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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8-08-14 (화) 05:23 5년전 330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 25-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자기선언의 5번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적이요,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생명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사람도 없었고 순교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독교의 부활신앙입니다. 세계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24억의 인구가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선언하신 말씀을 보면 그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이 설명되고 있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과 연관이 되고,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을 주님이 고쳐주신 사건과 연관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과 관련되어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가운데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나사로가 죽은 장례식장의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갑작스러운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엄청난 고통과 충격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5).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슬프게 만듭니다.

사람이 죽을 때 아는 것 3가지가 있고 죽을 때 까지 모르는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죽을 때 아는 것 세 가지는 첫째, 사람은 한번은 꼭 죽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죽을 때는 아무도 같이 가지 못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셋째,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 세 가지는 첫째, 언제 죽을지를 모릅니다. 둘째, 어디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셋째,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박사는 약 200명의 죽어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서 죽음의 단계에 관해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당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 이제 당신은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처음에는 부정의 단계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럴 리가 없으니 다시 한 번 검사해보라고 부정하거나 당신이 의사가 맞냐?”고 소리치며 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분노의 단계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난 더 오래 살고 싶습니다.”희망이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는 단계입니다. 이때는 누구와도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째 단계는 타협의 단계입니다. 다시 한 번 건강과 생명이 주어진다면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노라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노라고 하나님과 타협하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도 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빌기도 하게 된다고도 합니. 네 번째로 우울의 단계입니다. 죽음을 직감하면서 허무함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취해온 모든 것, 맺어온 모든 관계를 이제는 전부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낙담하여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죽음 앞에 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이제는 정말 죽는구나.”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고 약간의 평온의 시기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단계를 지날 때 비로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남은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고 합니다. 죽음은 아무리 포장한다 해도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말은 이 땅에 사는 생명체에게 가장 큰 슬픔이요 절망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은 날마다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처럼, 그림자처럼 우리들을 따라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죽음이 문 앞에서 노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공동묘지에 이색적인 공고를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1115일부터 겨울 3개월간 문을 닫겠사오니 그 사이에 죽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그러자 그 마을의 목사는 다음 주일 설교 제목을 교회 게시판에 즉시 써붙였습니다. “죽음에는 휴일이 없습니다.”(Death takes no holiday) 그렇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은 사람들 앞에 성큼 성큼 다가옵니다. 죽음은 아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병을 잘 고치는 세계적인 명의라도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힘이 센 씨름선수라도 자기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넘어트리고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총을 잘 쏘는 명사수라도 자기 앞에 오는 죽음을 명중시키고 막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해갈 자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 값으로 찾아온 죽음을 아무도 피해갈 자가 없습니다. 죄 값으로 찾아오는 죽음 뒤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권력의 힘을 가지고 재력의 힘을 가지고 재능의 힘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대신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부모가 대신갈 수 없고 위대한 스승이나 통치자의 죽음을 대신 갈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이 온다는 것을 안다면 교통사고나 불의 사고로 죽는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질병으로 오는 죽음도 미리 알고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예방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죽음은 반드시 젊은 사람에게는 건너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언제 올지 모릅니다.죽음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빈손 들고 태어나서 마지막에는 모두가 빈손 들고 가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예금통장 금은보화 빌딩의 소유권을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빈손 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권은 땅위에서 주장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내 영혼을 부르시는 순간 모든 것을 주님께 반납해야 합니다. 이런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죽음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3:1~2)라고 말씀합니다. 삶이 있으면 그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에 헛된 것으로 채워져 있는 부끄러운 것들을 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복음성가 부르겠습니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부활이란 말은 원래는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인류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도저히 방법이 없었던 죽은 시체를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활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는 다시 죽을 몸으로 부활시켜 주셨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순종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할 부활한 예수님의 신령한 몸처럼 우리도 영생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인류최대의 희망과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부활이란 과제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향해 가시다가 마중 나온 누이 마르다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이 말의 의미는 반()은 왜 주님 진작 안 오셨냐는 원망이고, ()은 예수께서 죽음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다시 산다는 것을 저도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7). 마르다는 주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11:39).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11:39)고 명령하셨습니다. 돌을 옮기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마르다는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썩어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흘은 더 이상 시체가 살아날 소망이 없는 절망의 기간입니다. 르다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만 바라보고 생명과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영의 눈을 뜨게 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안됩니다. 못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헛된 수고를 왜 합니까? 불순종하고 반항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11:4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 후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11:43~44).

부활이란 말은 원래는 죽었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인류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죽을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다시 아프고 죽을 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소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이 장례식장에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해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부활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되셨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적인 생명으로 살다가 병들고 원치 아니하는 죽음으로 인하여 육체의 생명은 끝이 나고 그의 영혼은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받는 비극적인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신앙고백으로 살아갈 때 죽음도 두렵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절망에 처했든지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장례식장은 잔치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인생이 바뀌고 삶은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뒤에 제자들은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뿔뿔히 흩어 졌습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예수님과 한 무리였다는 사실이 발각될까봐 겁을 냈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계를 유지할 대책을 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때 실의와 불안과 공포에 빠진 제자들 앞에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담력이 생겼습니다. 주저앉고, 낙심했던 사람들이 일어나 희망을 얻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하던 제자들이 어떤 위기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해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주님은 부활이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처럼 어려움과 슬픔과 절망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시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조건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은 신뢰와 순종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까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나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11:41) 믿음과 순종으로 돌을 옮겨야 합니다. 불신앙의 돌, 의심의 돌, 부정적 사고의 돌, 고집과 교만의 돌, 분노의 돌을 옮겨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고 상식에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주실 때, 인간적인 능력과 소망을 포기하는 시점에야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25년 만에 아들을 주셨으며, 그의 육체가 불가능하게 된 100살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고 기다렸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5~27). 

내가 믿나이다.” 우리의 부활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

고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히고부활의 소망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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