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속에는 다수가 가는 길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찾는 음식점을 선호하고 누적 관객 수가 높은 영화를 쉽게 선택합니다. 또 옳고 그름이나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할 때에도 소신이 없으면 다수를 따르려 합니다. 초행의 등산로를 선택 할 때도 혼자 가고 있으면 한없이 불안하지만, 다수가 가는 길이라면 마음이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역사의 선택에는 늘 다수가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 중 다수인 열 명보다 소수인 두 명이 더 옳은 보고를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반면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보호하고 양성했습니다. 죄에 빠진 이스라엘에 3년6개월의 기근이 계속되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야선지자는 갈멜산에서 1:450으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이며 “너희가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21절)고 백성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도열한 450명의 바알선지자들은 기품과 권위가 돋보였지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왠지 초라해보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다수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담대하게 촉구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수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기가 죽기 마련이지만, 엘리야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강심장이거나 기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홀로 된 엘리야 옆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백성들과 바알 제사장들 앞에서 엘리야가 기죽지 않고 담대하게 선포하도록 힘을 주시고 붙잡아 주셨습니다.
엘리야를 붙드신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분별력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분별력을 회복시켜주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지만, 분별력없는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고통스런 죽임을 당하십니다. 분별은 숫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분별은 나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현대인들은 다수의 길을 선호지만 우리는 다수의 불의와 잘못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한 한인교회는 동성애자 결혼과 안수를 허용한 미국장로교회(PCUSA)를 탈퇴한 대가로 128억 상당의 예배당 건물을 포기했습니다. ‘동성애는 죄’라는 성경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외로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새해에는 다수의 추종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