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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11-25 (일) 02:50 5년전 188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 27- 38

Who do you say that I am 2018-11-25

 

I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의 공생애에서 전환점에 해당합니다.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성격의 그리스도이며,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의 운명과 사역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셔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은 공관복음서의 전환점이 됩니다. 예수는 지금 자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더 깊은 무엇을 찾아보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다양하게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평생 동안 생각할 질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이 알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들이 스스로 그 대답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는 그 대답을 제자들로부터 듣기를 원했으며, 또한 우리들로부터도 듣기를 원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의 메시지, 자신의 삶, 신앙으로의 초대를 이해했기를 바라면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선언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1세기의 예수의 생애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본보기(an example)인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던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 라는 물음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영속적인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각기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응답했던 것처럼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II

베드로가 엉겁결에 주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가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로마에 맞서 전쟁을 벌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아 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혁명적 해방자(a revolutionary liberator)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그 투쟁의 책임을 맡아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지도자가 되어, 미리 예정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아는 제국(empire)을 반영한 메시아였습니다. 즉 자신의 제국주의적 통치를 주장하기 위해 똑 같은 제국주의적인 군사력을 사용하는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사람같이 생긴 어떤 이 인자 같은 이(7:13)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자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세를 주십니다. 이 하늘에 속한 인물은 다니엘의 꿈을 해석해 주는 자가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언약 공동체-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상징합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메시아적 구절입니다.

구약의 후대의 문학에 나타나는 전승의 한 흐름에 의하면 메시아는 다윗 가문에서 나올 것이며 다윗 왕국을 회복하러 올 것이라 합니다(9:1-7, 11:1-9). 예수시대에 팽배해 있던 이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은 후기 마카베오 시대에 나온 한 시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소서 오 주여 그들에게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당신이 구하시는 때에 그는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니 그를 힘으로 두르소서. 그는 불의한 지배자들을 흩을 것이며 예루살렘을 짓밟아 멸망시키려는 열방들로부터 예루살렘을 깨끗케 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시편15:21-25-(버나드 앤더슨, 구약성서의 이해 p.759)

 

III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8:30)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자신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에 대해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잘못된 메시지, 즉 예수가 조만간 폭력을 사용해서 로마제국의 지배를 청산할 제국주의적인 메시아(an imperial messiah)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도록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분명한 말로, 자신이 수난을 받고 거부되며 박해를 받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고문을 당하며 처형될 것이며,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 했습니다.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으며 그 대화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잔인한 꼴을 당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메시아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메시아의 뜻을 전혀 모르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지금이 정치적이며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구나!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런 수난을 겪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하였고, 마가복음(8:32)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8:33)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의 등을 보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는 몸을 돌려 베드로와 제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는 전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 받을 때도 제국을 다스리라는 유혹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신앙적인 대화, 정치적인 성찰, 그리고 베드로의 자랑스런 그리스도 신앙고백에서 결국 사탄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꾸짖어(8:33) 라는 단어를 예수가 귀신들을 꾸짖을 때(1:25, 3:12)와 바람을 꾸짖을 때(4:39)도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예수가 자신에 대해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고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Son of Human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대결을 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예언자적인 진실을 말하는 것이 결국에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거부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다니엘서와 예언자 이사야를 더욱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정의의 종(Servant of Justice, 이사야 42), 고난 받는 종Suffering Servant, 이사야 53)으로 이해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 예수는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비폭력의 좁은 길을 걸어감으로써 수난과 고문과 죽임을 당했고, 그 너머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 길을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우리도 사람의 일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하며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며 위험을 견뎌야 하는 비폭력과 그 결과로 인한 박해와 고난, 체포와 투옥과 죽임을 멸시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거절당하고 수난을 겪고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그 죽임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는 본질적인 것들 곧 삶과 죽음, 죽음 이후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IV

이처럼 베드로와 예수가 서로를 항변한 후에, 예수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분명한 표현으로 제자의 길이 무엇을 요구하며 왜 제자의 길이 인간의 삶을 성취시키는지를 설명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4-35).

예수는 비폭력적인 메시아(a nonviolent messiah)로서, 제국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처럼 특별히 빛나는 그 비폭력은 신속하게 짓밟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누구든지, 제자들이나 군중들 구경꾼이든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그 자신과 똑같이 특별히 빛나는 비폭력의 길을 걸으며 수난과 순교를 각오하기를 바랐습니다. (존 디어, 예수의 평화 영성)

초기그리스도교역사에 의하면 네로 황제 이후 박해의 역사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무려 250년이나 지속 되였습니다. 원래 로마는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기독교 초기에는 별로 주시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와 로마사회와 갈등이 유발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의 원인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기독교의 평등과 자유 그리고 천부적 인권에 대한 본질적 가르침이 신분적 로마사회와 충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반사회적 기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둘째, 기독교의 유일신관도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사실 기독교도들은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와 야훼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리스와 로마 신들은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로마는 모든 신들을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셋째,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며 핍박 받았습니다. 황제들은 자신들을 위한 신전을 짓고 제사를 요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황제를 신처럼 (Dominus)로 불러야 했습니다. 사실 많은 신을 믿는 로마인들에게 황제를 신으로서 추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협오를 가중시켰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성만찬과 세례에 대한 곡해였습니다. 은밀한 장소에서 엄숙하게 드려지는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찬식은 기독교를 식인종교로 오해케 하였습니다. 또한 기독교도들이 일반인들에 대해 호의로 대하였지만 목욕이나 식사 등의 세속적 방식으로 교제하지 아니했던 것도 단절 요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의 생각 속에서 초대그리스도교회는 무엇보다도 고결한 순교자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초대기독교도들의 모습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의 스승 예수가 십자가 처형의 죽음의 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고 돌파하면서 받아 들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자각은 예수의 죽음 안에서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자신들의 옛 삶도 죽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극한적 죽음방식 중에서도 보여준 비폭력적 저항과 증언, 사랑의 용서, 진리에의 순명, 권력과의 타협내지 야합의 거부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거룩함을,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생명과 진리의 승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초대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생명과 진리로 변화를 받아서 그들도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고 예수 닮아 따르기, 예수 살기의 생명과 진리 증언의 삶을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영웅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래 초대그리스도교의 모습이었음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의 삶이 부끄럽고 숙연해 질 뿐입니다.

 

V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하고 묻습니다. 예수는 비폭력 저항과 사랑의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도 비폭력 저항과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자처럼, 권력과 지배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들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르지 (10:42)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비폭력의 메시아를 따르며, 고난 받는 사랑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Suffering Love)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비폭력적 통치를 추구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고난 받는 성육신이 되어, 이 세상의 죽임의 세력에 맞서, 그들을 해치기보다는 메시아처럼 우리도 몸소 수난을 겪음으로써 저항합니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좀 더 궁극적인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8:36-37). 예수는 베드로의 주장에서 밑에 깔려있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야심과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 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생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예수의 이 질문은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관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권력과 부귀와 유명한자가 되어야,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얻은 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문화의 가치관의 눈으로 보기에 철저하게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죽임을 당한다면, 우리는 다시 부활하여 우리의 목숨을 얻게 될 것입니다.

 

VI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예수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비폭력의 좁은 길을 걷도록 도전합니다. 그 질문은 생명의 진실, 곧 생명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난 받는 사랑에서 찾아 질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 질문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우리 자신도 발견하도록 촉구합니다. 그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처럼 죽고,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아나,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신비를 발견 하겠끔 만듭니다. 그 질문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의 빛나는 본보기의 빛 속에서, 우리는 그의 비폭력 제자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여, 당신은 살아계신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비폭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존 디어, 예수의 평화 영성)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는 나에게 존재의 근거요 하나님의 심장 속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는 나에게 인간적 성실성을 지니고 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신 생명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며, 그리스도라 부르며, 내게 하나님을 보여준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는 로빈슨과 본회퍼의 표현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the man for others)이며 또한 하나님의 인간적 얼굴(the human face of God)이었습니다.

 

VII

올해는 한국전쟁(6.25전쟁)이 멈춘 지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는 세계냉전체제가 한반도서 폭발한 사실상 3차 대전 이었습니다.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반도에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한 전쟁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내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세계를 동서양진영의 냉전체제로 재편성한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전쟁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내전적 성격이 있지만 한국전쟁의 본질은 세계이념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의 패권변동과 전쟁문제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7세기의 삼국통일전쟁과 고구려의 멸망을 포함해 13세기 몽골의 조선과 일본침략, 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제1차 동아시아국제전쟁(1592-1598), 19세기 동학농민전쟁과 청.일 개입 및 청일전쟁, 20세기 한국전쟁과 미국. 중국 참전 및 미-중 대결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특징은 한반도 내에서의 통일여부나 패권의 변동문제는 언제나 당대의 핵심적인 역내 지역문제이자 국제문제로 변전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한국문제는 언제나 지역 및 국제질서와 밀접히 관계되어 왔습니다. 대륙과 해양, 중국과 일본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가교와 요충으로 존재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결정적 요인입니다. 정전 65주년을 맞아 우리는 분단과 전쟁에 대해 정말로 철저히 자기비판과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이해에 바탕 할 때 비로소 평화와 통일, 생명과 평화를 향한 지혜와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의 의미에서, 한국전쟁의 산물인 휴전협정을 매듭짓고 평화체제의 원년으로 삼기 위하여 상생의 원리에서 남북당사자간의 합의, 다음에 주변국들의 찬동을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평화통일의 예지와 결단, 희생과 용기로 출발할 때입니다. 이스라엘의 극심한 민족의 고난 속에서 고난 받는 종(이사야 53) 메시아 탄생의 태동을 꿈꾸었듯이, 우리 민족도 냉전체제의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쓰라림도 세계를 구원하는 대속의 수난으로 믿고 해석하며 인류의 희망을 여기 한반도에서 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상황의 흐름을 보는 입장에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통상적인 전개과정으로 보고, 예측 가능한 시대사적 흐름의 변화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입장을 크로노스(chronos)적 시대사관이라 이름 합니다. 이와는 달리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단순히 통상적인 변화의 틀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예측을 넘어선 독특한 상황의 도래와 전개로 파악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카이로스(kairos)적 시대사관이라 이름 합니다. 기독교적 사관은 역사의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시대사적 흐름과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그리고 극적인 역사개입의 징조 곧 kairos로 파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필연코 역사변혁을 이루어내며, 역사적 변화의 상항은 하나님의 kairos라는 말입니다. 최근의 한반도에서 일고 있는 평화이야기는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징조입니다. 한국교회는 평화적인 교류, 평화공존의 길을 여는데 길잡이 역할을 하라고 명합니다. 강요나 위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자율적인 결단이 만들어가는 평화통일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평화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심고 가꾸고 꽃을 피우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우리 앞서 가십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평화공존의 역사를 이루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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