘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 달란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고 맡긴 것이기에,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그 어떤 보화든 그것들을 내가 사는 동안 얼마나 지혜롭게 잘 관리하고 사용하며 이웃과 세상을 위해 선용했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느 시대보다도 반그리스도교적이요, 온통 배신과 변절, 이기적인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명자체가 온통 죽이는 문화요, 세계 어디를 가나 평안하고 조용한 곳은 없을 정도입니다. 긴장과 위협이 그치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가 뒤쫓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 지구촌에 범람해가고, 핵무기 경쟁 위협이 특히 동북아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삶은 갑과 을의 긴장으로 각박하고 불공평하며 응급한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요 지상의 성전이라는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응급하고 냉랭한 찬기는 교회에도 넘치고, 끝없는 변절과 배신은 교회라고 세상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세상 풍조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룬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교회에서도 그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시기에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명을 깨달은 적은 창조적 무리들은 힘을 모아 우리에게 부탁한 하나님나라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한 개인의 신실함만이 아니라 날로 조직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온 교회 성도들이 다 함께 각성하여 신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91)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출발하여 오대양 육대주에 주의 복음운동을 전개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But what can I do for kingdom?)를 물으며 대답한 말은 착하고 신실하게 살기 원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아직도 생생한 귀감이 됩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Do all the good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By all the mean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도로(In all the way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In all the place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때에(At all the time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To all the people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그날까지(As long as ever you can),”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준 나의 달란트, 시간, 보화를 가장 현명하게 사용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 교회는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써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교회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런 참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요, 그 생명을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라(10:10)했습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아 어느 날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 칭송을 듣는다면 이보다 더한 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신앙으로 산다는 그들이 이런 생명을 갖고 풍성한 생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이런 신앙을 미처 가지지 못한 그 누구라도 이제부터 신앙은 그 생을 살 가치를 있게 만든다’(Faith makes life worth living)는 진리를 터득하고 이런 신앙을 가지는 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6. 그리스도께 전적인 헌신을 한 제자들 이야기

예수는 진정 생명의 주입니까? 정말 예수가 우리의 구주시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은 있을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 몇 사람 되지 않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우수해서였습니까? 그런 징표는 없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까? 그 당시 그들은 사회 하층의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우수한 전략가였습니까? 대부분 갈릴리 어부나 농부, 단순한 부녀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이 세계에 그런 큰 영향을 끼쳤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totally dedicated to Christ). 만약 예수가 진실로 우리의 구주라면 이 세계에서 우리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전적인 의뢰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commitment)은 우리 생의 다른 분야에서도 우수한 영웅으로 만듭니다.

초대교회 예수의 첫 제자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수의 남녀들이 모든 종족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도록 위탁 받았습니다.그들은 2천 년 전에 다 죽었으나 그들의 영향은 아직도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와 닿고 감명을 줍니다. 우리의 생과 오늘 우리의 교회들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사명을 전해 줍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안드레라는 제자인데, 그리 유명하거나 뛰어나지도 않고 경전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에게서 배워야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성서가 안드레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가 누군가를 예수께 안내하고 소개합니다. 첫째 그는 그의 형제 시몬을 주께 데려 왔습니다. 다음은 그의 점심으로 수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게 되는 한 젊은이를 주께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 일단의 희랍인들을 예수께 인도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안드레 같은 주의 제자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부부나 형제, 친구나 이웃들을 주께 인도하며,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주의 교회는 더 많은 형제자매들이 모여 하나님나라와 그 선교를 위해 더 힘 있게 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마감하며: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세 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인생론이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첫째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언제인가를 묻습니다. 그 시간은 물론 현재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불확실한 미래도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군가 묻습니다. 이는 옛날 알던 사람도 앞으로 만날 사람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매일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디서 귀인이 나타나고 어떤 귀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내 옆의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묻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어떤 선을 베풀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요 자신의 행복이며 여기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내가 (yes)”하고 가서 행할 일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내 형제자매들이 가장 귀중함을 알고 그들과 같이 기쁘고 즐겁도록 사는 것이 성도된 도리요, 자신의 행복도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생을 살며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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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신실한 삶 마태복음 25:14-30

2017-09-17

성서본문 이야기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가 십자가 길을 떠나기 전 하늘나라의 비유로 가르친 달란트 비유(25:14-30)가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할 큰 교훈입니다.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그의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 이야기입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 한 달란트씩 주고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하여 다섯, 두 달란트를 남겼으나 하나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한 달란트 돈을 숨겼습니다. 한 달란트는 대략 5000 데나리온에 해당되며, 이는 한 시골 일꾼의 15년간의 임금보다 많은 액수입니다. 연 수입 1만 불로만 쳐도 15만불 이상이나 되는 돈이기에 상당한 액수입니다. 오랜 뒤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셈하게 될 때, 배로 이윤을 남긴 그들은 다 같이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15만 불 이상의 돈을 맡은 그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보고 무서워 땅에 묻었다가 그 돈을 그냥 내놓자 그에게는 아주 무서운 철통같은 징벌이 떨어졌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그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 이자라도 가져와야 하지 않느냐며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신실한 자에게 주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만약 이를 재물로만 본다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의 횡포를 정당화하고 가난한 자를 더 비참하게 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이치를 합법화하는 발언 같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의가 물질이 아니고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생의 자세(life style)나 신앙인이 저들에게 주어진 재질이나 직임들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가 하는 것이기에 바른 해석을 요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재질이나 조건, 얼마나 크고 작은 직책이나 책임을 맡게 되더라도 얼마나 충실하게 그 소임을 다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소흘히 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살 때 그 결과는 참으로 무서울 만큼 징벌의 대상이 되고 더욱이 그런 생의 자세는 한 사람의 일생을 불우하게 끝낸다는 것입니다.

 

2.한 달란트 받은 자는 위임받은 삶을 불충한 것으로 큰 책임을 평가받는다는 이야기

문제는 한 달란트 위임 받은 자가 그의 삶을 최선을 다하여 살지 못하고 땅에 숨겨 묻어드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게으르고 불충한 자세는 그 주어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쓸모없는 종으로 심판되어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기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불행하고 안타까운 생의 자세입니다. 그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보고 무서워 그랬다는 것을 보면 사물을 보는 자세나 생각자체가 부정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셋째 사람은 주인이 자기를 믿고 오늘의 15만 불도 넘는 돈을 주고 맡겼으나, 오히려 주인을 의심하고 잘못했다가는 주인에게 꾸지람을 받을까 염려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주어진 달란트나 재질, 직임과 그의 생을 과감하고 활달하게 펼쳐보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좋은 가문이나 여건도 되지 못하고 신분이나 교육의 부족에도 주인은 그를 믿고 큰 책임을 주었으나 주인은 무섭고 엄한 사람으로 잘못 알아 기회가 주어졌으나 써보지도 못하고 상실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도 두렵고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모험도 잘못도 못해 보았습니다(no risk, no fault). 신중한 것이 덕이 될 수도 있으나 주어진 기회나 재질, 선물 등 귀한 책임을 시도해 보지도 못한 채 상실하는 것은 올바른 생의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 표현으로 그는 그의 달란트를 사용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능력과 기회 같은 달란트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탁된 재질이나 생은 자신을 믿고 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한 번 멋있게 살아보는 시도가 있어야 합니다.

포드자동차회사의 창설자인 헨리 포드는 할 수 없다고 잘못알고 있는 전문가들보다는 무한한 능력을 믿는 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생각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의 사람들입니다. 사실 달란트를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달란트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기회를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이를 사용하여 더 유익한 일들을 하고 값지게 만들라는 위탁입니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주어진 달란트를 시도해 보지도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달란트나 자질, 직임과 책임 등은 다 상실하고 맙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루벤스타인(Arthur Rubenstein)은 피아노 연습을 어찌 그리 매일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내가 하루를 연습안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내가 연습하지 않으면 비평가들이 알며, 3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모든 청중이 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이런 확신으로 매일을 열심히 피아노연습을 하듯, 실은 어떤 분야의 그 누 구든 그와 같은 확신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런 끝없는 연습과 실행이 없으면 그 명성은 물론 그의 피아노 연주 역시 오래가지 못해 쇠퇴하고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비전도 없고 주어진 재능이나 기회도 다 망가져 버리고 맙니다. 이 달란트는 물질이나 재질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직임과 지위, 시간과 보화 등 그의 생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어진 선물들을 최선으로 살지 않는 그들은 그것들을 다 사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불충한자가 주인에게 무서운 징벌을 받듯 참으로 불행하고 부끄러운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는 이야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의 벌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지각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러한 상태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든 세상일이든 아니 자신의 일과 자신의 생이든 하루 속히 그런 불충하고 게으르며 핀잔의 자리에서 돌이켜 일어서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삶의 자세를 잠자는 자와 죽은 자로 비유하며 속히 일어나라고 격려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5:14-15).

바울은 이런 권면 끝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5:16-17)고 덧붙였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받았으나 그 가치를 모르기에 사장하고 무의미하게 삽니다. 아니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재능이나 직임의 선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다 쓸모없게 소진합니다. 그러나 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려는 자는 그런 어리석음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와 다름이 없기에 그런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악하기에 세월을 더 아껴야 합니다. 악한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주어진 생명과 시간을 다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건국의 한 지혜로운 조상 벤자민 프랭클린(B. Franklin)이 그토록 강조하듯 만일 네가 네 인생을 사랑한다면 네 시간을 사랑하라. 시간은 인생의 가장 귀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살았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요 죽었다는 것은 시간이 없어진 것을 뜻합니다. 시간은 곧 생명이요, 생명은 시간입니다. 시간은 생명의 주된 구성요소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은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아무렇게나 쓰는 것은 생명을 낭비하며 아무렇게나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간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요 자기의 시간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시간과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시간과 생명도 사랑하며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시간이나 생명, 자기에게 주어진 직임이나 책임, 그 어떤 보화든 이토록 사랑하고 아끼며 소중하게 여기면서 산다면 그는 더 이상 한 달란트의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나 직임 등 그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내게 주어지는 임무나 책임, 위임되는 달란트의 직임이 중요하고 클수록 그 성취나 완성은 쉽지 않고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 직임이나 소명이 별것이 아닌 경우는 특별히 어려울 것도 힘들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그 임무와 책임이 중하기에 더 힘들고 당할 시련을 극복할 용기와 인내,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동양의 현자요 철인이던 맹자(孟子)(372-289 BC)<사서삼경(四書三經)>에서, 하늘이 큰 임무를 줄 때엔 먼저 정신적.육체적인 시련을 주고 인내성을 키우며 이 모든 것을 이길 능력을 준 다음 그 임무를 성공케 한다고 했습니다. <맹자> 고자편에 나오는 고전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고로 하늘이 이들에게 큰 임무를 내리고자 하면 우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괴롭히고 그들의 살과 뼈를 수고롭게 만들고 몸을 굶주림에 시달리고, 몸에 걸칠 옷도 없게 한다. 이는 하늘이 그들에게 시련을 주어 마음을 분발시키고 인내성을 키워서 그들이 하지 못하던 경지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켜 주겠다는 하늘의 배려에서 한 것이다.”

동양의 성현들도 벌써 여러 천 년 전에 이런 생의 이치를 깨닫고 전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생의 진리는 동서의 구별이 없음을 증명해 주는 명언입니다. 세계적인 일본의 성현 우찌무라 도 그의 아버지에게 배운 이 말씀이 이러한 시련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어찌 우찌무라 부자뿐이겠습니까? 어려운 세월, 열악한 생의 조건에서 나마 위임받은 그 누구나 그 큰 뜻을 초지일관하게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 이러한 시련과 인내가 따름을 다시 일깨우는 동양의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4. 착하고 신실한 종들의 삶 이야기

모르건 목사(Rev. Campell Morgan)는 그의 은퇴식에서 평생 목회하며 설교하던 경험을 회고하며 설교하기 가장 힘든 회중은 잘 듣는 것 같지만 그들의 신앙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는 회중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형식적인 교인, 설교가 좋고 감동적이었다고 고백하지만 마치 매너리즘에 빠진 자들과 같이 아무런 변화의 움직임이 없는 목석같은 교인,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실은 또 한 번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타성적인 설교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자세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강단의 말씀을 듣든지 글로 된 훌륭한 신앙의 증언을 읽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될 때는 온 마음과 심혼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회개하고 변하며 새롭게 돼야합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 듯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또 하나의 지식의 습득이나 저축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아는 지식만으로는 생기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의사로서 아프리카의 첫 선교사가 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73)의 생은 늘 새로운 감동을 줍니다. 그가 어린 시절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교회에서 아프리카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할 때입니다. 헌금 쟁반이 자기 앞에 돌아오자 한 소년이 그 쟁반을 깔고 앉았습니다. 교인들은 어리둥절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바칠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아프리카를 위해 몽땅 바치겠습니다.” 바로 이 소년이 훗날 그 약속대로 아프리카의 첫 의사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며 선교하던 리빙스턴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생을 신실한 의사선교사로 봉사했을 뿐 아니라, 그의 말년의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진실하며 착한 하나님의 종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1873년 리빙스턴이 60세로 병들어 쇠약하던 때입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실종이 되어 소식이 끊겼을 때 스탠리(Henry Stanley)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탐험대가 여러 곳을 헤매다 마침 한 시골 마을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했습니다.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 오지에서 토인들과 생활하며 문등병자와 다른 병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병들고 쇠약해진 그의 건강은 염려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스탠리는 영국으로 귀국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아프리카에 머물겠다고 했으며 바로 그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873319, 그의 생일에 쓴 마지막 일기는 그가 어떤 자세로 일생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나의 예수여 나의 왕이여 다시 나를 바칩니다. 자비하신 나의 아버지 나를 받아 주소서. 독생자를 나에게 주셨는데 이 못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체를 다 바칩니다. 받아 사용하여 주소서. 아멘 주님 아멘.” 그의 시체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묘비는 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사람에게는 조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살았고 응답하다 죽었습니다. 스코트랜드 에딘버라 공원광장에는 민족의 영웅의 한 사람으로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에 그곳을 찾는 순례 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5. 착하고 신실한 종은 청지기직(Stewardship)이라는 이야기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착하고 신실한 종이란 그들이 달란트와 같은 재질을 얼마나 받고 맡은 직임이 얼마나 높고 귀한 것인가, 혹은 얼마나 많이 남기고 가졌는가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며 얼마만한 업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도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실은 다섯이나 둘, 한 달란트를 능력에 따라 주었듯이 우리의 재질, 직임, 그 어떤 선물도 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탁하여 맡긴 것입니다. 청지기직(Stewardship)인 것입니다. 이를 사는 동안 얼마나 충실하게 관리하며 잘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게 준 달란트, 재능과 직임, 소명과 책임 등을 얼마나 현명하게 잘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 달란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고 맡긴 것이기에,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그 어떤 보화든 그것들을 내가 사는 동안 얼마나 지혜롭게 잘 관리하고 사용하며 이웃과 세상을 위해 선용했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느 시대보다도 반그리스도교적이요, 온통 배신과 변절, 이기적인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명자체가 온통 죽이는 문화요, 세계 어디를 가나 평안하고 조용한 곳은 없을 정도입니다. 긴장과 위협이 그치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가 뒤쫓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 지구촌에 범람해가고, 핵무기 경쟁 위협이 특히 동북아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삶은 갑과 을의 긴장으로 각박하고 불공평하며 응급한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요 지상의 성전이라는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응급하고 냉랭한 찬기는 교회에도 넘치고, 끝없는 변절과 배신은 교회라고 세상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세상 풍조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룬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교회에서도 그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시기에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명을 깨달은 적은 창조적 무리들은 힘을 모아 우리에게 부탁한 하나님나라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한 개인의 신실함만이 아니라 날로 조직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온 교회 성도들이 다 함께 각성하여 신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91)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출발하여 오대양 육대주에 주의 복음운동을 전개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But what can I do for kingdom?)를 물으며 대답한 말은 착하고 신실하게 살기 원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아직도 생생한 귀감이 됩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Do all the good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By all the mean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도로(In all the way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In all the place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때에(At all the times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To all the people you can). 그대가 할 수 있는 그날까지(As long as ever you can),”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준 나의 달란트, 시간, 보화를 가장 현명하게 사용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 교회는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써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교회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런 참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요, 그 생명을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라(10:10)했습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아 어느 날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 칭송을 듣는다면 이보다 더한 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신앙으로 산다는 그들이 이런 생명을 갖고 풍성한 생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이런 신앙을 미처 가지지 못한 그 누구라도 이제부터 신앙은 그 생을 살 가치를 있게 만든다’(Faith makes life worth living)는 진리를 터득하고 이런 신앙을 가지는 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6. 그리스도께 전적인 헌신을 한 제자들 이야기

예수는 진정 생명의 주입니까? 정말 예수가 우리의 구주시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은 있을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 몇 사람 되지 않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우수해서였습니까? 그런 징표는 없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까? 그 당시 그들은 사회 하층의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우수한 전략가였습니까? 대부분 갈릴리 어부나 농부, 단순한 부녀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이 세계에 그런 큰 영향을 끼쳤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totally dedicated to Christ). 만약 예수가 진실로 우리의 구주라면 이 세계에서 우리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전적인 의뢰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commitment)은 우리 생의 다른 분야에서도 우수한 영웅으로 만듭니다.

초대교회 예수의 첫 제자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수의 남녀들이 모든 종족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도록 위탁 받았습니다.그들은 2천 년 전에 다 죽었으나 그들의 영향은 아직도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와 닿고 감명을 줍니다. 우리의 생과 오늘 우리의 교회들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사명을 전해 줍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안드레라는 제자인데, 그리 유명하거나 뛰어나지도 않고 경전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에게서 배워야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성서가 안드레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가 누군가를 예수께 안내하고 소개합니다. 첫째 그는 그의 형제 시몬을 주께 데려 왔습니다. 다음은 그의 점심으로 수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게 되는 한 젊은이를 주께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 일단의 희랍인들을 예수께 인도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안드레 같은 주의 제자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부부나 형제, 친구나 이웃들을 주께 인도하며,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주의 교회는 더 많은 형제자매들이 모여 하나님나라와 그 선교를 위해 더 힘 있게 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마감하며: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세 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인생론이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첫째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언제인가를 묻습니다. 그 시간은 물론 현재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불확실한 미래도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군가 묻습니다. 이는 옛날 알던 사람도 앞으로 만날 사람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매일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디서 귀인이 나타나고 어떤 귀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내 옆의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묻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어떤 선을 베풀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요 자신의 행복이며 여기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내가 (yes)”하고 가서 행할 일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내 형제자매들이 가장 귀중함을 알고 그들과 같이 기쁘고 즐겁도록 사는 것이 성도된 도리요, 자신의 행복도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생을 살며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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