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
http://tv.kakao.com/v/303592274
1.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접한 것은
몇 년 전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었지요’.
어제는 TV로 영화 <오두막>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제가 소설 <오두막>을 읽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책의 가치를 이제 알았으니까요.
아마 신정론 같은 주제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
소설 모드로 들어가지 않고 논문 대하는 태도로
대충 검토해본 것에 불과한 듯합니다.
당시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나
분주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2.
이 영화(소설)가 다루는 신학 주제들 가운데
천국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일종의 “천국 간증”인데요.
흔히 접하는 간증과,
소설과 영화 속 묘사와 설명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습니다.
간증에는 보고하는 진술의 참/거짓이라는 프레임이 처음부터 작동합니다.
보고되는 진술들의 관계나 함의까지 생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오래 묵은 적지 않은 난제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반면에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애초에 참/거짓 프레임을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차적으로 작동할 수는 있지만요.
저는 소설이나 영화의 형식이 이런 주제를 다루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저는 신앙적 주제의 일부가 희미하다는
청동거울 인식론(고전 13:12)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그런 주제는 순수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정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제 자신을 스스로 보여준다. 그것들은 신비로운 것이다”(『논리철학론』)라는 하였는데
칸트의 입장을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영역에서 확인해준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천국에 관한 정보를 간증의 형식으로 보고하는 것은
맞지 않는 그래픽 카드로 컴퓨터 모니터를 구동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화면이 깨지지요.
반면에 소설이나 영화로 이 주제를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조금 화면이 흐려도 깨지지 않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오두막> 소설이나 영화, 신앙 교육에 아주 적합한 교재입니다.
대중적인 영화는 더욱 그렇고요.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에서는
주일오후예배 때 교인들이 함께 보았다고 합니다.
의미로웠다는군요.
[추신]
1.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을 ‘보여주는’ 장르로 시(詩)를 언급합니다. <논리철학론>을 쓴 시절의 말이 아니고 입장이 변한 후기의 비망록에 적은 것이지만 인용한 말과 연결시켜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시와 소설과 영화는 참/거짓 프레임을 접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동류입니다.
2. 비트겐슈타인...
청년 시절 제가 부지불식간에 닮고자 했던 분입니다.
어설픈 흉내였지만요.
그런 저에게 곽강제교수님께서 비트겐슈타인 관련 번역서에 제 이름을 올려주신 것은
의미로운 선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