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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교 A/S 편지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8-01-10 (수) 08:57 6년전 1932  

◯◯님께,

 

1.

 

제가 설교로 전달해드리고 싶은 것,

전달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을 잘 헤아려주시고

격려해주심 감사합니다.

 

평소 구변이 없는 자인데

기침 안 나오게 하려고 약을 세게먹고 강단에 서니

더 더욱 어눌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을 마시고 올라갔는데도 입이 마르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설교 원고의 일부가 육필이라는 것이 방증하듯이

설교 자체는 영감이 있으나

원고로서는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2.

 

사실, 목요일까지 다른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상하지 못했던 지난주의 상황 속에서

계획했던 설교가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낼 가능성이 있어

설교 주제를 이번 것으로 바꾸었습니다(성경의 한 책을 잡아 순서대로 다루면 이런 오해의 소지가 없는데 당분간 순서설교 계획이 없습니다).

 

다른 주제를 잡아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서

오래 전에 기념으로 사놓은

<인생>을 어영부영 읽게 되었고

그 깊이에 감동하던 차에

결론부에서 빈센트 이야기를 읽다보니

정말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더군요.

 

설교자로서 교인들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택한 본문은 신학자나 설교자들에게 조차 주목받지 못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평소에 힘이 되었던 구절입니다.

이번에 묵상해보니

빈센트가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더군요.

 

 

3.

 

신실하고 성실하고 실력있는 설교자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게다가 유명하기까지 한 분들입니다. 그러니 그 고백들을 저 같은 사람이 알지요).

설교 구성이 미진해서 죄송한 마음으로 전한 설교가

오히려 교인들에게 잘 전달된 경험에 관한 고백이었는데,

저에게 이번 설교가 이 경험에 해당됩니다.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없어서 펜으로 마무리한 원고답게,

원고를 다시 보니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특히 빈센트 소개 부분에서요.

 

빈센트의 이 두 가지 고백이 아주 중요했는데요.

 

 

설교단에 섰을 때,

누군가가 땅속 어두운 동굴에서 밝은 대지로 빠져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내가 어딜 가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흐뭇해져.

그런 일을 잘 하려면, 복음의 심장이 있어야 해.

주님께서 그것을 내게 주셨으면 좋겠어.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탄광촌 전도사 시절, 설교에 웅변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씁쓸하게 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새로운 상황에서도 목회자 때 추구했던 것을 빈센트가 여전히 추구했다는 근거를, 예배의 설교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습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원고에서 두 번째 고백의 첫 문장이 첫 번째 문장에 붙어있더군요.

저의 다른 글에서 급히 카피하다가 실수한 것입니다.

심지어 원고에 적어놓은 전문가(총신대 조직신학자)의 결정적인 근거도 설교에서 빼먹었습니다.

 

 

반 고흐의 소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소명이 인생 전반부에는 성직자로서, 후반부에는 화가로서 표현된 것뿐이었다.”/ “반 고흐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설교와도 같았다.”(<반 고흐, 삶을 그리다>, 라영환)

 

오스 기니스의 <인생>의 원래 제목인 “Long Journey Home”도 빈센트의 설교문에서 따왔다는 것도 누락된 것 같습니다.

 

 

개떡같이 전한 것을 성령께서 찰떡으로 만들어주신 것 다행이지만

아쉬움이 큰 설교입니다.

 

 

4.

 

설교 원고 중 보충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1) 현대 물리학의 시간관이 함의하고 있는 것 즉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나 원리상) 과거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그 과거가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는 판단은 존재론을 조금 공부한 저의 주장입니다(이러한 함의을 과학이론화한 것이 아마도 평행우주론인 것 같습니다).

 

(2) 성경의 시간관이 있지만 어떤 시간관이든지 기독교 신앙 속에 녹아들어 올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역시 제 주장입니다. 하지만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온 성경해석의 역사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독교 시간관은 현재론(presentism)입니다. 현대 과학의 시간관은 영원론(Eternalism)에 속합니다. 기독교 시간관 명칭이 영원론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은 현재론자입니다.

 

(3) 빌립보서가 써진 시기에 “100미터 달리기마라톤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거리 달리기장거리 달리기는 있었지만요. 마라톤을 언급한 것, 제유법 사용한 것으로 이해해주십시오.

 

 

 

5.

 

아침에 이메일 쓰다 보니

공개편지로 드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도사 시절이나

고부교회 시절이나

우리 교회 시절이나

저는 어눌하지만 행복한 설교자입니다.

빈센트는 탄광촌 교회에서 이런 행복을 못 누렸지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눈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단비같은 눈을 즐기시되 눈길은 조심하셔요.

 

목회자드림

 

 

[추신]

 

설교에서 제가 참고한 저의 자료입니다.

                            

http://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_01&wr_id=38713&p_id=twotalent

                                                          

http://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_01&wr_id=38716&p_id=twotalent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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