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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솔문

각주 [러빙빈센트, Now I understand]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7-12-01 (금) 08:39 6년전 1980  

앞글에서 저는

아주 용감한 주장을 했습니다.

 

화가 빈센트의 이런 태도는

목회자 때 가졌던 태도의 연장선이지요,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지만.

 

논문에서는 이런 주장에 권위자의 글을 각주로 달지요.

두 신학자의 글이라면

일단 충분하겠죠?

 

각주1의 총신대 교수님 글은 오늘 아침에 처음 접했습니다.

 

각주2는 어제 본, <새가정> 금년 12월호에 나온 구미정 교수님의 글, “빈센트 반 고흐와 고난받는 종입니다. <성경이 있는 정물> 그림을 둘러싼 다른 해석인데요. 아닌게아니라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 ()에 우유부단한 빈센트같은 성격이 신앙 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귀 한번 자른 일로 빈센트 성격을 정반대로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숱하게 저지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지만 말입니다.

 

 

 

각주1.

 

반 고흐에 대한 라 교수의 확신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간명하다. “반 고흐의 소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소명이 인생 전반부에는 성직자로서, 후반부에는 화가로서 표현된 것뿐이었다면서 반 고흐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설교와도 같았다”(<반 고흐, 삶을 그리다>, 라영환, 가이드포스트)고 일찍부터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반 고흐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2015 크리스천 아트포럼에서는 특별히 고흐가 자주 그림의 소재로 사용하였던 일하는 소시민들은 직업을 하나님을 향한 소명으로 보고 최선을 다하라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이 담긴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각주2

 


still-life-with-bible.jpg

 

 

나는 지금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성경이 있는 정물(1885)>을 보고 있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해에 그려진 그림이다. 펼쳐진 성경 뒤쪽에 서있는 촛대의 촛불이 꺼져있는 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암시한다.

 

어느 미술 평론가는 이 작품을 끝으로 빈센트가 기독교와 결별했다고 해석한다. 목사였던 아버지와 지독히도 불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리있는 해석이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의 길을 걷는 걸 싫어했다. 맏아들이 자기처럼 목회자의 길을 걸었으면 했던 아버지의 눈에는 탄광촌 목회에 실패하고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선 빈센트가 실패자로만 보일 뿐이었다. 팔리지도 않는 그림에 아들이 연연하는 것도 못마땅한 터에 결혼하겠다 데려온 여자들마다 죄다 눈에 들지 않으니 불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아버지의 속을 뒤집을 심산이었는지 빈센트는 급기야 시엔이라는 이름의 성매매여성과 동거에 들어갔다. 다섯 살짜리 딸을 데리고 뱃속에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한 채로 거리에서 몸을 파는 그녀가 빈센트의 눈에는 성녀로 보였지만, 아버지에겐 그렇지 않았다.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빈센트는 아버지가 자기를 처럼 취급한다고 털어놓았다. 강단에 올라 설교할 때면 언제나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강조하던 아버지가 실생활에서는 여지없이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게 그는 끔직이도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성경이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이, 빈센트가 기독교를 버린 증거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펼쳐진 성경이 하필이면 이사야서 53장이고, 펼쳐진 성경 앞에 놓인 작은 책, 하도 많이 읽어서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책이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고나면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이사야서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잘 알려진 장이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53:2~6, 공동번역)

 

 

그런가 하면 프랑스가 자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에멜 졸라의 삶의 기쁨은 고난 받는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고아 소녀 폴린느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을 친척집에 빼앗기고, 그 집안 사람들에게 철저히 학대당한다. 그러나 인내와 끈기, 흔들리지 않는 선량함으로 끝내 고난을 이겨내고 원수의 아이마저 살려낸다는 줄거리다. 빈센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야말로 이사야서 53장을 몸소 살아냈다고 본 것 같다. 그에게 말씀은 성경책 안에 봉인된 채로 있으면 안 되었다. 성경책을 뚫고 나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쳐야 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말씀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리는 영이 되는 길에 있었다(고후 3:6 참고). 특히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받는 종을 살아내는 게 예수의 제자된 도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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