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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야섭

한신과 나, 세계와 선교, 제225호 기고문

배야섭 (광주노회,,목사) 2018-04-12 (목) 09:43 5년전 1887  

<世界宣敎> 225호 원고

 

한신과 나

 

배야섭 목사 / 가나안교회 공로목사

(한신 제15회 졸업 / 79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제가 한신에 들어가게 된 것은 선친이신 아버님의 권유였습니다. 그러기 전에 내 아버님이신 배상우 집사님과 우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내력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친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11일 새벽에 태어나셨고 전라남도 완도 고금도에 살고 계셨습니다. 열아홉 살 젊은 나이에 고금도에서 3.1 만세 운동에 가담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검거가 되고 법원으로 6개월 실형을 받고 난 다음 살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셨습니다. 그 이후 삶의 공점을 잃고 방황하다가 고금도에서 목포로 가는 연락선을 타셨는데 거기서 김아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K. Allen이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배 안에서 서투른 한국말로 복음을 전해 들었고 그 말씀이 뭔가 아버지의 가슴을 맺히셨던 것입니다. 그 만남 이후에 선교사님을 따라가 사택에서 이것저것을 도와주시면서 사셨지요! 함께 살면서 성경을 읽게 되고 복음을 보다 더 잘 알게 되었고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셨습니다. 부친은 자신이 살았던 고향에 복음이 들어가야 함을 역설하여 김아열 선교사님과 고금도에 함께 가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의 부친이신 할아버지는 전통적으로 유교풍토에서 자라신 분이라 도무지 서양 양귀자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갖은 박해를 하였습니다. 한 번은 수요예배를 드릴 때 교회 문을 쇠스랑으로 찍으면서 교회를 그만 둘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부친은 조부를 몰래몰래 피해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조부에 대해서 단 한마디라도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으신 참으로 온순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만일 그때 부친이 조부의 박해로 신앙생활을 끊으셨다면 우리 집안에 기독교가 지금 4대째 계속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아열 선교사님은 병이 들어 고금도를 떠나셨고 박해가 심해져서 도무지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강진 칠량으로 가셔서 8킬로미터 떨어진 강진읍교회에 다니시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부친은 제 손을 잡고 하루에 매일 왕복 약 40리를 다니시면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칠량에서 강진읍까지 너무 멀어서 안가려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저를 살살 얼려서 ! 야섭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안 가면 되겠느냐말씀하셔서 따라서 한참 다녔습니다.

 

부친은 결국 살던 처소인 칠량에 교회당을 세우셨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전답을 팔아 모친과 함께 흙벽돌로 집을 지어 거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인 1944년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교역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오늘날 한국기독교장로회 칠량교회입니다. 칠량교회를 집사로 섬기셨을 때 매일 새벽기도가 끝나면 추운 겨울에도 배상우 집사님은 둠벙(조그만 연못)에 들어가 아버님은 장남인 저를 위해 서원기도를 하셨습니다. “제 큰 아이가 주의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당시 신학교를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려 하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목포에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깡패짓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목포극장 건너편에 언덕받이에 YMCA가 있었는데 확성기 소리가 나서 가보았는데 프랑카드가 붙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는데 그때 내 속에는 복음의 씨앗이 남았는지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한 것이 가슴에 맺혔습니다. 당시 홍대위 목사님이라고 대구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인데 어떻게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지 꼭 내 죄를 지적하고 나는 멸망 받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흥회가 끝나고 안수기도를 해 준다고 해서 예배당 옆에 강단으로 들어가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집사의 아들이고 사회가 혼란하고 그래서 깡패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더니 내 머리에 안수를 하고 기도를 해 주시는데 바울이 다메섹에서 꺼꾸러진 것처럼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큰 종이 된 것처럼 이 아들도 그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해 주시는데 당시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뜨거워졌습니다. 그 이후로 깡패생활을 접고 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1952년이었고 그때는 한국전쟁이 나 있었을 때였습니다. 정확히 언제였냐면 맥아더 장군에 의해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전투가 약간 소강상태였을 때입니다. 원래 신학교 건물은 서울 동자동에서 있었는데 부산으로 피난하여 옮겨가 남부민동 언덕에 천막을 쳐놓고 그 천막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준 박사님, 김정준 박사님, 정대위 박사님, 이우정 교수님, 전경연 박사님, 문익환 교수님, 박봉랑 교수님, 서남동 교수님 등이 가르치셨습니다. 전경연 박사님 사모님도 가르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 저는 낮에는 피난막사에서 수업을 들었고 밤에는 밤새 부두에서 오후 여섯 시에 들어가서 새벽 여섯시까지 정대위 박사님이 신학생들을 소개해 주셔서 <CTS-Chosun Theological Seminary> 표식이 든 모자를 쓰고 검수원으로 일하였습니다. 밤을 새가면서 일하고 낮에는 공부하였는데 도무지 피곤해서 졸기가 일쑤였습니다. 전경연 박사님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강의를 하실 때 그 깊고 어려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할 때면 더욱 졸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피난 중에도 신학생들을 잘 가르치려는 열의는 대단하였습니다. 어쨌든 학교를 다닐 때 제대로 된 신학공부를 할 수 없었던 것은 가슴 속에 앙금으로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신학교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 저는 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학교의 사무총장인 박한진 목사님께서 한 교회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 교회는 전쟁 때 인민군들이 불질러 폐허가 된 광탄교회였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소재하였습니다. 교인도 없고 교회당도 없었는데 저는 그 교회를 복원시키는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장로교 전마태 선교사님이 경기노회 지역의 담당이었습니다. 당시 경기노회는 경기지역 서울지역 그리고 충북과 강원을 포함하는 대단히 큰 노회였습니다. 저를 소개하여 신학교를 다니면서 토요일에는 그곳으로 가서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하였고 나중에 경기노회 시취를 받아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광탄 지역에는 육군공병대 대대가 주둔하였고 대대에는 미 육군 군목이 계셨습니다. 그 군목이 광탄교회 재건을 도와주었고 그 미군부대에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중에 신항순 집사 부부가 충성스럽게 광탄교회를 섬겨 무럭무럭 성장하여 100 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신항순 집사는 나중에 춘천교동교회의 장로가 되어 섬겼습니다. 그 교회를 섬길 때 최희섭 전도사는 약 5~6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교회전도사로 일하였습니다. 기장과 예장이 1953년 나누어졌을 때 저는 광탄교회를 기장으로 만들었고 최희섭 전도사가 섬기는 교회는 예장통합으로 갔습니다. 그때 전마태 선교사는 저를 열심히 설득하여 광탄교회를 예장으로 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기장으로 남게 하여 내가 그토록 너와 고아탄교회를 도와주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섭섭하게 여겼던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저는 교회당 건물을 세우고 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교회를 세울 때 미군 공병대대에서 목재 세멘트 건축자재를 대주었고 우리 교인들이 목수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집은 참으로 빠른 시간에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당시 그 지역 시찰장으로 있었던 유학로 목사님이 시찰장으로서 사회를 하고 박한진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고 함태영 부통령께서 오셔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 교회를 오실 때는 연도에 많은 주민들이 나랏님이 오셨다고 엎드려서 오시는 것을 맞이하였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 졸업을 19563 15일에 하였습니다. 당시 함태영 목사님은 학장이셨고 동시에 나라의 부통령이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함태영 목사님에게 부통령 제의를 하였을 때 나는 학장을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학장을 하면서 부통령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셔서 두 중책을 감당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함 목사님은 졸업식에서 너희들은 소가 되라!” 는 제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는 살아서는 밭과 논을 갈아 주인을 위하여 충성하고 죽어서는 고기가 되어 주인에게 음식을 주고 건강을 주듯이 그리고 소의 모든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쓰여지듯이 여러분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소가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일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아직도 제 가슴에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광탄교회를 섬긴 이후 군목으로 가서 28년간 섬겼습니다. 군목으로 일할 때 그런 꿈을 가졌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에 김용기 장로님처럼 가나안농군학교와 같은 것을 세워 봉사해야지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군목으로 일하는 동안 월남 종군군목으로 일하여 얻어진 돈을 가나안농군학교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땅을 구입하였습니다. 당시는 한 평당 2700 원 하였습니다. 그 땅이 전역을 하자 광주시 도시계획에 포함하여 땅값이 많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수백배 수천배가 올랐습니다. 그 땅은 은총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 어떻게 사용할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생각도 했습니다. 그 땅으로 노후를 평안하게 풍족하게 살까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시련이 왔습니다. 땅의 3 분의 2를 잃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시련 가운데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게 니꺼냐 내꺼지!” 그런 음성을 듣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쓰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쓸까?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생각하는 중에 제 자신이 신학을 공부할 때 무척 어려웠던 과거를 더듬었습니다. 그래 공부를 하고 싶어도 신학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도록 하자! 그래서 당시 한신대학교 총장이었던 주재용 목사님에게 한신대 신대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도록 하겠다 하자 주 총장님은 그것보다도 <교회와 신학연구소> 건물을 짓도록 하자는 제안을 받아 그 당시 돈으로 2 억원을 기증하였습니다. 그 돈이 기반이 되어 한신대 신대원에 <효촌관>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효촌관이 세워졌지만 실질적으로 신학생들에게 혜택이 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어떻게 나와 같은 처지의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을까 궁리를 하였습니다. 군에서 전역을 한 이후에 하나님껫 주신 땅에 개척교회를 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 가나안교회입니다. 가나안교회에 당시 땅 3분의 11800 평을 바치면서 교회당 용도의 땅과 신학생 장학금을 위한 땅을 분리하여 공증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효촌장학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 가나안 교회는 매년 헌금수입의 10 분의 1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장학금으로 내놓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의해서 지금까지 올해 2016년까지 일곱 차례 매년 효촌장학금을 수여해왔습니다. 이를 위해 수고해 준 역대 한신 신대원장님과 연규홍 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은총의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들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일꾼들에게 바치려고 아내와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더 많은 신학생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신학생들이 신학공부에 매진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저와 아들 배태진 목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책과 자료들을 기증하고자 하는 의사를 신대원측에 전달하였을 때 당시 채수일 총장님께서 받아 효촌애서당과 효촌서당을 만들어 주셔서 신학생들이 책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약 2만권을 기증하였지만 앞으로 오만권을 기증할 계획을 가지고 꾸준히 책을 기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신대학교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장준하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같으신 분들이 타신 명예로운 한신상을 수여해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 준 이 지면을 빌어서 채수일 총장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효촌관과 효촌장학금과 효촌 애서당과 효촌서당이 더 자주 애용되고 신학생들에게 유용하게 되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한이 조금이라도 씻겨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제 나이 올해로 여든 여섯입니다. 이제 주님 앞으로 가게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주님 앞에 가기 전에 저의 모교 한신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그리고 우리 교단이 무척 잘되기를 바랍니다. 우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섭리의 교단입니다. 저는 그런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신이 잘되면 우리 기장이 잘되고 우리 기장이 잘되면 우리나라도 잘되고 우리나라가 잘되면 이 세상도 잘된다는 소신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한신이 잘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신이 좋은 인재를 역사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재와 주님의 나라의 지평을 넓히는 양질의 목회자들을 더욱 많이 배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단지 바램만이 아니라 위해서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늘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은총의 하나님 주님의 섭리의 학교,

한신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위에

복내려 주셔서 이 땅을 복되게 하고

이 땅을 주님의 땅이 되게 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하게 하소서!

우리 기장 위에 복내려 주시고

기장이 이 나라와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누룩이 되어

변화시켜 나가게 하소서!

우리 기장과 한신으로 인해

이 나라가 보다 소망차게

바람직하게 변화되게 하옵소서!”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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