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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01-07 (일) 04:21 9개월전 494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25-37

201817, 14일 새해주일

 

 

시작하며: 사마리아의 역사적 배경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초막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중도에 사마리아 지방에서 사역하시고, 예루살렘에서 초막절을 지키시며 복음사역을 하셨습니다(7:11-8:59). 본문은 초막절 직후에 예수께서 베다니로 내려가시는 도중, 그 위험한 강도 나오는 길에서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참된 이웃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10:30)까지는 약 27km이며, 고도의 차이는 약 1000m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급경사가 진 험준한 길이었습니다. 여리고에는 제사장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10:33)는 연민의 정을 깊이 느끼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생각지 않는데도, 이 사마리아인은 불행을 당한 유대인의 이웃으로 행동적인 사랑을 베푼 것에 예수님의 역설적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10:37)는 사마리아 사람을 가리킵니다. 율법사는 바리새파였고, 제사장들로 구성된 사두개파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자처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에서 이 율법사는 자기들이 부정, 불의한 인간들로 간주하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사랑의 표본으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10:33)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B.C. 722) 사마리아 지방에 잔류하고 있던 이스라엘인과 이주해 온 이방인과의 혼합 결혼으로 태어난 혼혈족입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혼합종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통상 사마리아인들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헌데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이라는 개념을 제한적으로 정의하는 것을(유대인들은 동료 유대인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다) 철폐하셨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2. 누가 나의 이웃인가?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율법사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인 영생문제를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10:26). 율법사는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구절을 뽑아 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10:27)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성서를 읽되 어떻게읽는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눈으로읽는 것인데 글을 깨친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마음으로읽는 것인데 성령의 조명을 받아 본문의 뜻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말씀이 주는 감동과 감격으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셋째는 몸으로읽는 방법인데 깨달은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단계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1:14) 성육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성서를 제대로, 온전히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율법사는 제2단계까지는 이르렀는데 제3단계는 이르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10:28).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Do it, and you will live) 역시 마지막 관문은 행함’, 실천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율법사는 알기도 많이 알고 가르치며 강의도 많이 했을 것인데 아직 행함의 단계에 이르지 못해 영생의 감격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질문을 합니다. 성서에는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30-35)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웃사랑이 율법의 가르침인 만큼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를 사랑함으로, 율법을 실천함으로 영생의 감격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historical fact)도 아니고 전해오는 소문도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께서 지어낸 이야기’(fiction)입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꿈과 비전이 그 이야기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네 명입니다. 즉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상태에 처한 예루살렘 사람, 그런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 만난 희생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앞서 언급한 영생을 얻는 방법, 즉 말씀을 어떻게읽어야 하는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보고 지나간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눈으로읽는 단계에 머물렀지만 사마리아인은 보고’(눈으로) ‘불쌍히 여겨’(마음으로)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주막으로 옮겨’(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과연 누가 영생의 관문을 통과하였을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몸을 행한 사람이 영생의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예수님은 질문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인가?”(who is my neighbor)이었는데 예수님의 답이 담긴 질문은 누가 이웃이 되었는가?”(who was a neighbor unto the man)였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이웃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사의 입장은 이웃이니까 사랑하기이고, 예수님의 입장은 사랑하니까 이웃되기입니다.

유대인의 동족사랑은 유명합니다. 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5:43). 율법 전통에 충실하여 이웃과 원수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이웃이라 판명되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교리와 신조가 다르고 관습과 문화가 다르면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사마리아인은 자신과 어떤 공통점도, 이해관계도 없는 유대인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웃이 되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엔 남남이었지만 사랑하니까 이웃이 된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뭔가 통하는 이웃이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사랑해서 이웃으로 만드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기대하며 예수님이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으로서 자부심도 강했던 그로서는 죽어가는 자기 동족의 생명을(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 구해주었다는 이야기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로서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구해주었습니다라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이웃지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배경에서 갈등과 분쟁, 불신과 증오로 점철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 그 곳 우물가에 나온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반응했던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조차 하지 않는”(4:9) 단절 관계였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야기지만 사마리아인이 자기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죽어가는 유대인을 구원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3. 어떤 과정을 거쳐 선한사마리아인이 되었는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것은 율법사뿐 아니라 곁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인즉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 바로 갈릴리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중 사마리아 마을에서 불쾌한경험을 한 때문이었습니다(9:51-56). 지리적으로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사마리아가 위치하고 있어 유대인들은 갈릴리와 유대를 오고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문제로 고심하였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수치로 여겨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서 다녔고 일반인들도 밤중에, 혹은 소문내지 않고 몰래 사마리아를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 전령(herald)을 앞서 보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선전을 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훼방을 놓았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지만 분노한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할까요?”(9:54)라고 외친 것으로 보아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마을에서 받은 수모와 모멸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처럼 분노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해서 돌아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방금 전에 사마리아 마을에서 당한 불쾌한경험으로 사마리아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예수님은 이웃사랑에 대한 비유에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원한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고 있으니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과연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이웃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결론에 선뜻 동의하였을까요? 아마도 제자들은 속으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방금 사마리아 마을에서 당하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마리아인 중에 그렇게 착한 일을 할 작자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현실에서 사마리아와 유대가 결코 이웃지간이 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너희 생각대로 지금 현실에서 사마리아와 유대는 이웃이 될 수 없음을 나도 안다. 그러나 언젠가(sometimes) 사마리아와 유대가 이웃지간이 되는 날이 와야 하고 또한 올 것이다.”하신 것입니다. 원수지간이었던 유대와 사마리아 관계가 이웃지간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담긴 비전이고 꿈이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이야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앞에 붙여졌던 형용사가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들려주실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하면 그 앞에 믿을 수 없는’(unbelievable), ‘말이 통하지 않는’(uncommunicative), ‘불쾌한’(uncomfortable), 한마디로 나쁜’(bad)이란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 후 2천년이 지난 지금은 신자, 불신자 가리지 않고 사마리아인하면 자연스럽게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이야기에 담긴 꿈과 의지의 능력이 이룩한 결과입니다.

 

4. 사마리아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

꿈과 비전은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유대 관습과 전통의 포로였던 율법사와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려주신 얼마 후, 역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어느 날이었습니다(17:11-19). 멀리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나병환자 10명이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던 중 깨끗함을 받은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10명 중에 오직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예수님께 돌아와서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못 흥분하신 어조로 주변에 둘러선 제자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보라, 10명이 모두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 다른 9, 갈릴리 사람, 유대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 구원받을 수 없는 족속이라며 너희가 그토록 저주하고 미워하였던 이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내게 왔도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다른 9명이 받지 못했던 축복의 말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영적구원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영생의 사람이 되어 자기 마을에 돌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갔을 것임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사마리아인에 대한 긍정적서술은 유독 누가복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저자가 저술한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승천하시기 직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리스도는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하시면서 장차 이루어질 전도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18).

예루살렘을 원점으로 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제자들 가운데 유대 전통에 자부심이 충만하여 사마리아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을 가진 자가 있었더라면 주님께서 복음이 전파될 지역으로 사마리아를 언급하실 때 속으로 거긴 빼지요, 아니면 건너뛰지요.’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마리아를 제외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 모든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서 사마리아는 결코 생략해서는 안 될 사역의 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이런 구도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성령강림과 교회 설립 역사(1-7)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파된 복음(8-12), 그리고 안디옥을 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바울의 땅 끝(이방인 지역) 선교로(13-28) 이어졌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84-25절에 기록된 사마리아 전도와 그 결과는 그 때까지 예루살렘과 유대 중심으로 사역하던 사도들의 선교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은 다메섹과 가이사랴 같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은 바울이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땅 끝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선교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5. ‘선한 사마리아인과 한반도 평화

신약성서 속의 사마리아와 사마리아인의 관련 기사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꿈과 비전을 얻는 데 유익한 것입니다. 우선 성서 속의 사마리아와 유대의 관계가 오늘 한반도의 남북 관계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솔로몬 왕 이후 분열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와 남 왕국 유대의 수도였던 예루살렘 사이엔 넘을 수 없는’(non passable) 불신과 증오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다투고 서로 훼방을 놓았습니다. 분단 70년이 넘은 한반도의 남과 북이 그러한 입장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이든 일단 의심하고 봅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뢰와 마음이 통하는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실로 비극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이자 현실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이 분단과 갈등의 현실 상황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화해, 즉 둘 사이가 원수지간에서 이웃지간으로 바뀌는 그 날을 꿈꾸셨습니다. 그런 화해와 평화는 교리와 신조, 이념과 체제, 관습과 전통을 따져보고 서로 같은 사람들끼리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반대가 될지라도 곤경에 처한상대방을 조건 없이 도와줌으로 원수까지라도 이웃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랑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4-47)하셨으며, 바울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권면한 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숫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12:18-20)하였던 것입니다.

원수지간에 쌓인 불신과 증오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용서와 사랑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결과로 얻게 된 우리의 화평”(2:14)입니다. 참으로 희생 없이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희생은 줄 것을 가진 자, 자기 것을 남과 나누려는 마음을 지닌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본 교단과 뜻을 함께 한 그리스도인들은 1970-80년대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한국 사회의 양극화 방지’, ‘인권과 평등’, 그리고 평화 통일을 구현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 안의 빈부격차로 인한 계층적 갈등을 해소하고 나아가 남북 사이의 화해와 평화 정착에 크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마리아의 지정학적위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왕국의 갈릴리와 유대 사이에 위치하였고, 사도행전의 선교구도에서 보면 사마리아는 유대 땅 끝 사이에 위치하였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사마리아는 중간 지대(neutral zone)였습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정체성이 모호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경멸한 중요한 이유는 북 왕국 멸망 이후 사마리아 지역에 대거 유입된 앗수르와 바벨론, 페르시아 출신 이주민들로 인해 형성된 종교·문화적인 혼합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순수 정통을 중요시하는 유대교 전통에서 볼 때 이교도적인 종교의식과 문화적 요소를 수용한 사마리아인들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불경죄‘(不敬罪)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양쪽 어느 곳에서도 내 편이라고 인정을 받지 못한 외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외로운 사마리아에서 선한 이웃이 나오기를 기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마리아는 갈릴리와 유대와 땅 끝의 중간에서 양쪽을 연결, 조정할 수 있는 중재영역’(mediatory zone)이기도 합니다. 양쪽과 모두 통하기에 성격과 경향이 서로 다른 양쪽을 중재하고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해 유대와 갈릴리가 만나고, 유대교인과 이교도가 만나 교류합니다. 마치 전라도와 경상도의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화개장터와 같습니다. 특히 민족분단 상황에서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벽이지만 또한 그 곳을 통해 남북왕래가 이루어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와 같이, 평화 통일의 일꾼들은 70년 넘게 자본주의만 경험한 남쪽과 사회주의만 경험한 북쪽 사이에서 양쪽 모두와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continues and separates) ‘3영역을 구축하고 평화와 공존을 공간을 넓혀감으로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갈등과 분열, 불신과 증오, 죽음과 폭력의 사악한기운을 몰아내고 화해와 일치, 공존과 협력,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는 영의 생기’(1:2, 37:9)가 되어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이들의 호흡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6. 진실과 참은 비폭력 저항의 생명

다양한 욕망과 이해관계 그리고 정치적 대립과 증오를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이웃되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정신적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위대한 산 정신’, 진실과 참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위대합니다. 그러니 참은 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라는 영원 자를 향한 수직적 상승운동을 통해 자신을 변혁시키고 그것을 이웃의 고통에 연대하는 자발적 고난을 통해 현실의 역사에서 모두가 자유·평등한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수평운동으로 확대시키는 구조를 가진 역사현실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자의식(自意識)으로 예수는 비폭력주의, 평화주의만이 살 길임을 밝혀주셨습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살려냄으로써,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의 부조리에 의한 무기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그 모순을 종식시키는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되어야 할 과제를 갖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사마리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위는 영생 얻는 자들의 모델이며, 그의 맨 앞에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들을 경멸하는 유대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시간과 물질,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쏟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내가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나는 죄인들의 친구로 강도 만나 피를 쏟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리 기 위하여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형입니다.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해를 맞아 사회와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원을 드려야 합니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와 화해의 깃발이 나부끼는 광장, 인간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거대한 서사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립의 물꼬를 평화를 향해 돌리는 모맨텀(momentum)으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2018년은 서로의 손길을 마주잡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의 손을, 행복한 사람들이 소외된 사람들의 손을, 건강한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의 손을 따뜻하게 마주 잡는 한 해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남과 북이 두 손을 마주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쪽사회 내부는 물론 한반도 전체에 평화와 공존, 화해와 상생(相生)의 물결이 출렁이길 소망합니다. 평화의 하나님의 은혜가 온 누리에 가득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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