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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와 평화통일의 길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08-05 (일) 07:28 9일전 35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와 평화 통일의 길

아모스 5:4-15, 21-24, 9:11-15

201885

 

시작의 이야기

한반도 분단이 73년이 된 상황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분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통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단에서부터 통일을 지향하는 길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성서 속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과 아담 즉 인간의 관계가 분단’(분열)되었다는 것이 원죄였습니다. 인간이 지은 첫 죄의 행동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단(깨어진 관계)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분단은 죄의 결과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분단,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단은 곧 죄라고 정리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 이상으로 관계가 단절된 상태인데 분단 상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한민족공동체가 분단되어 73년이나 되었고, 모처럼 분단을 넘어서 통일에로 나가도록 새 출발을 한 것입니다.

성서에는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意志)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과 유대가 분단의 역사를 계속하고 있을 때, 유대와 이스라엘의 통일에 대하여 에스겔 37:15-28에 나타나 있습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당했던 것과 비슷한 운명을 유대도 주전 587/586년에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왕국의 회복을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은 두 나라의 통일을 포함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간의 종교 분쟁이 지속되었지만, 이 약속은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어느 정도는 이루어졌습니다. 신약성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구성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는 분단은 죄 된 상황이며, 이를 극복시켜서 통일된 이스라엘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에스겔은 통일 왕국(2:3설명)을 뜻할 때 종종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분단의 죄는 곧, 첫째, 우상숭배, 둘째, 가증한 물건으로 더럽혀 짐을 말하며 이는 모든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분단의 처소는, 다시 말해서 분단의 상황(Situation of Division and Separation)은 곧 범죄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정결케 하여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다시 정립된 상태, 즉 통일된 상태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와 평화통일의 길에 대해서 상고해보겠습니다.

 

2. 폭풍전야의 고요함

구약성서를 크게 3등분하면 율법서,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로 나뉩니다. 예언서는 또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분되는데, 전기예언서는 나단, 미가야, 엘리야, 엘리사 등 여러 예언자들이 왕국시대에 활동한 것을 다루지만 이들 예언자들의 활동은 역사 서술 중의 한 예로 등장할 뿐 그들의 이름으로 된 예언집이 따로 보존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의 3대 예언서와 12소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예언자의 이름으로 된 예언집이 남아있습니다. 대선지와 소선지의 구분은 그 수집된 예언 신탁의 길이에 따라 정해진 것이지 예언자 자체 가치의 비중을 가늠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들 후기 예언자들의 첫 번째 책이 아모스서입니다. 아모스로부터 시작된 문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모스(정의)와 호세아(사랑) 두 예언자를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이해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모두 북왕국 수도 사마리아 성에서 북왕국이 패망하기 직전 활동하던 예언자들입니다. 주전 8세기 중엽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상황은 이름 그대로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습니다. 아모스 11절에 의하면 남왕국 유대의 임금은 요시아(783-742)이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은 여로보암 2(786-746)이었습

 

 

니다. 여로보암 2세는 그 때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활용하여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오랜만에 찾아온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정치적인 안정은 이웃 간의 교역 증대로 경제가 급성장하게 되고 경제발전은 신흥 상업 계급의 출현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들 벼락부자들은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지으며 또 상아로 만든 침대를 사용할 정도로 극심한 사치를 누리게 되었으며, 정경유착으로 맺어진 비리는 사법계와 종교계에까지 법의 준수를 약화시켰으며 또 이방인들을 많이 흡수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계약 공동체의 유대의식을 약화시켜 국가지상주의로 전환되면서 야훼 종교가 명맥만 국가 종교일 뿐 가나안 풍요제의에 밀려 혼합종교화 되었습니다(브라이트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아모스는 주전 760년경에 예언활동을 시작하여 약 1년간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로보암 2세는 약 50년에 걸쳐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앞으로 닥쳐 올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고 번영을 누리는 상태가 영원토록 계속되리라 믿었습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건강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부()는 공정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두 계급으로 나뉜 사회였습니다.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는 것을 면하려고 부자에게 부득이 돈을 꾸어 그것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였을 경우 그들은 가옥과 전답을 몰수당하고 아들 딸들은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국가의 토지는 소수의 소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유한 지주들은 그들의 저택들을 도시에 세우고 사치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과 노예들은 비참한 상태에서 생명 유지를 위해 죽도록 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제도와 종교에 대해서 반기를 들기 위하여 아모스는 일어났습니다. 드고아의 불모(不毛)의 고지(高地)에서 양을 치고 뽕나무를 가꾸던 아모스는 가난한 자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아모스가 도시에서 부자들의 불의와 사치한 생활을 보지 않았다면 예언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너무나 심함을 보게 될 때에 그의 심중에 깊은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모스는 히브리인들 가운데서 의롭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소수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악의 모든 영향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을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고독하게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솔직한 마음과 양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묵상을 하였고 동족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깊이 반성했습니다. 아모스는 빈곤을 보았고 부자들의 포학(暴虐)과 정치인들의 불의와 종교인들의 타락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3. 아모스는 누구인가?

아모스는 어떻게 그 시대의 아들로서 시대의 흐름에 물들거나 체념하지 않고 다른 인식을 하여 생명을 내걸고 투쟁할 수 있었는가? 아모스의 비판과 저항에 대해 권력자 편에서 대변자 역할을 하는 사제 아마샤가 추방명령을 내리면서 유대지방에 가서 직업적 예언자 노릇이나 하면서 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했을 때 아모스는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그는 직업적 예언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회에 예언자를 직업적으로 양성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종교 귀족이나 왕권에 의해 인정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 예언자 군에 의해 인정받은 자도 아닙니다. 그는 어떤 자격을 밖으로부터 인정받았거나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는 목동이며 농부였습니다. 아모스는 기존 체제에서 부여하는 어떤 자격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 주님은 나에게 명하셨다. 가라!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라!”(아모스7:14-15).

그 무엇이 아모스를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했고 그의 삶을 급선회하게 했는가? 야훼가 그를 사로잡고 혁명적 전환을 하게 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삶의 전환은 백성들의 아우성, 그 원한의 소리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의 이전 선구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모세라는 목동이 미디안 광야에서 조용히 묻혀 살 때 갑작스레 벼락이 그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나무에 불붙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가슴에 점화된 불이었습니다. 망각했던 애굽의 자기 민족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 비명소리와 야훼 하나님의 가라는 명령은 동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아모스에게도 일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해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고, 내일이나 모레로 미뤄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아모스3:8). 그는 비참한 백성들의 울부짖음, 그것은 사자후와도 같았습니다. 그 뜻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그 이빨에 찢겨 죽을 수 있는 그런 절박한 것입니다. 아모스는 썩은 지배층을 향해서 하나님 심판을 대언했습니다.

아모스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거짓 평화, 거짓 종교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바로 정의를 올바로 수립하는 일입니다.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해라!”(아모스5:24). 이것이 없는 평화는 기만인 것입니다. 모든 제사를 거부하면서 바로 정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합니다. 정의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아모스5:24)고 선언합니다.

4. 희망을 살리라! -Keep Hope Alive!

미국의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함께 민권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제시 잭슨 목사가 지난 주간(724-27) 한국을 방문해 판문점, DMZ를 방문했고 좌담회에서 경제 민주화 희망을 살리라!(Keep Hope Alive!)” 강연을 했는데 그 요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오늘날 세계는 경제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자본은 세계화하였지만, 인권신장에 대한 부분은 자본주의만큼 확장시키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와 여성, 어린이의 권리 그리고 성소수자 공동체와 녹색인권에 대한 권리가 아직 구현되지 못한 상황에 있습니다. 특히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이주민과 난민들이 그러합니다. 전 세계에 이주민/난민들은 전쟁 중인 고국을 탈출하여 안전하고 안보가 보장되는 것을 찾아 떠돌고 있습니다. 이는 65년 전 한국전쟁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당시 전쟁을 피해 안전한 장소로 피난 가던 우리 한국과 유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혐오와 폭력, 억압의 물결은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나타나고 최근 예멘 난민 문제에 직면한 한국에서도 외국인 혐오와 반이민의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되물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일보다는 맑은 영으로 바른 일을 해나가는 것, 즉 세상의 약자, 소수자를 위해 일해 나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폭력의 상징이 아닌 자비와 양선 그리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세상을 도와야 합니다. 종교적 교리의 경계를 넘어 공동체를 향해, 상생(相生)을 행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에이즈와 암에 대한 치료법을 찾고 세계평화를 위해 비핵화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삶의 조건과 상황에 대해 지속적인 대화를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대량살상무기를 평화와 치유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스템(System)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반도는 역사적 변화의 중대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번영과 통일을 성취하는 과정이며, 한반도가 평화의 땅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전협정 이후 65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전쟁은 끝내고, 평화 협정으로 갈 때입니다. 냉전시대를 끝내고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함께 그려나가야 할 때입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를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또한 북미관계를 정상화시켜 나갈 것이며, 한반도를 평화로 화해로 이끄는 일이 바로 희망입니다. 희망은 서로 적대적인 행동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며, 미국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대북제재를 해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용기와 확신 그리고 도덕적 양심을 지키며 평화를 이야기하고 궤멸이 아닌 상호교류와 상생을 위한 선택을 할 것입니다.

한반도에 치유와 상생의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를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한국전쟁 중 4백만 명의 한국인이 사망했습니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베트남 전쟁의 사망자 수를 초과했으며, 1천만 명 이상의 가족이 생이별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흘린 피와 눈물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평화의 기운이 가득한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이제 평화를 위한 시간 카이로스의 때가 되었습니다.

잭슨 목사는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볼 때,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반전

 

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말했듯, “도덕적 보편을 이루는 과정은 지난하지만, 그것은 늘 정의를 향한다는 진실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4. 정의 수립은 통일에의 길

주목해야 할 큰 대목은 아모스가 유대지방(나라) 사람이면서 왜 북왕국 이스라엘에 와서 고난을 받으며 예언활동을 했나 하는 사실입니다. 32절에 이스라엘에 대한 중대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만을 골라냈다는 사실입니다. 아모스는 분열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분열 이전의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야곱의 후예로 본다든지 둘째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밝히며 셋째, 광야 40년을 언급하는 것이 모두 분단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아모스도 모든 불의의 원흉을 분단 상황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통일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노예, 기층 민중)에 의해 세워진 종족 공동체의 본산이며 적어도 200년 동안 오직 야훼만이라는 기치를 들어 밖으로 군주제국과 대결하며, 안으로 군주국(군국주의)을 만들려는 유혹과 싸웠습니다. 그것은 백성()에 의해 이룩된 진정한 민주사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유대지방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을 공략해서 이스라엘 군주국을 세운 것입니다. 통일 이스라엘 국이 형성된 것은 강대국을 이루는 데 큰 전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조는 통치정책으로 분열 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에 와서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정치, 종교 할 것 없이 모든 고급관료는 유대지방 사람들만 채용하고 북이스라엘 전통을 철저히 봉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남북은 분단국의 비운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분단 200여 년 남과 북의 어느 하나도 독립국의 구실을 못하고 계속되는 외세의 침범 아래서 반식민지 생활을 해야 했는데도 지배층은 오히려 그 분단 아래서 얻은 부귀영화에 도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배층에게는 통일에의 노력도 없었습니다. 아모스가 유대지방 사람이면서 북이스라엘 중심에 가서 정의(正義)를 주장하며 왕후장상들 앞에서 최후심판을 경고하면서 예언자 활동을 맹렬하게 편 것이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의미심장합니다. 사실상 그 같은 잔인할 정도의 저주를 퍼붓고 어떤 몸부림을 쳐도 멸망을 피할 길이 없으리라는 아모스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부서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틈이 벌어진 성벽을 수축하고 허물어진 터를 다시 세워 옛 모습을 되찾아 주리라. 에돔에 남은 백성뿐 아니라 내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게 하리라.산에서는 햇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무르익은 곡식이 물결치리라. 내 백성 이스라엘의 국운을 이렇게 회복시켜 주면 저들은 쑥밭이 된 성읍들을 다시 일으켜 그 안에 살며 제 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 마시고 제 손으로 가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 먹게 되리라너희의 하느님 야훼의 말씀이시다”(공동번역, 아모스9:11-15).

아모스는 통일된 내일을 예고합니다. 그것은 다 무너진 다음에 세워질 나라, 왕후장상이 허물어진 궁전을 짓거나 종교귀족들이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제 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 마시고 제 손으로 가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 먹게 될그런 새 날 즉 백성의 날 통일된 이스라엘이 결국 회생할 것을 내다 본 것이라 하겠습니다.

 

5. 아모스의 의()는 우주적 의()

아모스의 하나님은 ()의 하나님입니다. 아모스가 그 당시에 사회적 경제적 불의(不義)와 부정(不正)을 직접 목격했을 때에 야훼의 의()에 대한 의의(意義)가 명백하게 되었습니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불의는 양립(兩立)할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가 강조하는 점은 야훼의 요구하시는 의는 우주적(Universal Justice)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도덕률(道德律)이 모든 사건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어떤 민족이든지,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 도덕률에 대해서 취한 태도에 대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야훼의 공법(公法)은 냉혹(冷酷)한 것이며 어떤 개인이나 민족일지라도 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아모스 이전에는 야훼는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은 각각 그 민족 자신의 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훼의 통치권을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었으며 자기 통치권 밖에 있는 민족에 대해서는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 사상(思想)에 반기를 들고 종교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고대의 다른 종교와 같이 아모스 이전의 이스라엘 종교는 민족적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전 세계 모든 민족 위에까지 확장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파이퍼-R. H. Pfeiffer, 구약성서 입문p.580) 아모스에 의하면 야훼는 어디까지나 윤리적 존재이시며 이스라엘과 열방의 도덕적 지배자이었습니다. 아모스의 유일신관(唯一神觀, Monotheism)은 이 도덕적 원리의 기초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에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유일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윤리적 유일신관(倫理的 唯一神觀, Ethical Monotheism)이며 아모스는 그 첫째 대표자입니다. 히브리 종교에 있어서 유일신관의 확립에는 아모스의 노력이 크다 하겠습니다.

6. 한반도 분단 역사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지하는 바,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의해서 미국과 일본이 서로 약속을 하고서 필리핀과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로 했던 1905년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은 일본과 미국의 이익을 옹호하고 한반도의 반식민, 자주, 독립의 노선을 저지시키는 기능을 했던 선교사 신학들이 상당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주권상실, 분단주권의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과 일본과 더불어 책임이 있으며, 일부 신학자들과 일부 선교사들은 분단고착화적인 신학을 전개해 나갔었고, 이에 따라서 제국지배형의 신학을 통해서 세계질서를 유지하도록 가능했던 점을 역사적으로 분석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우상숭배로부터(노예 신분) 출애굽 해방을 갖게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우상숭배로부터 이스라엘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을 주신 분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되,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적, 자주적, 독립적인 통일지향의 길(과정)을 일깨워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통일을 향한 길, 과정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선교(Missio Dei)이며, 출애굽의 역사와 민족해방과 민족 구원의 선교입니다. 한반도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민족통일로 나아가는 길은 바로 히브리(노예)들의 해방의 소식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아담의 분단을 극복할 것이며,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살아계시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한국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개신교회는 이념적 문제와 신학적 문제로 이른바 보수진보’, 복음주의(Evengelical)와 에큐메니컬(Ecumenical)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난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10차 부산총회를 둘러싸고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심각한 찬반 논쟁을 통해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분열상이 전 세계 교회 앞에서 적나라하게 노출된 데서 잘 증명됩니다.

그렇다면 통일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진보 진영과 선교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보수, 양 진영이 하나로 연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에큐메니컬의 반대말은 복음주의가 아니고, ‘분파주의혹은 당파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에 주목합니다. 참된 의미의 에큐메니컬은 철저한 에반젤리컬이고, 반대로 참된 의미의 에반젤리컬에큐메니컬가치들을 추구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컬 대 복음주의의 잘못된 이분법적 도식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에큐메니컬 가치(價値)일 뿐 아니라 복음적 이상(理想)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보수적 교회들과 진보적 교회들이 정의로운 평화라는 공동의 목적지를 향한 여정에서 함께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기독교 사상2018.7)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통일운동과 민족공동체의 사회 경제 체제에 어떻게 참여하며 기여할 수 있을까를 위해 맑은 양심과 정성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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