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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영적 삶과(未定稿)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10-06 (토) 08:51 2개월전 120  

그리스도인 영적 삶과 미정고(未定稿)

요한복음 14:12-14, 18-20

로마서 8:9-17

2018107

 

성서본문 이해

로마서 8장 전반부에서 영과 육의 갈등을 고뇌하던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육을 따르는 모든 자연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이런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얻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할 때에 가능합니다. 이 영은 하나님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 혹은 성령이라 부르며 다 같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의 영이든 혹은 성령이라 불리는 영이든 그이 우리 속에거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게 됩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삽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우리는 빚진 자로되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후사임을 증거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인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결론 합니다(8:9-17).

신약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을 현대인이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합니다. 육에 속한 모든 것을 자기 자신’(the self)으로, 영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God)으로 표현하며,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할 때엔 하나님과 반대되고, 자신을 절대시 할 때엔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신만을 더 생각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나타나는 하나님, 그리스도의 영을 환영치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육과 욕심, 이기적인 생각뿐이기에 죽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하나님으로 호흡하며 삽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 속에 계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그 마음을 널리 열어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비록 육과 죄의 유혹이나 제한이 없지 않을 것이나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체험을 하며 삶을 영유합니다. 죽으신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 아무리 죄악 된 세상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어찌 같은 부활의 능력을 베풀어 주지 않겠는가! 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기에 죽은 생에서 구원되고, 그런 영의 생이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 같이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길은 육의 자신the self)을 장사지내고 새 생으로 옷 입고 하나님 중심으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생은 비겁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어린자식같이 의탁하여 삽니다. 이들은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고, 땅에서 어려운 때를 경험하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성령은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연약함까지 도우시기에 때로 그들이 육과 죄의 시험으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기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확언합니다(8:26, 28). 오늘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 영적 삶과 미정고(未定稿)입니다.’

 

 

2. 영적인 삶에 대한 보다 진전된 지침

미국의 건전한 개신교단의 하나인 그리스도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hrist)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에 속한 건전한 생활을 위해 매일 열두 번 감사할 것을 가르칩니다.

1)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새로운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2) 조반을 먹을 때는 오늘도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3) 차를 타고 직장으로 갈 때는 오늘도 나를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4) 직장과 가정에서는 오늘도 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5) 일을 하며 잔소리나 비판, 압력을 받을 때도 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6) 직장이나 집에서 칭찬이나 격려를 받았을 때는 만족과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7) 점심기간에는 얘기를 나눌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8) 하루의 일이 끝나면 그래도 작은 성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9)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10) 저녁 TV나 신문 잡지 등을 보며 앉았을 때는 여가의 즐거움을 주신 신()께 감사한다,

11)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12) 꿈속에서는 생명이란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런 감사의 삶을 날마다 살 때 어떤 유혹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자로서 우리의 소중한 나날을 기쁘고 보람되며, 이웃의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크고 작은 뜻을 펼치며 영과 육이 다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서고금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서 발견하는 것은 그들의 삶의 가치나 평가는 결코 얼마나 많이 갖고 지식을 쌓고, 얼마나 높은 자리에 군림하며 살았던 자들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고 감사하며 봉헌·봉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뉴욕시의 어느 신발가게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뉴욕의 한 신발가게 앞에 10세 된 소년이 맨발로 서 있었습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던 한 숙녀가 소년을 발견하고 멈췄습니다. 아름답게 차려 입은 그녀는 차에서 내려 소년에게 다가갔습니다.

너 왜 그렇게 신발가게 유리창을 쳐다보고 있느냐?”

, 저는 다만 하나님께 신발 한 켤레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년은 꽁꽁 언 발을 구르며 대답했습니다. 숙녀는 그를 데리고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종업원에게 양말 열두 켤레를 주문하고 대야와 수건을 부탁하여 받은 뒤, 가게 뒤쪽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장갑을 벗고 무릎을 꿇고 앉아 소년의 얼굴과 발을 따뜻한 물로 씻고 수건으로 잘 닦아주었습니다. 그녀는 소년에게 양말을 신기고 가게로 돌아와 신발 한 켤레를 사서 신기며 말했습니다. “네가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그때 어린 소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줌마는 하나님의 부인이신가요?”

퍽이나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이 맨발의 소년을 본 뉴요커들은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 중엔 크리스천들도 있었으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그들은 다 그저 지나쳤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추운 겨울 양말은커녕 신발도 없이 신발가게 진열장을 응시하며 떨던 소년에게 지나던 한 숙녀가 사랑의 관심을 표현한 작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아줌마는 하나님의 부인이신가요?”하고 물었다는 말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그만큼 살벌한 뉴욕시요 아직껏 이 소년은 그런 작은 따뜻한 사랑도 별로 받아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대단한 경비도 들지 않는 일,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먹으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수혜의 어린 소년은 하나님의 부인이나 천사의 선물같이 여겼습니다.

확실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악의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의 작은 일상의 어려운 현실에서나마 그저 지나치는 사람과 그를 돌보아주는 사람, 형제의 비극에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 심지어 한 신앙공동체의 교회에서 같은 교인이나 아이들, 교회당 안팎의 대소사에 이르기까지 관심하며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과 무관심하며 모르는 척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속에 거하는 사람들이란 세상과 교회, 그 어느 곳의 어떤 대소사에서든 자신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의 뜻, 죄와 악이 아니라 선과 정의의 편에 서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하면 작은 일같이 여겨지지만 한번 멈춰 서서 자성하며 이웃들의 삶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영적인 삶을 실천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영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인들

이제 우리는 영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어떤 처지나 어느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기쁘고 적극적으로 신앙의 삶에 나아가야합니다. 그렇게 사는 그들만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과 그 영광을 위해 보람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백세에 얻은 외아들도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제단에 희생의 제물로 서슴없이 드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마음만 확인하고 아들의 제물을 만류하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전적인 순종으로 처참하게 운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로 인간의 죄악과 불의와 미움이 아니라 선과 사랑과 정의가 하나님의 뜻이요 최후 승리자임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루터(M. Luther)는 구원이 다만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기에 이를 신앙의인’(Justification)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구원하며 육이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의 영광(Sola Gloria)을 개혁의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허물진 인간은 자신의 주장이나 욕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앞세우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때, 모든 인간의 죄나 불의 등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965년 민권(民權)을 위해 셀마에서 몽고메리 주 수도 의사당으로 대행진하던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Sir) 목사는 죽은 자가 아니면 페트루스 다리를 건널 수 없다는 발포령을 웰레스 지사에게 들었으나 민권과 자유를 위한 행진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5일을 걸려 루터 킹 목사와 흑인들과 동조하는 일부 백인들이 함께 도보로 수도 의사당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루터 킹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행진하고 계십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노력은 허무하고 하나님과 연결된 삶만이 밝은 새벽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주연이 빠진 연극 같다.”고 외쳤습니다. 때문에 그의 모든 강연이나 메시지, 민권 활동들은 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노력이라 역설했습니다.

유명한 흑인 가수 앤더슨은 공연이 끝날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님을 위해 노래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노래를 들으러 온 청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게 해 주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 땅의 복판에서 저들은 날마다 삶을 영적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흔히 많은 한국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받아 신령하게 산다고 하며, 인간의 도리나 상식도 벗어난 채 응급한 세계의 현실 문제는 외면하고 홀로 탈속세적이고 초역사적인 자세를, 가장 신앙적이고 신령한 영적인 삶이라 자부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며 자본주의 타락인 탐욕에 빠져 자기들의 교회가 부흥하여 교인과 헌금이 많고 더 큰 교회가 되는 것만이 제일인 듯 내세웁니다. 가장 저속하고 세속적이며 거룩함을 빙자한 탐욕의 파렴치한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그가 추구하던 하나님의 뜻과 성령으로 충만한 영적인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아닙니까? 아니 신학적으로 이는 반 그리스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영적인 것을 말하던 본 회퍼(D. Bonhoeffer)가 그것은 저 세상, 초역사적이고, 신비하며 거룩한 것이 아니라, 눈물과 한()으로 가득 찬 이 세계 복판에서, 그 죄악으로 인한 문제들과 싸우며 낙심하고 좌절하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이라 한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영성이란 초세계적이요 고고한 거룩함이 아니라, 예수가 화육하여 이 세계에 오시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기까지 세상의 죄악과 싸우며, 오직 인간과 세계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다 바친 바로 그런 사랑과 희생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기원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본모습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인 것입니다. 최소한 바른 신앙을 가진 자들의 삶은 온 누리 중생의 본이 되고, 세계의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원하는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과 생명을 살리는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책임적인 자아(The Responsible Self)

오늘의 성숙한 시대에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의 책임적인 자아(The Responsible Self)에서 밝힌 바와 같이, 책임성(Responsible)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성숙한 인간의 징표로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로든, 자기가 처한 사회나 공동체에서 그 심사언동에 있어 책임질 수 있는 자가 가장 원숙한 자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가정에서도 어릴수록 책임을 물으며, 성숙한 어른이나 가장일수록 그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위해 책임을 알고 지려 합니다. 한 사회나 국가,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미숙한 자들은 책임을 모르고 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나라 사회나 공동체에서 그 어떤 문제든 더 책임을 지는 자만이 주인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에선 이와 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책임지려는 자를 신뢰합니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성실하게 임하고 맡은 책임이나 직임, 그 일이 크든 작든 성실하고 충성되게 수행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책임성과 성실성은 늘 병행하기에, 성실하며 무책임하거나 책임적이되 불성실할 수 없습니다. 책임적인 사람은 따라서 성실하고, 신실한 자는 동시에 책임성이 있는 자입니다. 또한 책임성이나 성실은 한 때 어느 곳에서는 그러하고, 다른 때 다른 일에서는 그렇지 못한 임시적이거나 부분적일 수 없습니다. 온전성(Integrity)과 일치성을 지니며, 언제 어디서나 다름없기에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성실하고 책임성이 있기에 신뢰가 가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신(), 불신앙을 막론하고 주어진 생을 올바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는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이러한 자들만이 자족하며 바로 살고, 나라나 사회, 교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비천하게 되고 귀하게 되어도, 궁핍하게 되고 풍부하게 되어도, 어떻게 처할 줄을 알기에 염려할 필요도 없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손들을 염려하는 부모들도, 정말 그들이 이런 진리를 터득하여 살게 될 때엔 아무러한 걱정도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이 땅에서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 나와 월급 많은 직장에 취직하고 귀한 애인을 배필로 맞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요? 그러나 그들의 성공과 행복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무장하고 수련 받은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그 모든 성공과 행복은 확실하다는 보장입니다. 바울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2)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런 주 예수를 발견하고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빈부귀천, 희비애락, 생의 성공실패 등 그 어떤 처지에서든 승리의 생을 살 수 있었기에, 그는 그의 체험과 확신 속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주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자유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길을 선포한 것입니다. 신앙으로 성숙한 한 인격자란 참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의 능력 또한 무한합니다. 바울은 이런 진리를 주 안에서 발견하고 우리에게 전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도 성실하고 정직하되, 책임 있는 신뢰의 사람을 원하고, 나라와 사회, 교회까지도 이러한 신뢰할 수 있는 원숙한 인격자들이 늘면 늘수록, 그런 나라나 사회나 교회는 하나님도 기뻐하고 이 세계가 원하는 그런 교회와 사회가 됩니다.

 

 

5. 미정고(未定稿, Never Ending Story)

예수의 고별설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보다도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요한14:12)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교리적 차원에서 마침표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구원이 그에게서 비롯하며 교회 출석이 내세를 보증하는 것이고 예수만이 종착점이기에 다른 것들을 무의미하다 여기면서 예수에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나를 믿으면 너희는 내가 하는 일도 할 것이며 내가 했던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일이 마침표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Never Ending Story)로써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마치지 못한 일, 끝나지 못한 일, 그래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더 크게 할 일이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 선생은 이 말씀을 좋아하면서 미정고(未定稿)’라는 선생님 특유의 한문으로 표현했습니다. Never Ending Story라는 말을 선생님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교 역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말하는 종교입니다.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JPIC)을 위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주관했던 바이젝거(Carl Fiedrich von Weizsacker)그리스도 정신은 아직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 구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위협하는 정의의 문제, 평화의 문제, 생명의 위기가 존속하는 한 그리스도교 정신은 실현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아직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교가 구원을 독점한 종교인 것처럼 마침표로 이해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미정고(未定稿)의 종교입니다. 우리 각자가 진리의 영인 보혜사를 지닌 존재라는 자각을 갖고, 예수가 원했던 것을 우리도 원하며, 그 분이 진정으로 꿈꿨던 것을 우리도 꿈꾸고, 그분이 가고자 했던 길을 우리도 같이 걸을 때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될 수 있다 했습니다. “너희를 고아처럼 남겨두지 않고 너희와 늘 함께 있게 하겠노라”(요한14:18)고 말한 성령강림의 사건이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그가 우리 안에 있다는 믿음, 내 안에 나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이 내주한다는 확신, 그래서 우리도 올바른 꿈을 꿀 수 있고, 올바른 것을 바랄 수 있으며, 정의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마지막 고별설교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너희가 내가 한 일을 할 수 있고, 나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 스스로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제는 예수 믿기가 아니라 예수 살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내 안에 나보다 더 큰 힘, 진리의 힘이 내주한다는 믿음 하에서 예수 살기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영의 탄식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남겨두지 않고 더 큰 일을 위해,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을 주고 떠났지만, 정작 그 영이 오히려 탄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일체가 탄식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자기 소리만 내고 인생을 살아왔기에 남의 소리를 남의 소리로 듣는다면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는 온통 비탄과 탄식과 신음의 소리뿐이란 것이 성서의 말씀입니다. 자기 소리만 크게 내며 살았던 탓에 자기 밖의 피조물의 고통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이런 신음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시대의 성령체험이라 합니다. 자신 속에 내주한 영의 존재를 깨닫는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탄식하는 피조물들과 소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믿음을 밑음바닥의 소리라고 풀었습니다. ‘은 아래이고 은 소리인 것이지요. 아래소리, 바닥소리, 이것을 믿음이라 한 것입니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라는 뜻일 것입니다.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뜻일 것입니다.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삶의 바닥에서 들려오는 탄식과 아픔의 소리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마감하면서, ..미관계와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2018년에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변화가 생겼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의 파워 엘리트와는 거리를 두고 비교적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그의 리더십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지만, 반대로 일관된 적대시 정책을 펼칠 때보다는 북한과 협상할 여지가 훨씬 많아진 것입니다. 또한 북미간 거리를 좁히고 중재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난 70여 년의 역사 속에서 남북미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북미 관계의 변화가 주변 당사국의 모든 이해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고 그러한 변화의 방향을 만들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북미 정상회담과 종전협정은 새로운 출발선을 긋는 작업입니다. 분단과 불신의 역사가 70년을 넘었기에 아를 변화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중국과 미국이 국교정상화의 의지를 갖고 협상을 시작한 후 실제 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습니다. 베트남과 미국이 파리 협정을 맺고 전쟁이 끝난 뒤, 국교정상화까지는 20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북미관계의 변화는 단순히 양국가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지역의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북미관계에 한국이 책임 있는 당사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남북한 민간교류와 협력 분위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통독 이전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처럼 평화 위한 기도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작은 통일의 의미가 있는 평화를 위해 교회가 앞장설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북한 이탈 주민사역과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민간교류 협력에 교회의 역할을 찾는 일입니다. 남북한 주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주여! 한반도에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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