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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보라!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9-04-11 (목) 19:35 10일전 61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보라! 이사야 42:1-9; 52:13-53:12

2019년 사순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53:5).

여호와의 종에 관해 말하는 네 편의 시들 가운데 첫 번째 이사야42:1-9과 네 번째 52:13-53:12을 본문으로 사순절에 묵상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시들은 보통 종의 노래라고 일컬어집니다. 어떤 이는 이 종이 한 개인으로서, 아마도 선지자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또 다른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부분에 관한 역사이해와 실용적 교훈, 고난의 종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새로운 시대의 여명

역사가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는 역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은 다음의 격언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꿀벌은 자기가 꿀을 빼앗아가는 꽃을 풍요롭게 한다. 이는 특별히 포로기 중의 이스라엘 역사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꼭 맞는 말입니다. 비록 그 경험은 많은 경우 쓰라린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을 순결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에만 순종함으로써 다른 나라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민족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포로기를 거치면서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역사 안에서 여호와의 영광과 존엄을 보려면 그들 자신의 제한된 공동체를 넘어서 문명화된 모든 세계의 문명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페르시아 고레스의 발흥

유명한 고레스의 원통(진흙원주에 새겨진 것이다)에 그가 바벨론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페르시아의 문헌은 마르둑이 고레스에게 바벨론을 향하여 진군하도록 명했으며 마치 친한 친구처럼 바로 옆에서 같이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르둑은 고레스가 그의 피정복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자신이 했던 노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제 노동을 없앨 것과 주거환경을 개선할 것을 지시했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그의 권세와 자비 때문에 전 세계에 알려진 그의 명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고대의 정복자들, 특히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고레스는 매우 자비롭고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정복한 나라의 왕들을 처형하지 않고 왕가를 가지고 수행원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보물들을 보호하였으며, 전통적인 종교형식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는 피정복민들을 사로잡아 그들 고향으로부터 이주시키는 정책을 폐지하였고,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의식 있는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불릴 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기까지 200년 동안 계속된 페르시아 제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제2이사야의 예언 이해를 위해서는, 고대세계의 희망적인 여운을 남겼으며, 종래의 사고의 폭을 확연히 넓힌 이런 기념비적이고 범세계적인 역사발전이 배경이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2이사야의 예언은 좋은 소식을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둠에 거하고 있는 백성은 새로운 날이 동터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포로들은 구원이 이르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의 무대에 들어 설 때 마치 뒤에는 지옥과 공포만이 남겨진 것 같겠고, 그는 태양이 찬란하게 비치는 정상에 올라가 하나님의 나라 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제2이사야의 예언이 신약과 잘 어울린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임박한 붕괴와 페르시아의 발흥은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정치적인 사건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이 사건을 출애굽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2이사야는 이 사건이 지향하는 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의와 평화의 나라가운데 시온을 두려는 여호와의 강림이라는 점을 확신 했습니다.

2이사야의 핵심 되는 메시지는 새로운 출애굽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일어났던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창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의 굴레와 절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임박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마치 애굽으로부터 탈출, 홍해에서의 구원, 광야를 통과한 행진, 약속된 땅을 향한 승리의 행진 등 출애굽과 광야 전승 가운데 나타나는 내용으로 표현 했습니다. 매우 놀라운 역사적 통찰이며 신앙고백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4.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2이사야의 메시지 가운데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신비한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종에 관한 네 편의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42:1-4 그는 열방에서 공의를 나타낼 것이다 49:1-6 여호와께서 나를 태 중에서 부르셨다 50:4-9 그가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신다 52:13-53:12 그는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는 것으로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바로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이자 예언의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버나드 W. 앤더슨, 구약성서이해)

이미 말 한대로 여호와의 종에 관한 네 편의 시들이 있습니다. 이 시들은 보통 종의 노래라고도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고난의 종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임무와 결부 됩니다;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41:8-10; 43:8-13; 44:1-2; 44:21; 45:4) 이 모든 구절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의 사명은 곧 종의 사명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또 다른 이는 그 종이 개인으로서, 아마도 선지자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라는 1인칭 화자는 개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는 이사야53장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묘사에서 더욱 강해집니다.(버나드 W. 앤더슨, 구약성서이해)

어쨌든 이 여호와의 종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격화 한 것이냐 또는 어떤 특정한 개인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냐 하는 것은 끊임없는 숙제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41:8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한 것이나, 44:1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인격으로 표시한 것이 사실이며, 히브리인의 전통사상인 공동인격(corporate personality)은 다수가 하나 안에 있고, 하나가 다수와 동격인 정신적 통일체를 말하는 것이어서 이 노래에 있어서도 개인이냐 집단이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논점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한 개인에게 응하여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전 역사, 아니 전 우주의 경륜이 지향하고 걸어온 유일한 초점이어서 그의 안에 이스라엘 전 민족정신의 정수가 성육하였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화신한 것이라면 그 개인은 단순한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 안의 많음(many in one)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 자발적인 수난 속에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속량주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씀에도 인자(예수 자신을 의미함)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며 그 생명을 주어 많은 사람을 대속하기 위함이라(10:45)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이 고난의 종 예언에 자신을 일치시킨 증언인 것입니다. (장공, 성서해설)

 

5.하나님이 택하신 종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42:1). 이 말씀에서 몇 가지 눈 여겨 볼 곳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종을 붙들어 주십니다. 붙들어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떠받들어 주신다, 지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정하고 인도하고 보호하신다는 뜻이 이 말 속에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준비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꼭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을 붙들어 강하게 하십니다.

둘째, 종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종 된 존재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종입니다. 택했다는 것은 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세기셨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이 종에게 위대한 사명과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특별한 은혜를 부어 줍니다. 사람도 일을 시킬 때 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시킬 때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줍니다. 약속을 주시고 축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종이 탁월한 까닭은 하나님이 그에게 영을 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붙드는 종, 기뻐하는 종, 택한 종, 하나님의 영을 받은 종이 하는 일은 공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사야42;1에서 한 가지 더 눈 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 종을 내세우는 주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을 만방에 내세우고 자랑합니다. 이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붙드는 종, 기뻐하는 종, 택한 종, 성령을 부어 준 종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합니다. 그가 만방에 공의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6. 고난의 십자가에서 선포되는 약속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인들의 가장 큰 염원은 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언제 회복 됩니까? 과거의 영광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하는 것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의 공통된 마음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언자가 이스라엘인들의 회복을 예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여호와의 종 메시아, 고난의 종 메시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사야 53장을 예언의 지성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0장부터 66장까지 이어지는 이사야 예언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고난의 종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빛을 비춰주고, 사랑을 보여 주었고, 스스로 종노릇 하였습니다.

예수는 질고와 슬픔과 고난을 짊어 졌습니다. 우리 인류가 겪어야 한 죄, 질병, 저주가 예수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속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대속의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대신 아프고, 대신 빚을 갚고, 대신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네 단어가 있습니다. 이사야 53:4질고슬픔, 53:5평화나눔입니다. 질고는 질병, 재난, 근심, 병 등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아픔, 고통, 괴로움, 비탄 등을 의미합니다. 내게서 병과 고통과 저주 등이 떠나니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병을 짊어짐으로 우리가 치유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신 분열, 상처, 우울증이 사라졌습니다.

고난을 뚫고 부르는 개선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자손의 축복이 있습니다. 오래 오래 자손을 보면서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53:10). 둘째,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53:11). 셋째, 많은 사람들을 승리의 몫으로 주고 강한 사람들을 전리품으로 나눠주는 승리의 축복이 있습니다(53:12).

고난의 종은 죄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하였습니다. 이분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은 이 땅에서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33년 동안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대로 그는 수모와 채찍과 모멸과 무시를 당하고 환영 받지 못하고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없음의 자리까지 버려진 데서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사도들과 역대의 모든 성도들은 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인들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병과 저주와 죽음과 고통이 십자가로 옮겨 갑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구원입니다. 다시금 질병 속에 살지 말고, 저주 속에 살지 말고, 고통 속에 살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우리의 병을, 우리의 슬픔을 짊어 지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분이 메시아 여호와의 종입니다.

우리 안에 메시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메시아는 할 말이 많은데도 침묵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할 말 다하는 사람은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고, 알면서 속아주고, 대신대가를 치르고, 허물을 뒤집어쓰는 사람이 정말 두려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메시아적 성품, 인격, 믿음을 가진 이들이 이 땅에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 것입니다.

 

7.실패한 그리스도와 사랑을 실천하라

1) 실패한 그리스도 -절망의 심연에서 담금질된 기쁨. 도스토옙스키가 <백치(白癡)>를 쓴 장소는 유럽이고 배경은 페테르부르크지만, 이야기의 근원은 모스크바입니다. 그 내용은 대충 돈, 치정, 살인이 눈에 금방 들어옵니다. 정략결혼, 내연관계, 유산상속, 지참금, 삼각관계, 사각관계, 질투, 살인의 테마는 속칭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스토리를 특별한 정신세계를 가진 독자들로 사랑할 수 있는 독특한 고전(古典)으로 변형시켰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의 주된 사상을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이상(理想)이지만, 그 이상은 러시아나 유럽에서도 아직 요원하지만, 이 세상에는 오로지 단 한분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물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이야!’ 한없이 선한 백치 공작 미시킨을 통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그려보고자 했다는 얘기입니다.

실패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 부부가 18678월 바덴바덴에서 제네바로 가는 도중에 들른 바젤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16세기 독일화가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를 직접 보기 위해 바젤 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그림을 보고 압도당했습니다. 그는 그림 앞에서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멈춰 섰습니다. 그는 너무나 참혹한 느낌이 들어 다른 전시실로 옮기지 않고 20여분 이상을 그 그림 앞에 붙잡힌 듯 계속 서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본 <무덤 속의 그리스도>는 몇 달 뒤 쓴 <백치>속으로 들어와 소설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됩니다. <백치>는 러시아문학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로 알려진 도스토옙스키가 쓴 가장 노골적인 종교소설입니다. 주인공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설정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왜 그 많은 성화와 이콘 중에서 하필 홀바인의 <무덤속의 그리스도>를 소설 속으로 들여왔을까? 도대체 그림의 어떤 점에 그는 그토록 매료된 것일까?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작품 중의 인물 이폴리트를 통해 홀바인의 <무덤속의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의 <시신(屍身)>을 읽어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시체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받았던 끝없는 고통, 상처, 고뇌, 십자가를 지고 가거나 넘어졌을 때 행해졌던 보초의 채찍질과 사람들의 구타, 여섯 시간 동안 계속 되었던 책형의 고통을 다 참아낸 인간의 시체였습니다.’

동시에 도스토옙스키는 이폴리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그를 신봉하며 추앙했던 모든 제자들과 미래의 사도들, 그리고 그를 따라와 십자가 주변에 서있었던 여인들이 이 그림 속에 있는 것과 똑 같은 그의 시체를 보았다면, 그들은 이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저 순교자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이폴리트의 이런 해석은 대부분의 인간이 보이는 반응일 수 있습니다. 저토록 철저하게 인간적인 형상에서 어떻게 신()의 이미지를 찾아 낼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는 홀바인의 <무덤속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그림이자 인간에 관한 빅 픽처였다는 것입니다.

2) 사랑을 실천하라.

도스토예스키는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두 가지 사랑의 메시지를 줍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마도 사랑을 실천하라가 될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가 공상적 사랑’(love in dreams)인데, 이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인류애(人類愛)’를 꼽습니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척 훌륭하고 멋있게 들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공허한 구호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귀착할 수도 있습니다.

공상적 사랑은 카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의 창작서사시 <대심문관>에서 최악의 형태로 실현됩니다. 절대 권력을 쥔 대심문관이 1백 명의 이단을 화형 시킨 다음날 그리스도가 지상에 강림합니다. 수천의 군중이 그리스도를 뒤 따르는 것을 본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둡니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류의 빈곤과 고통을 무시했다고 거세게 비난합니다. 그리스도는 돌을 빵으로 만들면 인간이 온순한 양떼처럼 너의 뒤를 따를 것이다라는 악마의 유혹을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로 물리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들로부터 자유를 빼았고 싶지 않았기에빵으로 복종을 사라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여기서 은 먹을거리에서 부귀영화에 이르는 모든 물질적 조건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선택의 자유에서 절제, 성찰, 도덕, 윤리에 이르는 정신적인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대심문관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영원한 모순 속에서 허덕이는 무력하고 비천한 존재이므로 선악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끔직한 짐이며 무서운 고통입니다. 대심문관은 결국 인류의 수학적인 행복을 위해 빵의 분배가 가능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대심문관은 현대의 전체(全體)주의를 예고합니다. 공상적인 인류사랑에서 전체주의의 악몽이 시작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공상적 사랑에 대한 대안으로 실천적 사랑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을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솟구쳐 나오는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대변하는 노()수도사 조시마 장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얻기 힘든 것입니다. 구하려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연한 어떤 순간이 아니라 어느 때에나 실천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시마 장로는 실천적 사랑은 공상적 사랑에 비해 가혹하고 두려운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실천적 사랑은 인간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공상적 사랑과 구분됩니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한 사람에서 시작합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처럼 사람은 <>와 접함으로써 <>가 됩니다. <>속에 비춰진 나를 보면서, <>속에 비춰진 너를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나와 너는 모두 똑같이 사람다움의 씨앗을 간직한, 그래서 똑같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의 <><>는 비로소 평등한 존재입니다. 이때의 <우리>만이 배제와 증오, 혹은 이해관계로 인해 일시적으로, 우연하게 형성된 <집단>을 넘어서 진정한 공동체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도인 도스토옙스키는 영원불멸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것은 거의 언제나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천국과 지옥이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천국은 건설할 수 없지만 지옥은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실천적 사랑의 불가능이 곧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오랜 역사를 고난 받는 민족으로 살아온 역사를 지닌 우리 한반도이기에 남북화해의 귀중한 시점에 화해자로 살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 그 사명적 삶, 책임적 사랑을 실천하라는 고난의 종의 가르침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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