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개인적 종말론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7-10-18 (수) 07:04 6년전 2226  
어제 "개인적 종말론"과 관련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른 자료를 찾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관련 글을 발견했는데요.
2013년 총회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타 교단 집사님이 다소 '도발적인' 글을 쓰셨고
누군가 대답 해주어야 할 것 같아
제가 올렸던 글 같습니다
이런 주제에서 정답을 확정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 신교의 '모범답안'은 되니
참고하십시오

플라톤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암시를 넣기 위해
영혼이라는 말을 <'영혼'>이라고 썼습니다.
말로 할때는 작은 따옴표를 <이른바>로 표현해야하는데요,
저는 이런 단서 붙이지 않고 그냥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적인 의미에 머물지는 않지만,
성경 전체를 종합해보면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무엇'에
플라톤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 * 집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주제는 난제(難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당연히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들’은 의미를 해석하거나 추론하는 과정에 상당히 많은 전제들을 동원하며
그 중 큰 비중 없는 전제 하나만 달라져도
서로 다른 결론(해석)에 이르곤 합니다.
 
김용석 목사님이 대강 코멘트 하신 것처럼
이 주제의 전제들 각각을 둘러싸고 복잡한 신학적 논의가 얽혀있습니다.
 
마침 이 주제와 관련된
우리 교회의 자료가 있어서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교인들에게 신학적 논쟁들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리까지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보일 겁니다.
그 입장은 개신교의 것이고요.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을 함께 설명하여서
우주적 종말론 내용이 조금 섞여있습니다.
문장 끝에 ‘ [ ] ’ 괄호는 복사하면서 각주을 이동시킨 것입니다.
각주 하이퍼링크를 못해서요.
 
그림은 제가 손으로 그린 것이었는데
사진 찍어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더니
아이가 깔끔하게 그려주었습니다.^^
 
'낙원1', '낙원2' 라는 표현이 있듯이
'천국1', '천국2'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낙원'을 '천국'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생각합니다.
 
많은 단어가 "광의의 의미"와 "협의의 의미"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보실 때 자신의 지식 체계에 걸리적 거리는 개념들이 거의 다 일 겁니다.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데스"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만 하더라도
약 예닐곱개 됩니다.
 
자료에 있는 내용은 <사도신경> (이승구, SFC출판부)을 중심으로
정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은 아마 제가 그린 것일 겁니다.
 
 
샬롬.
 
 
개인적종말론사진.jpg

 
* 개인적 종말론 스케치
 
임종하면 육체는 자연계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데스와 낙원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러다가 승천하신 예수님의 재림 때 즉 역사의 종말 때 영혼은 몸의 부활을 얻습니다. 단, 이때의 몸은 체라고 하지 않고 부활체라고 합니다. 부활체이니, 우리가 가진 육체의 개념을 넘어서는 속성들이 있습니다사도신경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부활체에 관한 것입니다.
 
영혼수면설은 ‘잔다’는 표현 때문에 나왔는데, 우리가 잘 때 마치 죽은 것 같지만 살아있듯이 육체는 소멸되었지만 인격(‘영혼’)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설을 주장하는데 대부분의 인간이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르는 것이 부족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연옥설이 한편으로는 모호한 경우 판단 유보를 하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필요한 경우에 연옥설보다는 자비로우신 주님에 의탁해야겠지요].
 
* 임종과 부활체 사이를 중간상태라고 하기도 하지요. 그 이후 성도가 거하는 곳을 “낙원Ⅱ”라고 하기도 하고 “천국”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거하는 곳을 “게헨나”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2차 죽음(소멸)을 겪는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 인식의 한계와 스케치: 그림은 개인적 종말론에 관한 스케치입니다. 세부 묘사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 생각에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 저편에 있는 것을 무리하게 구체화하는 잘못을 범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미할 수밖에 없는 사안(고전 13장)은 스케치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 “몸이 다시 사는 것” 즉 “부활체를 얻는 것”의 유익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사실 그 근거를 제시하기 쉽지 않습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에서 톰 라이트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가 해체되는데 환경 오염 좀 시키면 어떤가 하는 신자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부활이후 새하늘과 새땅이 이 세계와 연속성도 있다는 근거의 하나로서 몸의 부활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근거를 제시하려면 스케치를 넘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해야 하는데 앞에서 이런 시도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몸이 다시 사는 것”의 중요성은 다른 함의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 개인적 종말론 스케치에서 볼 수 있듯이 “몸의 부활”은 “역사의 끝” 즉 “종말”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특별한 때를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몸의 부활”이 있으면 “종말의 때”인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몸의) 부활하셨잖아요. 비록 한 분이 부활하셨지만 이 부활은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이며, 이러한 예수님 부활은 “종말의 서곡”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있는데 이 시작을 선포하는 세러머니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 개인적 종말론 그림을 보십시오. 빨간색 실선은 영원한 삶(영생)을 나타냅니다. 영생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묘사하기보다는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한다는 수준의 스케치(개념)을 갖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코스는 희망적입니다. 영생 화살표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임종이라는 현실을 맞이해야 하지만 그리고 슬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지만 좀 더 큰 안목에서 보면 소위 죽음은 더 좋고 의미있는 것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 영생 화살표(영생 코스)를 떠올리시면 영생에 관한 중요한 점 하나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영생은 성도들이 죽은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빨간색 실선은 임종 전에도 있잖아요.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