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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과 우물, 그리고 생명샘 (요 4:5~15)

이태영 (군산노회,수산교회,목사) 2017-10-18 (수) 11:13 6년전 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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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과 우물, 그리고 생명샘

 

 

(요한복음 4:5~14)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전주에서 성경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는 김진호 목사님이 전화로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김진호 목사님은 우리 교단 목사님은 아니지만, 늦게 신학을 시작해서 아주 열성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분입니다.

 “목사님, 요한복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중에 우물이 두 종류로 나오더군요.” “그래요? 몰랐어요.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두 가지 우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던 본문 내용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성경을 다시 보았습니다. 다시 보고 또 보면서 요한복음서 4장에서 샘과 우물을 매우 중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본문을 다시 보게해 준 김목사님께 감사드리며 묵상한 내용을 여기에 적어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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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시는 본문(4:5~26)은 전반부(5~14)와 후반부(15~26)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물, 후반부는 예배를 중심으로 대화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전반부에서 물의 근원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등장시킵니다. 요한복음서는 샘물과 우물을 자연스럽게 비교한 후에 구원에 이르는 생명샘을 증언합니다. 후반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예배로 이어지면서 곧바로 신앙의 본질로 나아갑니다.

  전반부에서 이루어지는 물의 근원에 대한 대화와, 후반부에 계속되는 예배에 대한 대화는 모두 로고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 샘과 우물

 

샘(페게)와 우물(프레아르)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우물(4:6, 12)이 우리말 성경에는 모두 우물로 번역되었지만, 성경 원문은 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6절의 샘은 페게인데 반해서 12절의 우물은 프레아르입니다.

페게의 본 뜻이 솟아나는 샘물,’ 또는 물의 원천이므로, ‘페게는 땅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이라고 할 때, 야곱은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옹달샘을 발견하고, 이 샘을 손질해서 작은 우물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하수를 얻기 위해 시추하듯이 야곱이 처음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 메마른 땅을 깊이 파서 물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6절의 페게에 비교해서 12절에 나오는 프레아르는 사람이 만든 우물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프레아르우물또는 구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부러 땅을 깊이 파고, 무너지지 않게 옆벽을 돌을 쌓은 우물입니다.

 

은혜의 샘과 수고의 우물

 

  그러므로 페게가 자연샘이라면 프레아르는 인공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페게에 조롱박이 맞는다면 프레아르에는 두레박이 어울릴 것입니다. ‘페게라는 옹달샘이 자연히 주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상징하는 은총의 샘이라면, ‘프레아르라는 우물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나타내는 수고의 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샘우물로 되다

 

  요한복음서는 본래 페게였던 야곱의 샘(6)을 사마리아 여인이 프레아르로 부르고 있음(12)을 지적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프레아르)을 우리에게 주셨고…이러한 표현의 차이를 통해 요한복음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야곱의 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온 샘은 야곱이 다소 손을 대서 우물의 모양은 만들었을지언정 본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샘입니다. 야곱은 이 샘을 처음 얻게 되었을 때 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 이후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야곱의 이름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샘이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면서 개보수와 확장공사를 통해 이전보다 더 규모가 큰 우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처음에 야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잊고 야곱을 비롯해서 사람들의 노력과 공덕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본래 은총의 샘(페게)을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우물(프레아르)로 바꾸어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린 세대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시대는 하나님의 은총을 잊는 대신, 사람의 수고만을 기억하는 율법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눈물의 사랑방교회가 화려한 교회당이 되면서 은총을 상실하다

 

  우리 교회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처음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질 때에는 사랑방에 한 두 명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총을 매순간 경험하며 눈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사랑방 교회가 잠실(蠶室) 교회로, 그리고 별도의 교회당을 크게 지으면서 점차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강조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잊고 사람의 수고를 기억하며 앞세우는 교회로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2. 생명샘

 

‘샘’과 ‘우물’ 중에서 ‘샘’을 택하신 예수님

 

  요한복음서는 샘과 우물을 비교하면서 은총을 상실한 시대를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페게)과 우물(프레아르), 두 가지 용어 중에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단어는 ’(페게)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에서 샘물페게를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페게)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비롯해서, 우리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을 말씀하시되 생명샘으로 나아가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은총으로의 회복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믿음의 방향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또 다른 표현으로 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아가는 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은총의 샘물이든, 야곱의 우물물이든 공통점은 육신을 위한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샘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샘이란 바로 로고스로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8:3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실재는 오직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6)-‘우물’(12)-‘생명샘’(14)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참된 예배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이제 예배로 이어집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여인은 묻습니다. 사마리아의 산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영과 진리로라고 되어 있지만 성경원문은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된 예배임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신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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