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이기영

지혜 배우기 바울의 시간관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9-03-13 (수) 14:37 5년전 1988  

지혜 배우기 바울의 시간관 잠언 8: 20-31, 누가복음 10:38-42,

빌립보서 1:20-21

2019-03-17 사순절에

1. 시작의 말, 지혜 배우기

여성으로 의인화(擬人化)된 지혜(1:20-33)가 말합니다. 지혜는 한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선지자처럼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것들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이 지혜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보상이 있으리라고 약속하고, 반대로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성으로 의인화된 지혜의 충고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문제입니다. 지혜는 일반 서민들과 거리와 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상인들과 지도자들과 지방 세력가들을 모두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 불러모읍니다. 지혜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8:1-3).

여인 지혜는 유능하고 능력 있는 스승으로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부르고(8:1-8), 달란트와 은사를 지니고 있으며(8:11-21), 창조 이전에 존재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도왔으며(8:22-31), 모든 이들이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8:32-36). 여기서 지혜에 관한 언급(특히 8:22-31)은 신약이 그리스도(1:15-16), 하나님의 말씀(1:1-18, 요일1:1), 하나님의 지혜(11:49)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지혜를 찬양하는 시()의 절정(絶頂)은 잠언 8:22-31에 나타납니다. 지혜는 첫 번째로 창조되었으며(8:22), 세움을 받았으며(8:23), 태어났습니다(8:24-25). 여러 가지 동사(動詞)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지혜를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지혜는 신적 본질(本質)을 의인화(擬人化)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시적(詩的)인 언어 표현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1:15-16과 계시록 3:14에서 예수에 대하여 사용한 언어와 비슷합니다.

히브리 성경(구약)의 지혜의 저작은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높은 지성과 진지한 연구, 오랜 세월의 경험에 의거한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이 카리스마적인 은사는 성문에 앉아있던 장로들(1:21참조), 숙련된 장인들(31:1-5), 조언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의 모든 통치자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전승에 의하면 지혜의 은사는 솔로몬에게 가장 크게 내렸으며, 그는 아주 지혜로운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의 지혜에 대한 명성은 자신의 제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지혜유형들이 점차 이스라엘의 유산에 통합되었습니다. 또한 이집트 지혜의 모티프들은 요셉 이야기에서 감지되어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을 지혜의 창시자로 여겼습니다. 오경(율법)은 모세에게, 시편은 다윗에게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지혜문학은 솔로몬 시대로부터 유래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 시편72, 127편이 솔로몬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잠언(Proverb)이란 말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와 같은 격언(格言)이나 금언(金言)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마샬(mashal)도 이러한 의미를 갖지만, 신약의 비유처럼 좀더 긴 단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에 의하면 참된 지혜는 야훼의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사람, 거룩한 분을 경외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것입니다(1:29, 2:5). 야훼에 대한 신앙은 시작, 즉 이해(理解)의 기초이자 출발점입니다(3:5-8).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의 서문(1:1-18)과 유사한 듯한 언어로 지혜(여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창조의 사역 속에서 기뻐한 하나님의 자녀였다고 합니다(8:22-31). 이 잠언은 신약의 골로새서 1:15-23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노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었을 말씀과 연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가 으뜸임을 논증하는 자료로 사용합니다. 골로새에 있는 반대자들(영지주의자)이 그리스도의 최고 우위성을 의문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16-19). 그 내용은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찬미하며(1:15-17), 그의 구속을 찬양하는 것입니다(1:18-20). 이 구절에 사용된 언어는 유대문학에서 발견되는,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를 묘사한 표현들을 생각나게 합니다(8:22-31). (버나드 W. 엔더슨, <구약성서의 이해> 참조) 2019년 사순절 주일 아침의 메시지는 지혜 배우기 바울의 시간관 입니다.

 

2. 지혜로운 유대인들

어느 때나 배우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남은 생을 더 보람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현자(賢者)의 말과 같이 새로운 것을 배우기에 너무 늙은 자는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다름이 여기에 있습니다. 열린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새 변화에 대처하는 자는 나이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든 마음만 먹으면 새 관심사를 발굴하고 성격도 습관도 변형시키며 더 나은 생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빠르게 오고 가는 세월 속에서, 망국민의 역사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가는 유대인의 삶에 대한 실례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인구의 2%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미국의 학문, 경제, 정치, 언론, 문학, 예술까지 30%나 차지하고, 노벨상 수상자들은 20%나 되는 것일까요? 그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문명의 근간을 이룬 유대교 기독교 창시의 아브라함 모세만이 아니라 예수와 바울까지도 종족적으로는 유대인들입니다. 세계를 둘로 나눌 만큼 현대역사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칼 마르크스도,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던 인간의 심리를 꿰뚫으며 인간심리학을 발달케 한 프로이드, 천 년에 한번 나올 수 있다는 현대과학의 할아버지 아인슈타인도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위대한 여성들을 살펴보며 놀라는 것은 문화 정치, 언론, 영화계까지도 유대여성들이 즐비하다는 것입니다. 뉴욕포구에 횃불을 든 자유여신상에 유명한 글귀를 새겨 넣은 시인(詩人) 엠마 라자루스(Emma Lazarus)도 유대인입니다. 온 세계의 가난하고 피곤한 영혼들을 환영하는 시() 몇 구절 만이라도 읽어보기로 합니다. 그대의 피곤과 가난 자유를 열망하는 그대의 응어리진 덩어리들, 넘치는 바닷가의 가련하게 버려진 것들, 다 내게로 가져오오. 폭풍에 시달린 집 없는 자들 내게 보내주오. 나는 황금 문 곁에서 내 등불을 높이리라.

이들 유대인들의 뛰어남이나 세계적인 크고 작은 갖가지 공헌들이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선민이기에 당연하다고 쉽게 답변하거나, 의식적으로 별거 아닌 것으로 제쳐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 선민의 오만으로 저들의 신()에게도, 예수로부터도 지탄이 된 저들이 선민이기에 타 종족과는 다르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강원도만도 못한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도 없이 2천여 년을 세상을 떠돌던 저들이 소수 종족인 이스라엘인들이 오는 세계에 그토록 엄청난 공헌과 훌륭한 인물들을 각계에서 배출하는 것을 저들이 억압을 받고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고난을 당하며 산 백성이 저들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성경의 율법과 탈무드를 어려서부터 배우며 터득한 신앙과 지혜를 실생활에 적용하며 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배우고 그 지혜로 살면서, 우리의 생을 더 귀하게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3. 잠언의 지혜 읽히기

잠언은 지혜의 귀함을 말하고 그 삼부작으로 지혜(wisdom), 이해(understanding), 지식(knowledge)으로 구분합니다. 개인이나 가정, 교회와 사회, 모두 이 세가지를 함께 하게 될 때 훌륭한 생의 결실을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한 가정을 예로 가르치는 말씀을 들어보면, 사실은 가정만이 아니라 개인이든 사회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것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집이 일어나고 이해(슬기)가 있어야 집이 든든하다. 지식이 있어야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방마다 가득 찬다(24:3-4). 한 원숙한 인격자로서 능력을 갖추고 한 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지혜와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하고, 한 훌륭한 국가형성과 운영에 있어서도 그 백성들이 이 세 가지를 함께 가지게 될 때 그 나라는 건재하고 부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 자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에 나라는 그런 현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활동으로 주위사람들을 지혜롭고 선하게 하며, 결국 사회와 나라가 바로 되게 합니다. 때문에 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것보다 그들이 윤리, 도덕과 공의와 정직을 가르치고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처사라고 보여 집니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으며 경성할 것은 참된 지혜와 지식을 구하고 그 지혜를 따라 현명하게 사는 일입니다. 아무리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고단하고 힘들게 살지라도 지혜롭게 살지 못하고 어리석게 산다면 모든 노고가 헛되고 비참하게 끝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힘, 재주, 노력이 다 중요하나 어리석어서는 안되며 참으로 지혜롭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성서 주석가 매튜 헨리(Mathew Henry)는 사람이 지혜로울 수 있는 세가지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기회를 놓치지 말라, 둘째, 늘 배우는 자세를 가지라, 셋째, 인내를 가져라.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와 끈기가 꼭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나 처지, 그리고 기회든 포착하고 놓치지 않으며 늘 겸허히 배우는 자세를 가집니다. 오랜 탈무드도, 개혁자 루터도 어떤 일, 못나고 잘난 누구에게서나 심지어 악조건이나 실패 속에서도 배울 것은 있다며 거지같은 마음과 자세로 배우고 또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인내와 수련입니다.

세상의 귀한 성취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인내를 요하고 시일이 걸립니다. 바울이 사랑을 정의하면서 제일 먼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는 말로 결론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한 교회의 일원으로 살며, 믿음의 생활을 하며 더 좋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겸손히 진리를 배우며, 인내와 훈련을 더하며 지혜와 지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지혜의 가르침에 새 깨달음의 영적인 눈, 안목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4. 바울의 매임과 시간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바울은 그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에 있어야 되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당대 사람들이나 더욱이 현대인들과는 낯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그토록 아끼고 이기적일 뿐인 자기의 생명을 자기 것이 아니라며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한다(1:20)고 합니다. 어느 순간에 그를 포로로 잡은 자들에게나 어떤 질병, 사고나 로마감옥의 악조건들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의 말이기에 이 세상의 타성적인 계산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순간에 자기생명이 살아있으나 그 어느 순간에 즉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토록 담대하고 평온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울이 땅과 하늘의 시간이나, 살아있을 때와 죽었을 때 시간을 달리 보거나 구별하지 않고 동질(同質)의 시간(時間)으로 이해하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시간관(時間觀)은 그에게 세 가지 일들을 하게 했습니다. 첫째, 바울 자신의 관심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로 그 초점이 변하게 했습니다. 일생 복음을 전하다가 이제 나이 늙은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어서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기에 남아 있기를 소원합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자신의 사랑보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더 소중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歷史)에서 믿음의 선배들이나 순교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생명들을 기쁘게 내어 놓았습니다. 저 필자는 군복무 후에 폐결핵으로 수년간 요양을 하던 때에 <성 다미엔>을 읽으며 큰 감명을 받은바 있습니다만,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선교봉사 하던 벨기에의 다미엔(Damien)은 나환자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 나병이 옮겼습니다. 당시 19세기말에 나병은 불치의 천벌(天罰)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건강하던 다미엔이 1884년 이 섬에 들어 온지 11년째 되던 해 나병이 옭긴 것을 알고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똑 같은 병을 앓게 된 때문이요, 행여 그 병에서 나을까 염려했습니다. 그가 소속교구에 보낸 편지내용입니다. 나는 이제야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내 희망의 빛이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뵈옵는 일은 생각할 수 없을지 모르나 천국(天國)에서 뵙겠습니다. 아직 문등병자가 아닌 채 저들을 돕고 선교할 때 그들의 냉랭함을 경험하던 다미엔이 너무 기뻐 보낸 서신입니다.

사실 천벌과 불치의 저주로 여기던 문등병은 환자자신은 물론 정부당국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환자들을 강제로 몰로카이 섬에 분리수용 했고 그 상태는 비참했습니다. 이런 분리수용에도 상주하는 정식 간호사도, 상담자도, 사제도, 심지어 무덤을 팔 노동자도 없었습니다. 다미엔은 이 모든 역할을 홀로 담당하여 당국의 분리법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방문객을 허용하고 필요하면 가족이 머물 수 있도록 허락도 받았습니다. 다미엔의 노력은 수용소의 개선과 당국의 저들에 대한 인도적 우대에 상당한 진전이 있게 했습니다. 실로 다미엔의 나환자들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지극하고 갸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정신과 헌신이 아니라면 상상도 못할 봉사입니다. 다미엔은 몰로카이 섬 선교 16년만인 18894월 아직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겐 이 땅에서 나환자가 되어 저들을 돌보는 시간이나 죽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시간이 다를 수 없었습니다. 2003년 미국장로교(PCUSA) 한인교회협의회 총회가 하와이에서 모였을 때, 나는 아내와 함께 참석하였는데, 몰로카이 섬의 다미엔 신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였던 기억들이 회상됩니다.

주님은 자기를 사랑한다면 그가 사랑하는 이웃이나 지극히 작은 소자(小子)하나라도 진정염려하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과 같은 신앙의 체험을 가지며 땅과 하늘의 시간(時間)이 똑 같음을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적(召命的) 사역(使役)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바울의 시간관(時間觀)은 날마다의 삶과 생의 자세를 변하게 했습니다. 그의 다메섹 변화 이전에 그의 관심은 산헤드린 의회에서 그의 동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이 그의 생애를 통해 이 땅에서 잘 선양되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를 본받아 살면서 이 땅의 잘못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었습니다.

때문에 초대교회에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던 사도 요한은 각 교회의 장점과 단점들을 지적하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면서 회개와 실행을 촉구했습니다. 바울의 매임 중에도,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하며, 복음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이 참으로 귀함을 알고 지극히 작은 한 말씀이라도 실행하며 사는 진지한 생의 과제를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 반드시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땅과 하늘의 시간을 동질(同質)의 것으로 믿고 사는 바울은 그의 땅의 시련을 특권의 한 기회로 확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의 관점이 변했습니다. 성령의 감동. 감화로 모든 사물과 당하는 일들을 새 비전으로 보면서 그의 어떤 시련이나 고난도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가졌기에 그를 위한 고난도 기쁘게 받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떤 악조건의 형편에서도 이를 겁내지 아니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노력하게 될 때에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는 체험을 바울은 하였기에 강권의 말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시련을 특권의 기회로 만들고 우리의 눈을 예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원하는 일을 행하면서 우리 땅의 시간도 하늘의 리듬으로 변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하늘 땅의 시간이 다르지 않고 동질의 것으로 깨달은 바울이기에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그를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그 뜻을 체험하며 생사(生死)의 경지를 초월한 사도의 고백인 것입니다. 바울, 그에게는 살고 죽는 것이 아무렇지 않으며 다만 세상의 형제자매와 공익,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서 살든지 죽든지 한다는 고백이겠습니다.

 

5.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통한 신()과의 합일

서양 중세의 14세기가 시작하면서 교황과 황제간의 알력이 심화해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해지고 지진, 해일, 및 페스트 등이 만연하자, 사람들은 삶의 무상함을 겪으며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독일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영혼의 가난함을 설파하며 등장한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신비주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에크하르트가 강의와 강론을 통해 도달하려던 최종목표는 자기를 부정하고 신()과의 합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피조물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적인 것에서 분리되면 전적으로 무()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만 사랑하고 그 안에서 쾌락을 찾을 때 남는 것은 오직 슬픔과 비통함뿐입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가장 고상한 영혼을 찾는 일, 영혼의 탐구에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영적인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찾은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자기의 순수한 본질에 도달함으로써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신에게 돌아가기 위한 최고의 덕목을 영혼의 가난함공손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심오하게 가르칩니다. 신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신 안에 있으며, 내가 나 자신을 전적으로 내놓고 그분의 작용에 내맡기면 맡길수록 나는 더욱 신 안에 있게 된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신은 인간의 순수하고도 맑은 내면적 고독 안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고독 안에서 신의 아늑함을 느낀 사람은 참 자유 함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10:38-42)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 대한 엑카르트의 설교는 큰 가르침을 줍니다. 엑카르트는 마리아로 대표되는 관조적 삶과 마르다로 대표되는 활동적 삶을 대비시키면서 성서본문의 문자적 이해를 뒤엎는 해석으로 후자의 우월성을 동생 마리아는 영혼이 하나님의 선()에 매료되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반면 언니 마르다는 생활의 경험이 풍부한 원숙한 여인으로서, 영혼의 근저로부터 활동하는 여인입니다. “주님, 마리아에게 명하여 나를 도와주게 하소서라는 마르다의 말을 엑카르트는 불평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날 줄도 아는 더 높은 정신적 경지를 깨닫게 하려는 사랑에서 나온 말로 해석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많지 않다.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마리아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엑카르트에게는 마르다를 탓하는 말이 아니라, 마리아가 앞으로 마르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 것은 마르다가 시간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모두 완벽하게 갖추었음을 뜻합니다.

시간 속에서 하는 세상일들이 하나님을 찾는 관조적 삶이나 종교적삶보다는 더 고귀합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아직 자신의 존재에 따른 본질적 삶을 살지 못함을 알고서 그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기를 영혼의 근저로부터 소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하나님자신을 가리킵니다. 마르다는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하든지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원한 빛에 감싸여 활기차게 수행합니다. 그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놓아 버림으로써 일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상이 엑카르트의 해석의 요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엑카르트가 단연코 활동적 삶을 관조적 삶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 둘을 택일해야하는 대립적 관계로 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마리아는 아직 이런 대립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둘이 같이 가며 하나인 경지입니다. 그것이 마르다의 경지였다는 것이 엑카르트의 해석입니다. 하나님(그리스도)의 위로에 집착하여 하나님을 떠날 수없는 종교적 삶보다는 자신의 존재 혹은 영혼의 근저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세상사를 수행해 나가는 실천적 삶이 더 성숙하고 고차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시간적 선()과 영원한 선이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융합(融合)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세속(世俗)을 떠난 종교적 삶이 아니라 세속가운데 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 시간을 떠난 영원이 아니라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사는 삶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며, 엑카르트는 이러한 삶을 참된 영성으로 여깁니다.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요 도미니코회의 탁월한 지도자였던 엑카르트는 물론 성례전이나 그밖의 경건한 행위를 비판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하나님의 직접적 일치를 중시하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은 자연히 성례전을 영적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매개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비판적이게 끔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성화하는 (heiligen) 것은 어떤 특정한 종교적 행위나 의례가 아니라 사람자신이라는 생각, 사람이 행위를 성화 하지 행위가 사람을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엑카르트는 어디까지나 중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영성이 아무리 활동적 삶의 영성이라 해도 그에게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정치적 관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영성가요 신비가였지 중세적 질서를 뒤집으려는 혁명가나 예언자적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발견되는 명상과 행위의 통합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삶을 정화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와 세계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적 영성과 사회적 실천에 지니는 의미는 여전히 크다 하겠습니다.(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2012, ‘하나님의 아들의 삶’ 271-294 참조)

2097년 사순절에 여러분 가정에 복되고 희망으로 가득하고 강건하기를 기원합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