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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良心) [고린도전서 8, 10장]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8-02-05 (월) 10:57 6년전 2132  

 

작년인가

어떤 목사님(박사)께서

목회자들 대상으로 칸트의 양심론강의하실 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끝내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기본적인 질문이라서요.

 

우리말에는 좋을 량이 들어가 있어

가치 판단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 번역의 원어도 그런가가 궁금했습니다.

잘못된 판단을 양심이라고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제 고린도전서 말씀 준비하면서

저의 오랜 궁금증이 다소 풀렸습니다.

참고하시라고 인용해봅니다.

 

 

고전 헬라어나 헬레니즘 시기의 문헌들에서는 이 단어가 양심을 가리킨다. 라틴어 con-scientia와 마찬가지로, 헬라어 역시 함께또는 더불어”(-) “알기”(-에이데시스)을 나타낸다. 하지만 라틴어에서도 conscientia의식 혹은 공동의 증언혹은 양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언어에서 함께 아는행위는 인간의 인지 작용 중에서 자각적이고 자의식적인 부분, 곧 지성의 반응과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단어가 규칙적이고도 명시적으로 도덕적인 의미를 획득하여 선과 악에 대한 일종의 내적 재판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스토아철학에서다. 그러니까 스토아철학에서는 양심이 사실상 우리 속에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양심을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물론 대개의 경우 양심은 악한 행위에 대한 회한, 불편함 혹은 고통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바울이 이 양심을 실수 없는 안내자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9세기 후번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스토아주의적양심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55C.A.피어스는 바울의 양심 개념은 그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양심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는 행동이 이미 발생한 상황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해 고통을 부과한다. 하지만 바울이 양심을 미래의 행동에 대한 확실한 지침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보기에 양심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없었다. 고린도전서 8:1-13에서 바울의 의도는 약한 자들이 양심의 고통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1978년 홀슬리는 자각(self-awareness)이라는 번역을 제안했고, 이후의 연구들은 이 제안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우선, 신약보다는 스토아철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양심 개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새로운 번역은 바울의 표현을 이런 관념에서 떼어놓는 효과가 있다. 구약에는 양심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지만,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이 마음”(히브리어, 레브)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이는 한 존재의 내적 심층 혹은 강렬한 감정, 반성 혹은 자기기만의 능력을 지닌 인간의 자아를 가리킨다. 엑스타인은 바로 이것이 양심 혹은 자각으로 번역된 단어의 핵심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본문을 이렇게 읽으면 현재 문맥에서 드러나는 강한 자약한 자의 대조와 잘 어울린다. 강한 자는 매우 튼튼한 자의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자기 인식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식은 우상의 비현실성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약한 자의 자의식은 불안정하다.  


고린도전서(앤토니 C. 티슬턴 저, 권연경 역, S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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