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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성서와 그리스도 신앙 이해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12-03 (일) 06:38 6년전 1628  

성서와 그리스도 신앙 이해 신명기 6: 20- 25 20171126

 

1. 서론적 이야기

에리히 프롬(Erich S. Fromm)<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는 책에서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구약에 대한 편견과 평가절하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을 새롭게 읽도록 자극합니다. 그는 독일 출신 유대계 미국인으로 <사랑의 기술><소유냐 존재냐>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정신분석학과 사회심리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바탕으로 근본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구약성서와 후기 유대교전승 속에서 하나님인간에 대한 개념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며 발전해 왔는가를 밝힙니다. 이 책은 바벨론맘몬의 우상에 사로잡힌 21세기 한국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속에서 역사하는 이름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그 분을 본받도록 촉구합니다.

저자는 근본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발전과정을 추적합니다. 초기단계에서 하나님 개념은 부족장이나 왕과 같은 절대적 지배자로 묘사됩니다. 창조이야기에서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할 가능성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복종의 행위를 인간이 스스로 생활하기 시작한 인류역사의 기원이자 인간이 추구할 자유의 근원으로 생각합니다. 절대적 지배자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홍수이야기에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없애기로 결심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과 동물들을 살려주기로 마음을 바뀝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습니다. 이 생명존중의 언약체결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절대적 지배자가 아니며 인간은 협정에 있어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었고 쌍방은 이 언약에 명시된 원칙에 얽매이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이야기(12-17)에서도 발견됩니다. 저자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12:3)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발전된 이해를 보여주는 보편구세주의에 관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 전 인류로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관련해(17:7-10)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의인을 악인과 함께 공멸시키는 부당함을 지적하며 정의와 사랑의 규범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장면에서 진보된 하나님이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하나님으로 계시됩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민족에게 야훼라는 이름으로 알려지지만, 이름 없는 하나님과 대담하게 논쟁하며, 서서히 인간은 하나님의 짝이 되어 거의 대등한 관계를 맺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역사과정을 발전과 진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며, 일차적 유대관계(혈연, 지연)를 끊고 떠나는 새로운 출발을 강조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남으로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고, 이스라엘민족이 이집트를 떠나는 역사로 이어지며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민족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으로 이해하며 이스라엘민족에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구약에서 예언자개념은 특별한데 예언자는 진리의 계시자이며, 정치활동과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은 정치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항상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영성의 체험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시대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시기입니다. 잃었던 과거의 황금기(에덴동산)를 다시 찾는 미래의 황금기로 봅니다. 예언자가 그리는 메시아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인데, 이것은 인간이 먼저 소외를 극복하고 서로 하나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저자에게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조화와 화합이며 분리와 소외의 극복을 뜻합니다. (<기독교사상> 20159월호, 196-204 참조)

 

2. 성서의 특성은 무엇인가?

성서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것이 문서화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된 것은 B.C.8.9세기에서 A.D.1세기말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니 문서화된 이후와 우리와의 시간적 거리만도 3천 년에서 2천 년이 됩니다. 성서는 한 권의 고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립된 여러 책들이 한데 묶어졌습니다. 그 중에 구약이 39권이며 신약이 27권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와 직결된 경전이며 신약은 이미 세계사와 직결된 그리스도 중심의 경전입니다.

그 이름이 성서(Holy Bible)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것과 구별된 거룩한 내용만 실려 있으리라는 전제를 가지고 읽다가는 크게 실망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다른 어떤 민족의 건국신화나 민담 또는 야사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잡다한 것이 무수하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역사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이 다 실려 있습니다. 추잡한 것과 고귀한 선이 있으며, 불륜과 순결, 절망의 애가가 있는가 하면 환희의 개가도 있습니다. 그 안에는 연대기(역사)가 있고 예술, 종교철학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기록의 양식으로 보면 시가, 시문, 산문, 소설 등 다채로우며 이러한 형식 안에는 격언과 같은 지혜의 단편, 축복, 예언, , 기도, 설교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성서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성서가 어떤 책이기에 지구 한 구석의 지역에서 숫자적으로나 힘으로 보나, 한 민족 안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이 책이 국경을 넘어 백인들의 역사형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온 세계의 구석구석에 침투해서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영원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까?

성서는 이스라엘역사의 잘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니 저들 민족들이 잘할 때, 약할 때 또는 강할 때, 패배했을 때 또는 승리했을 때 작용하는 어떤 힘, 어떤 의지, 어떤 손길이 머무르고 있다는 확신을 준 것입니다. 성서는 어떤 한 민족 공동체 또는 개개인의 삶의 기록입니다. 성서는 그 삶 한 복판에서 경험한 무엇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 자체를 이상화 하지 않고 그대로 폭로하면서 자기들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의식하고 신앙화 하였습니다.

편의상 성서는 경전으로 된 순서를 밟아 창세기이야기부터 시작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구약은 원래 출애굽을 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출애굽사건은 예배의식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같은 내용을 후손들에게 전승한 것임을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너희 후손들이 묻거든이렇게 대답하라! 우리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종 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야훼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를 내려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신명기 6:20-24). 이와 같은 내용의 고백이 사무엘상 128, 시편1361-26, 여호수아 242-13절 등에 계속 반복되는데, 모두 출애굽기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였다는 고백입니다. 그때의 저들을 히브리라고 불렀는데, 라므세스 2(Raamses II. B.C. 1290-1223)때와 라므세스 4(Raamses IV)때의 자료인데, 거기에 히브리인 이 언급됩니다. 그들은 성을 건축할 돌을 실어 나르는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1:11).

안병무박사는 이들은 지금의 말로 하면 민중이라고 하며, 전통에 있어서 민중의 해방을 주제로 삼고 있으며, 그 전통이 예수님에게서 뚜렸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오클로스란 바로 예수님을 둘러싼 그 민중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중의 해방이 큰 줄기로 성서전체를 꿰뚫고 있습니다. 이점이 다른 모든 고전과 비교해서 볼 때 성서의 고유한 특성임이 재확인 됩니다. (안병무, <성서와 해석> 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33-34)

 

3.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제 우리의 신앙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인류역사연대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며,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을 놀랍게 생각하였습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 나폴레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능력에 경탄하였고, 근대인의 우상이었던 괴테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괴테는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방사되는 숭고한 것과 빛나는 반사에는 언제나 신성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당신은 진심으로 그를 경배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초인으로 자처하던 니체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단명을 아깝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근대 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전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예수 전 연구가 가장 성행된 것은 19세기지만 슈바이처의 말과 같이 19세기의 예수 전 연구는 마치 야곱이 얍복강 언덕에서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듯이(32:24이하) 예수와 더불어 씨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설문한 것은 대제사장 가야바나 근세의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부터가 같은 설문을 했던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6:16)라고 대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역대의 교회는 이 베드로의 고백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의 이름을 희랍어로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많았을 것이나, 그리스도라 일컬음을 받은 예수는 나사렛 예수 한 분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원래 메시아라는 히브리 말을 희랍어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고(1:1), 구세주의 뜻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벧후2:20, 1:49). 여기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서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구세주로 인정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2천여 년 전 로마제국이 그 수도의 사치를 지속하기 위하여 온 천하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을 때에 로마제국 동편에 있는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말구유 위에서 탄생하셨고, 30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신 다음 국사범의 누명을 입고 골고다산상에서 십자가의 극형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서는 역사 과학적인 방법이 적용되며, 앞서 말한 예수 전 연구의 학문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에 대하여는 4복음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요세푸스(Jesephus)도 서술한 바 있고, 기원 120년경에 활약한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도 그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면서도 역사의 테두리를 벗어난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답은 학문이 주는 해답을 넘어 경건한 신앙고백에서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존재자로 믿게 하는 것은 그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고전 15:17)고 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교신앙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고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래서 신약성서 전체는 이 부활의 빛에 비추어 보면서 부활의 역사적 경험을 한 증인들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언인 것입니다. 이 부활의 빛에 비추어 볼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의미가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인격으로 믿게 하는 것도 그의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리스도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그리스도교회는 예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4. 참 하나님, 참 사람

세상에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교훈만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키는 일을 경홀히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인도의 무저항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 Gandhi)는 나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아무 흥미가 없고, 설사 예수라는 인물이 생존한 일이 없다고 판명되고 복음서에 기록된 바가 제자들의 상징적 기록이라손 치더라도 나는 거기에 대하여 게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산상수훈은 나에게 있어서 변함없는 진리가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간디뿐 아니라 현대인은 대체로 그리스도교 윤리를 매개로 하고 그리스도교신앙에 접근하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 전을 쓴 르낭(Ernest Renan)이나 교리사의 대가인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그 윤리사상에 있다고 보았고, 톨스토이 같은 이도 산상수훈을 실천하기에 진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교훈 보다는 그것을 몸소 실천하신 그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인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그려진 인간 예수의 초상화는 그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럽습니다. 예수에게는 성장과정(2:52)을 밟은 모습으로 보면, 인간미가 풍부하였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셨고, 웃기도 울기도 하며 탄식과 때로는 목 놓아 통곡도 하셨습니다(5:7).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는 믿음과 기도에 힘쓰고 마귀에게 시험까지 당하신 것입니다(4:1이하). 그런데 인간 예수에게 한가지 특이한 점은 그에게는 죄의식이 없었다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셨다(4:15). 하늘 천사는 하나님께 순종치 않다가 사탄으로 타락하였고,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낙원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2:6이하). 그래서 그는 죄 없는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숭고한 도덕과 수정같이 맑은 양심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사죄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11:27)고 하였고, 신적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을 召命(소명)하셨습니다(9:9). 그리고 자기 자신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명함과 동시에(11:6) 자기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9:1-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품성에 대하여는 보다 더 분명하게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7:16).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4:10). 이리하여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신 것입니다.

성서의 증언대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중에 강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니케아 회의(325)에서는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enmaned God)이라고 규정하였고, 칼케돈 회의(451)에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vere dues vere homo)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역대 교회는 그를내 주,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으려니와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이해대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 곧 하나님을 아는 일이요, 그를 아는 데에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우주의 발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발견은 우리 인간 모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 외아들을 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성장하여 큰 실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알뜰한 집 한 채를 마련하여 드리고 때를 따라 쓰실 것과 입으실 것을 공궤하여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시는 눈치가 없고, 날이 갈수록 슬퍼하는 기색이 더하여 갔습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아들을 핀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주말에 어머니를 찾아가서 어머니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한데 어머니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슬퍼하시느냐고. 여기에 대한 어머니의 대답은 이러 하였습니다. 너는 나에게 좋은 집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너는 나와 더불어 같은 집에 살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너는 나와 더불어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이 별로 없다. 네가 나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너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 주기 바란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 사랑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기 몸소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주심으로써 자기 자신과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5. 결론적 이야기; 성서와 성령의 역사,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해

칼빈은 성서는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독특한 강조점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성서 말씀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른 영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영으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 정경화의 과정은 서기 97년에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 랍비들에 의해 구약성경 39권이 채택되고 그 뒤 300여 년이 지나서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이 결정되고 거기에 외경 7권이 추가되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과 개혁교회는 성령이 그 전체과정을 주관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오늘 직접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그 옛날 2천여 년 전, 3천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예언자들,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적 간격, 공간적 거리를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 곧 성령이 역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이제 한 가지 더 중요한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구약성서적 이해의 표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첫째, 땅과 많은 후손을 얻고,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살게 되는 것. 둘째, 출애굽의 해방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셋째,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 넷째, 메시아의 오심과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2)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약성서적 이해의 표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 둘째, 죄와 용서, 하나님의 칭의,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 되는 것. , 영원한 생명이 있는 빛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 3) 결론적으로 성서의 구원의 핵심은 메시아적인 구원관이고, 동시에 정의를 세우는 구원관이며, 그것은 역사와 인격을 통하여 온전히 구현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우리교회는 육신의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과 전인적 구원을 갈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공동체여야 합니다. 세계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듣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았던 이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여는 이들일 것입니다. 구원은 세계 한 복판의 사건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지혜 전승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잔치에 초대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어머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기쁨과 위로가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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