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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6) 피렌체(Firenze) 우피치미술관과 사보나롤라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7-10-02 (월) 06:32 2개월전 175  

피렌체(Firenze) 우피치미술관과 사보나롤라


8월 24일(목) 오전 계속해서 북쪽으로 이동중이다. 피렌체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약 230㎞ 떨어져 있다.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는 모습이 이채롭다. 피렌체는 공화국,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다. 특히 네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이 나온 곳으로 관광업이 시 경제활동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 양쪽 기슭에 세워져 있어 종종 범람하기도 하지만 아름답고 영어로는 Florence ‘꽃의 도시’라는 뜻이다. 미켈란젤로의 도시인데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면 한 폭의 산수화 같이 아름답다고 한다. 피렌체 하면 ‘우피치 박물관(미술관)’이다.


먼저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 광장과 단테 생가, 두오모 성당, 천국의 문을 거쳐 우피치 미술관에 당도했다. 미술관 외관부터 압도한다. 그 전시내용물은 한 번에 다 볼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고 옥상에서 바라다 본 피렌체의 풍광 또한 대단하다.


우피치 박물관은 세계 최고의 르네상스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1584년도에 건설되었다. 이 갤러리 안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메디치 가문에서는 미술품들을 사 모았고 1737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3층은 회화, 2층은 소묘와 판화, 1층에는 고문서가 있다. 우피치(Uffizi) 미술관이라는 어원은 이곳이 피렌체 시정부의 사무실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우피치 미술관은 여러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안전하게 보존될 수가 있었다. 안나 마리아 루도비코라는 메디치 가의 상속녀가 이 우피치 미술관을 피렌체 정부에 기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피렌체의 잦은 홍수에도 이 우피치는 2층과 3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작품들이 잘 보존되었다. 또한 2차 세계 대전의 혼란 속에서도 천운으로 바로 이 우피치 미술관과 인접한 베키오 다리만큼은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1560년에 바자리가 건축하였으며 완성은 20년 후에 이루어진다. 입구는 3층부터이고 총 45개의 방이 있으며 2,500여 점의 작품이 있다. 가이드 없이는 봐도봐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정신없이 찍고 들으며 따라 나왔다. 피렌체와 베니스를 그린 그림 두어 점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참 피렌체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사보나롤라이다. 이곳은 15세기에 개혁자 사보나롤라가 비극적으로 죽임 당한 곳이다. 그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길을 떠나면 피렌체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선 두오모성당이 있다. “꽃의 성모교회”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어떤 시인의 말 그대로 “도시의 한가운데 피어난 영원한 구원의 꽃”과 같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20년에 착수하여 1434년에 완성된 이 아름다운 교회에서 사보나롤라는 피를 토하며 피렌체 시민을 향하여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성시를 이루자고 호소했을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면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하는 몬테 베키오 궁전이 있고 그 옆에 시노리아광장이 나온다. 피렌체의 역사가 한 눈에 녹아 있는 곳, 이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코시모 1세의 동상이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이룬 군주, 그 우람한 동상 바로 옆에 작고 초라한 사보나롤라의 화형터가 있다. 사보나롤라는 이곳에서 1498. 5. 23, 한때 그의 열렬한 팬이었으나 훗날 무서운 적대자로 돌아선 성난 피렌체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염속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뼈는 광장 옆을 가로지르는 아르논 강에 산산히 뿌려졌다.


그의 화형터 앞에 잠시 서서 묻는다. 개혁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는 무엇으로 바뀌는가? 사보나롤라는 훗날 칼빈이 제네바에서 했던 것처럼 피렌체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범적인 복음 국가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르네상스의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보티첼리가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으며, <신곡>을 쓴 단테와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가문은 메디치(Medici)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에 금융업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메디치 가문은 결국 세속권력과 함께 종교권력을 장악하였고 그 열매는 그 가문이 배출한 두 명의 교황 조반니와 알렉산드로를 통해서 나타난다. 조반니는 훗날 교황 레오10세가 되었고, 알레산드로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파견된 것은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 정점을 치닫던 바로 그 무렵(1481년)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대담하게도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메디치 가문의 세속적 통치도 강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부자의 교만과 사치 그리고 음란과 방탕함을 강하게 질타했다. 사회적인 도덕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경건한 수도생활을 개혁의 방향으로 제시한 사보나롤라에게서 민중들은 어두운 중세를 비추는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1497년, 사보나롤라는 강력한 종교 개혁을 선포하면서 시광장에서 보석과 의복 등 화려한 것들과 풍기를 문란케 하는 서적들을 수거, “허영의 화형식”을 가졌다.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금지하고 성가를 보급했으며 행정과 조세 개혁을 단행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공격한 사람은 교황 알렉산더 6세였다. 그는 자식을 다섯이나 둔 세속적인 교황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던 인물이었다. 교황은 군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보나롤라를 어떻게 복종시킬까 노심초사하다 설교하지 하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으나 사보나롤라의 태도는 확고했다. 추기경자리로 유혹하는 교황에게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주신바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결국 교황은 결국 그를 반대한 무리들의 선동을 들어주는 교묘한 방식으로 사보나롤라를 파문했고 결국 그는 화형에 처했다.


사보나롤라는 루터가 말 한대로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순교자인지 모른다.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어쩌면 존 위클리프(1302~ 1384)와 요한 후스(1369 ~1415)로부터 흘러 루터로 이어졌다고 본다.


* 사보나롤라에 대해서는 이윤재 목사의 글을 가져왔다.




호텔 로비부터 예술이다.





여기까지는 아시시의 그랜드 호텔


이동중


아르노 강변의 성루가 보인다.


3개 뿐이 국립 도서관


좁은 길


거리


단테생가





표시


두오모 성당?


천국의 문


마차들


전면





화려한 조각상들


좀 더 가까이 이쪽


저쪽


우피치 미술관 입구 대기줄


이곳 미술관과 많은 작품들을 기증한 왕가인들











다양한 마리아상을 자세히 비교해 보세요. 시대별로 점점 미인으로 가슴의 볼륨감도 더해집니다.











Badia Polyptych,조토 디 본도네





경청








필립보 립비(Filippo Lippi)의 성 모자와 두 천사 그림. 필립보 립비는 신부이고 수녀를 사랑하여 실제로 낳은 아기라는 전설같은 얘기가 솔깃했습니다. 보티첼리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 그림입니다. 바다에서 테어난 비너스가 키프로스(Cyprus)섬에 도착한 모습.





피렌체 전경 - 베키오 다리와 풍경






































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안











카라바조(Caravaggio)의 '이사악의 희생'/ 성경 창세기 22장의 내용을 그린 것. 1601년부터 1602년에 그림.














사보나 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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