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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말라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8-06-23 (토) 09:53 5년전 2369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말라

4:1~5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정답은호랑이와 사자는 싸우지 않는다.”입니다. 왜일까요? 서로 싸우면 둘 다 죽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지긋이 눈을 감고 엎드려 있으면 사자가 멀찍이 돌아가고 사자가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면 호랑이가 멀찍이 피해간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동양에서 백수의 왕으로 통하는 동물이고 사자는 서양에서 맹수의 왕으로 통하는 동물입니다. 서로가 싸움을 피해감으로 싸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67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남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호랑이와 사자처럼 서로 싸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살면서 남북한이 서로 전쟁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를 방어하기 위하여 한국을 전략기지로 삼고자 하며 또한 세계에서 무기수출 1위 국가로 삼고 있습니다. 중국은 북한에 있는 무수한 자원을 빼내가고 있으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조국의 근대사를 보면 고난의 연속이며, 분열의 아픔을 가지고 있으며, 약소국가의 비애를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 문 특보가 미국에서 강의 가운데 북한이 핵을 중단하면 미국과 한국의 군사훈련을 축소하도록 미국과 의논할 수 있다고 해서 언론과 정치권에서 야단들 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미국은 북한과 비밀리의 접촉을 하면서 남북한이 자기 나라 자기 민족끼리 접촉하고 협상하며 전쟁을 막는 일을 해보겠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재발 된다는 상상을 해보면 정말 끔찍한 사건입니다. 6.25전쟁 3년 동안 세계 16개국의 젊은이 136만 명이 참전했습니다. 그 중에 41천명이 전사하고 16만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실종자가 600만 명, 이재민이 370만 명, 공산당에 학살되거나 납치된 사람이 20만 명, 전쟁고아가 10만 명, 이산가족이 천만 명입니다. 북한에도 더 많은 전사자와 실종자와 이산가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과거와 같은 재래식 무기로 하지 아니합니다. 현대화 된 무기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순식간에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남과 북이 함께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독일의 분단과 다릅니다. 독일은 동서독 간에 전쟁은 없었습니다. 동서독은 우리나라 남북관계처럼 증오와 살기가 가득 찬 적대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을 이루기까지 쉽지 아니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도 알지 못하게 동서독이 통일을 선포했습니다. 자기 민족의 문제는 자기들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이권이 개입되면서 전쟁 준비만 일삼고 있습니다. 군사력을 강화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며 무기 수입을 강요합니다. 무력 증강은 함께 파멸로 가는 길입니다. 북한이 핵을 만들면 남한은 신무기 구입을 서두르게 되고 미국의 핵을 남한에 배치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남북한의 대립과 무력 경쟁을 하루 속히 끝내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양쪽이 계속 무기를 증강하면 할수록 위험합니다. 이 무장을 해제해야 합니다. 6.25때는 500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제 전쟁이 나면 이 민족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옛날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통일이 되지 아니한다 해도 화해와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야합니다.

북한에는 인민은 병들과 굶주리고 있는데도 군사비만 증강하고 있습니다. 남한에는 복지향상을 위해서 써야 할 엄청난 돈이 군사비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칼을 갈고 있는 민족의 슬픈 현실입니다. 분단은 민족 주체성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에 종속되어 가고 있습니다. 서로 침략 당할 위험을 안고 있고, 강대국에 의존하여 군사원조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북은 중국과 러시아에 붙어서 간을 빼주고 있고 또 남한은 미국을 의존하여 미국으로부터 무기수출 세계 1위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밥을 먹고 살고 있지만 이 민족은 양쪽이 다 주체성이 없습니다. 분단은 민족 양심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정치와 이념 때문에 자기 동족을 죽이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 민족의 양심이 어디에서 무너진 줄 아십니까? 바로 이 분단의 구조 때문입니다. 6. 25의 전쟁은 동족 수백 만 명을 죽이고도 양심에 가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쟁에는 양심이 없습니다. 칼을 가는 자는 이미 양심을 버린 것입니다.

1974, 임마누엘 동산 수유리 한신대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우들이 간첩으로 체포되어 3~4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살아오다가 바로 지난 5, 42년 만에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있습니다.

197210월에 유신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제가 1974년도에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여 한국 신학대학교에서 수업할 때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학내시위가 날마다 치열했습니다. 결국 1974년 봄에 유신정권은 학생시위가 가장 치열했던 한신대학과 고려대학에 휴업령(休業令)과 휴교령을 내렸고, 학생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된 한신대 안병무, 문동환 교수를 해임시켰습니다.

19744월에 유신정권의 위기가 왔을 때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발표했습니다. 유신 철폐 민주화 학생운동이 북괴의 간첩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관련자들에게 사형과 무기형이 선고되기까지 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유신정권의 필요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었음이 드러났고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74815일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발생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거칠게 일어나면서, 1975년에 유신정권이 조작해서 만들었던 사건이 전국조직망을 가진 재일동포 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됐습니다.

유신정권은 한신대, 서울대, 고려대, 가톨릭대, 외국어대, 부산대학 등에 유학 온 재일동포학생들을 모두 하나로 엮어서 거대한 간첩조직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번지는 유신철폐 민주화 학생운동의 배후에 바로 북한 간첩들이 있었다고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학생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에 한신대에서는 일본에서 유학 온 김철현씨가 포섭되어 한신대에서는 김명수 전병생 라도현 세 명의 학생이 간첩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지금은 김명수는 부산신대에서 교수로 은퇴했고, 전병생은 익산노회 목사로, 라도현은 대전노회에서 목사로 섬겼습니다. 이 세 분의 목사님들이 지난 달 42년 만에 간첩죄에서 무죄로 확정을 받았습니다.

19751122, 김기춘 중앙정보부 국장은 소위재일동포 학생 간첩단 사건신문지상에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남을 억울하게 희생시켰던 김기춘씨는 계속해서 권력에 아부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서 역사적 심판을 받고 있고 그에게 억울하게 간첩죄로 누명을 쓰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두 무죄로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분단의 비극이 얼마나 우리 역사에 슬픈 역사를 만들어 왔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고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양심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분열되는 곳에는 양심은 마비됩니다. 서로 갈라지고 서로 적대시하면 어떤 악을 가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서로 막말하고 폭로하고 모함하는 정치권에 무슨 양심을 말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분열하면 이성도 양심도 마비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북분단은 엄청난 비극의 역사를 살아오게 만들었습니다. 분단된 상황에서 남한에서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북한은 지금도 무자비하게 인권을 탄압하고 사람을 살생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는 길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통일입니다. 전쟁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남북한의 평화와 통일의 꽃이 필 것 같은 때도 있었습니다. 남북관계가 대화와 화해를 통하여 남북 간에 육로가 개통되고, 철로가 개통되고, 개성공단이 세워지고, 금강산을 관광하고, 백두산 관광을 눈앞에 두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바뀐 다음 다시 남북관계는 냉전체제로 회귀하여 육로와 철로가 막히고 개성공단도 철수하고 북한은 핵개발에 더욱 열을 올리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되지 아니할까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냉전체제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그 비참하고 기억하기도 싫은 6.25전쟁의 참상이 또다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지 않을까하는 불안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기도해야할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미가서에서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4:3).

하나님, 저 흉악한 칼과 창을 녹여서 전쟁도구가 아니라 농기구로 만들게 하옵소서. 서로 민족의 가슴을 향한 전쟁무기를 녹여서 농사짓는 도구로 사용하게 하옵소서.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는 나라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전쟁의 원인인 칼을 없애 주십시오. 창도 없애 주십시오. 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게 해주십시오. 북한의 핵을 녹여 주십시오. 북한이 위협을 느낀다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도 녹여 주십시오.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꽃을 피우게 해주십시오. 화해케 하시고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지금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열을 회개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특별히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막힌 담을 헐어야 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아직도 그 가운데 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가 되면 그 벽으로 몰려와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율법을 낭독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 벽을 이름 하여 통곡의 벽이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곡의 벽 앞에서 통곡하는 그 순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벽 뒤쪽에서 알라 신에게 기도하며 통곡합니다. 한쪽에는 야웨 하나님을 부르면서 통곡하고, 다른 쪽에서는 알라 신을 부르면서 통곡합니다. 통곡의 벽이 예루살렘을 동서로 나누고 있는 한 그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유는 통곡 때문이 아니라 막혀진 벽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화운동은 막힌 담을 허신 일입니다. 원수된 것,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2:13~14).

예수님의 평화는 바로 벽을 허물라는 것입니다. 벽이 있는 한 평화는 없습니다. 막힌 담이 벽입니다. 칼이 벽입니다. 창이 벽입니다. 전쟁무기기와 핵이 벽입니다.

무력 증강은 두꺼운 벽입니다. 막힌 벽을 헐어야 평화가 시작됩니다. 남과 북 사이에 얼마나 많은 벽이, 얼마나 튼튼한 벽이 철조망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안보라는 이름으로, 평화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우리를 갈라놓고 벽을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6.25 기념 주일에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벽을 무너뜨리어야 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6. 25와 같은 전쟁의 비극은 없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6. 25를 화해의 날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화해를 만들어 가자는 말입니다. 전쟁이 없는 미래를 위하여 이제부터는 화해를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 가자는 말입니다. 6. 25는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는 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벽이 있는 한 우리한테는 괴로움만 있습니다. 통곡만 있습니다. 좌절만 있습니다. 분노만 있습니다. 전쟁만 있습니다. 피차 망하는 길만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벽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내가 주는 평화는 다르다.”어떻게 다릅니까?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항상 벽을 만드는 평화입니다.

대규모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통해서 북한과 중국이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면 중국과 북한은 또 다른 무력 증강을 하게 됩니다. 막힌 담은 더욱 높아져만 갈 것입니다. 강대국들은 항상 안보를 강조합니다. 군사력을 키우고 무력증강을 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강대국들의 군수산업은 발전합니다. 모든 강대국들의 논리는 유사합니다. 군사력을 강화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더욱 강력한 무력을 증강시켜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점점 더욱 막힌 담을 높이 쌓는 것입니다. 거짓된 평화입니다. 더 크게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중간에 막힌 담, 벽을 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갈등, 벽을 두면 노사 간의 평화는 없습니다. 지도층과 국민 사이에 불신하는 벽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 나라에 평화는 없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자존심을 앞세우고 서로 증오와 분노라는 벽이 있는 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가정 속에도 벽이 생기면 화평은 없습니다. 벽이 있는 한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6. 25주일로부터 벽을 무너뜨리는 일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벽은 국가적인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벽, 마음속에 막힌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벽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에 평안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평안치 않은데 어떻게 행복이 있고 평화의 나라를 만들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벽이 있는데 어떻게 평화로운 교회와 사회를 만들겠습니까?

오늘아침 먼저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자식과 부모 사이에 벽이 있으면 평화는 없습니다.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벽이 있으면 하늘의 기쁨과 평화와 축복은 없습니다. 벽을 허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벽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벽을 만들어 내는 사람,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역행하는 자입니다. 미움과 불신과 분열의 벽을 회개하고 장벽을 허무는 아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은 막힌 담을 헐어야 할 때입니다. 남북 간에 막힌 담이 헐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막힌 담을 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막힌 담을 헐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막힌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철천지원수처럼 살아오던 막힌 담도 모두 헐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피는 막힌 담을 허시고 사랑으로 통하게 하셨습니다.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은 서로 통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을 화해라 이름 합니다. 화해는 다름 아니라 벽을 허무는 겁니다. 벽을 허물어야 평화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통곡이 사라지고 기쁨과 희망이 있습니다. 벽을 허물면 미움과 분노와 갈등과 분열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안과 축복이 옵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담을 허물어지는 아침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남북 간에 막힌 담을 어떻게 허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전쟁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이지 못할 담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헐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못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막힌 담을 헐고, 성도가 행복해지고, 가정

이 평화롭고, 남북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통일을 만들

어 가도록 깨어서 기도하시며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시는 복된 성

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7.6.25.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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