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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분단의 장벽을 넘으신 에수님

이선규 (서울남노회,대림다문화센터,목사) 2019-10-05 (토) 15:36 4년전 1772  

분단에 서신 예수님 요한4:19-24(이 선규목사 대림 다문화 센터 대표 연합교회 담임)

세상에 답답한 경우가 많으나 그 중에도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를 하기는 하는 데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계속 답답해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참 놀라운 대화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대화가 어떤 의미에서 놀라운 대화였나?

그것은 담을 넘은 대화였다는 점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민족의 담을 넘은 대화였습니다,

여자에게 대화를 한 점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는 것은 놀라운 대화였으며 또한 인생의 근본 문제를 다룬 점에서 놀라운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목의 갈증에서 심령의 갈증을 생각하게 하셨고 육의 생명을 위해 물이 귀하 듯 영을 위한 심령의 생수를 마셔야하고 땅위의 일시적 생수를 마셔야 하듯 저 하늘의 영원한 생수로써의 자기를 전해 주시는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은 영원한 생수이신 주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고 물동이를 뒤에 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의 후유증과 사상적 분쟁과 갈등에의 한 부산물은 분단임을 우리는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분단으로 인한 후유증과 비극을 경험한 나라는 월남과 독일, 인도지나 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한국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통일을 이루었지만 우리나라 만은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역사는 아주 거슬러 올라가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에 의해서 이룩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은 그의 아들 솔로몬의 통치를 끝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은 앗수루에 의해 남쪽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함락되어 노예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583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으로 부터 귀환 허락를 받고 유대 민족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분단 된지 400여년 만에 하나로 되었고 그 때부터 예수님 당시까지 그런 형편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분단 된지 900여년 그리고 회복 된지 500여 년이 지난 예수님 당시 까지도 분단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는 사 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분단의 후유증과 이에 대한 주님의 극복 방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민족의 순수성 상실

혈통의 순수성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 과 북으로 나뉘면서 북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남 유다는 예루살렘을 도읍지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앗수루가 갈등과 시비가 사마리아를 함락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외국으로 이주시켜서 결국은 혼합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 왕국은 비교적 혈통의 순수성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혈통에 대한 갈등과 시비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시비와 갈등은 예수님 당시 까지도 계속 되었습니다.

주님이 수가성에 이르러서 우물가에 않아 쉬실 때에 물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듯 감정으로 대립된 사람들마저도 사랑으로 영접함으로서 요청을 받고 여인에게 물을 달라는 말을 건네셨고 그 여인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민족 간의 갈등 종족간의 갈등으로서 분단의 후유증인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같은 조상의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돌리며 외면하고 살아 왔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위해 사마리아를 통과 하려고 할 때 그곳 사람들이 길을 막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화가 나서 사마리아를 불바다가 되도록 하나님께 천사를 보내 달라고 기도 할 것을 주님께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철저히 원수지간으로 살았습니다.

포로에서 회복 된지 500여년이 지났건만 그 때까지도 후유증은 이렇게 심각 했습니다.

그런 상황 에서 주님이 하신일이 무엇 입니까?

우선 그들 사이에 있는 지역감정을 없애도록 노력 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 이면서 유대인의 교만한 자부심을 책망 하셨고 반대로 사마리아인의 장점을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가 그 좋은 예입니다.

도적맞고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모른 채 그냥 지나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유대인 즉 제사장과 레위인 이며 죽어가는 이 웃을 살려준 사람이 유대인으로 부터 경멸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주님의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물 길러 온 여인과 대화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초청을 받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렇듯 감정으로 대립된 사람들마저도 사랑으로 영접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분단의 장벽을 헐어 버리려고 노력 하셨습니다.

나아가 분단의 역사의 아픔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둘째 신앙의 갈 등

남과 북으로 분열되면서 북 이스라엘은 그리심 산에 신전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며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분단으로 서로 왕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정통성을 서로 주장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북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예가 많았고 그때 마다 이방 여인인 왕후가 들여온 이방신도 하나님과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은 잡신의 집합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남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대한 유일신 신앙을 견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다의 신앙은 오히려 교만과 형식으로 흐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한층 깊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벨론에서 해방 되어 귀환한 후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수리하게 되는데

그때 사마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그 후500여년이 지난 예수님 당시까지도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가성의 여인이 주님에게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정통인지 물었습니다.

즉 그리심 산 인지 예루살렘 인지 알려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처럼 신앙적 갈등과 마음의 깊은 골은 오래 오래 동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북쪽의 신앙은 우상 숭배와 혼합된 것이었고 남쪽 사람들의 신앙은 생명력이 없는 형식과 외식의 제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초월한 참된 길을 제시 하셨습니다.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 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 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배하는 장소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초월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초점을 맟 추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 과 북으로 갈라진지 70년이 지났습니다. 정치적인 통일은 어쩌면 곧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우리의 자손에게 까지 오래 갈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분단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치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어떻게 가능 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에게서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분단의 후유증을 직접 경험하고 대처하신 주님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진실입니다. , 과 북의 사람들을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지금 북의 우상숭배 신앙이나 남쪽의 생명력을 잃은 형식적인 신앙은 반드시 정화 되어야 하고 또한 정상적인 신앙 상태로 회복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나아가 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 고백자로 변화 됨

여인이 예수님을 처음 대면하였을 때는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 이라고 호칭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본 여인의 눈에는 그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교류하기 싫어하는 유대인 중 한명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알 듯 모를 뜻한 말씀으로 자신을 소개 하면서 네게 생수를 달라하는 이를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생수를 구 했을 것이라고 하시자 여인은 혼동이 왔습니다. 경계해야 할 유대인이 아닌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여라고 호칭 합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 하는 것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알아보고 그 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정작 메시야가 찾아 왔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모습으로 가까이 왔습니다.

그를 마주하고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그에게 생수를 줄수 있는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 이유는 우물은 깊은데 생수를 줄 수 있다 고 큰 소리 치는 이 분은 두레박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우리들의 판단 기준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낯선 유대인 남자는 사마리아 인들이 조상이라고 숭배하고 있는 야곱보다 위대 할 수 없다는 전제적인 신앙 때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 전제가 분명히 이 여인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야곱 보다 위대할 수 없는 이 낯선 남자가 무슨 생수를 줄 수 있겠는가? 라는 불신하던 여인에게 예수님과 대화가 진전 되면서 이 여인은 이분은 보통 사람은 아니 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유대인 남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메시야임을 발견하고 이 우물을 내게 주십시오. 예수님에게 요청 합니다. 이 여인의 요청은 상당히 상징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의 말에서 오늘 현대인 들이 목이 말라 생수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신체적인 장애나 제약이나 질병처럼 되어 사람의 건강과 성함을 막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사이비 종파가 많고 그 사회적 폐해가 적지 않게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속은 잘 해야겠지만 단속이나 공권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목말라 있는 것을 기성교회들이 채워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오늘 많은 현대인이 그런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여인처럼 생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리쳐드 블랭카드가 감동적인 신앙 시로 표현 하였습니다.

주님 저희 잔을 채워 주소서 라는 시가 곧 그것인데 이시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저는 만족 시킬 수 없는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저희 주님께서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르는 법이 없는 나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라 주님 저희 잔을 채워주소서.

주님 제 잔을 듭니다. 오셔서 저희 영혼의 갈증을 생명의 떡으로 배부를 때까지 저를 먹여 주소서.

제 잔을 채워 주소서 저를 온전하게 만드소서.

이 신앙 시는 우리말로도 번역 되어 한국기독교인 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습니다.

또한 캐드린 핏셔라는 여성 신학자는 여성 신학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현대 여성들도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생수를 목말라 하고 있다 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현대 여인들은 생수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들은 우물가에서 고대 전통으로 부터 생을 물 길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내적 우물을 발견하고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염원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비전과 희망의 옹 달 샘이기를 원하고 그들의 선물을 사용하여 그들의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를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있다.

우물가 에서 예수를 만기 전에 경험했던 온갖 생의 목마름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해결되었음을 이 여인은 경험했습니다.

목이 말라 목 타는 사람이 생수 한잔을 마셔 시원하게 된 것처럼 이 여인은 그런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마신 생수는 어떤 물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와서 그의 생수로 우리의 갈증을 해결 하십시다.

목을 축인 사람들은 목이 갈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이 샘에로 데리고 가십시다.

그리고 분단의 역사를 화해의 역사로 바꾸시려 했던 주님의 교훈을 배워 민족의 평화 통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과 그리스도인이기를 소원 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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