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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본문 설교: 대림절 넷째 주일(12월 22일)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9-12-23 (월) 13:41 4년전 2419  

23:5~8

마 1:18~25

요일 4:13~21

 

 

 

옛날에는 서커스 공연을 TV에서 이따금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서커스 공연 중 가장 멋진 것은 공중그네 곡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연로하신 아버지를 따라 서커스 공연에 갔다가 공중그네 곡예에 매료됩니다. 이 곡예에는 긴 그네를 두 팔을 잡고 타다가 공중에서 여러 번 제비를 도는 사람과 반대편에서 짧은 그네에 양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매달려 한가하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주인공은 반대편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헨리 나우웬은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곡예사한테 이런 고백을 듣습니다. 자신이 길고 멋진 그네를 타다가 공중에 몸을 던지는 연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와 갈채를 보내지만 자신이 이런 곡예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은 반대편 짧은 그네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동료라고요. 떨어지는 자신을 잡아 주기 위해서 타이밍을 맞추는 정교함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동료가 있기에 자신이 과감히 몸을 던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동료가 진짜 스타라고 했다는군요.

 

우리 성도의 삶도 서커스 단원과 비슷합니다. ‘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니 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우리 성도들 삶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공중을 나는 곡예사가 담대히 몸을 던질 수 있는 이유는 정교하게 자신을 붙잡아주는 동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 삶의 목적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주님이 있기에 공중그네 곡예 같은 삶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의 성경 말씀 속에는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주님의 구원 역사(役事)에 자신의 삶을 던진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신실하고 성실하게 참여한 첫 번째 사람은 첫 번째 말씀에 나오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선포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립니다. 예레미야의 조국은 남쪽의 유다이고 북쪽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약 150년 전에 앗수르 제국에 멸망합니다. 유다마저도 바벨론 제국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 예레미야는 애통해합니다. 국제정치 시각에서 보면 강대국에 낀 약소국의 설움이지만 예레미야는 신앙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저버리고 또 저버렸던 유다 백성들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던 것이지요.

 

20여 년 전, 다른 농촌 교회에 있을 때 일입니다. 교회 울타리가 사철나무였습니다. 저는 울타리로 사철나무를 심는 것 반대인데요. 진드기가 많습니다. 진드기를 잡기 위해 고심하고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철나무를 살리기 위해, 뿌리만 남겨두고 다 베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가 진드기가 절어있는 사철나무 같았습니다. 예레미야가 40여 년의 선지자 사역을 하면서 돌이켜보려고 했지만 이제 살리기 위한 마지막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다시 사는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 예레미야 자신에게도 괴로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예레미야가 이 힘든 일을 감당한 이유는 이렇게 베임 받은 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첫 번째 말씀이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23:5~8)

 

 

이 말씀에 나오는 가지는 무성한 나무에서 여기저기 뻗어나는 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그루터기에서 다시 피어나는 싹을 의미합니다. 절망의 한복판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소망의 왕(메시야)을 선포하였습니다. 신약의 지평(horizon)에 들어서자 이 왕은 이 땅에 오셔서 참다운 삶을 가르치신 후 십자가에서 희생을 하신 예수님이심이 드러났는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진리를 어렴풋이 보여주는, 구원 역사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눈물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선포하는 동역자로 살아간 사람이 첫 번째 말씀의 예레미야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신실하고 성실하게 참여한 두 번째 사람은 두 번째 말씀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실행되는데 협력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1:18~2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 약속의 실행입니다. 성탄(聖誕)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 관심을 더 많이 갖습니다. 요셉은 혼자 묵묵히 앉아있는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신세이지요. 다행히 오늘 두 번째 말씀은 이 요셉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구봉서씨가 연예인교회 장로님으로 활동할 때 일입니다. 연예인들이 성경 공부하는데 동정녀 탄생을 두고 의견이 많았습니다. 생명공학이 발전하면서 지금은 이런 일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으나 수십 년 전에는 신앙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토론 정리가 안 되니 지켜보던 구장로님이 한마디 합니다. “서방이 괜찮다는데 왜 니들이 난리야!”

 

맥락을 완전히 벗어난 농담으로 어영부영 성경공부를 마무리한 것이지요. 하지만 구장로님 생각처럼 요셉이 처음부터 괜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혼(약혼)은 사실상 결혼이었습니다. 한 집에 살지 않은 것뿐이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임신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요셉은 달리 생각할 수 없었고 통상적인 조치를 따라야 했습니다. 부정한 마리아를 널리 알리고 파혼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을 보십시오. 마리아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부끄러움을 주는 일부 치졸한 남성들과 비교해보십시오.

 

그런 남성들은 상상할 수 없는 배려를 가진 사람이 요셉이었기에 그는 꿈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수용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학문적으로 난해한 주제들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사고의 폭과 깊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요셉이 어떤 점으로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셉은 그 이해력으로 하나님의 뜻도 잘 이해를 합니다.

 

그렇게 요셉은 마리아의 출산을 잘 돕고(cf. 이 주제는 이번 성탄절예배 메시지), 아이 이름을 천사가 지시한대로 예수라고 지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역사에 거창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협력한 두 번째 사람은 두 번째 본문의 요셉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신실하고 성실하게 참여한 세 번째 사람은 세 번째 말씀에 나오는 우리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온전하게 하는 마무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13~21)

 

 

세 번째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세 번째 사람은 누구일까요? 요한일서의 기자(記者)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바로 성도 여러분들입니다.

 

세 번째 말씀과 근접 문맥(7~21)의 소제목을 보통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데요. 아쉽게도 동영상 속의 한 컷과 같은 요약입니다. 이 말씀의 흐름까지 담아내는 입체적인 요약은 구원 역사(役事) 속을 관통하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래야 이 말씀의 바탕에 얼기설기 깔려있는 예수 내 구주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성령의 동행하심을 누리다는 구원론을 반영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동영상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마치 전기를 흐르게 하기 위해 발전소를 만들고 변전소를 만들고 전선을 연결하는 거대한 전기 공사와 비슷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공사(工事)’의 목적도 하나님의 사랑(“그 사랑”)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기 공사는 전기 기구의 작동과 별도로 마무리되지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 공사의 완성(온전, 성취/ 2:5, 4:17, 4:18)은 성도 여러분들의 삶을 필요로 합니다. 구원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도 하고(17)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기도(18) 합니다. 온전함을 가르는 관건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 속에 흐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는 세 번째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은총을 소극적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을 유통시켜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구원의 약속을 선포하는 협력자였다면,

요셉은 구원의 실행을 도운 협력자이었고,

우리들은 구원의 완성을 책임지는 협력자들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게 하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히 누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

세본문 설교를 돕는, 말씀목회연구원에서 작성 요청한 설교문입니다. 갑작스럽게 쓰게 되어 금요일 마감을 지키지 못했지만 어제 주일예배 때에는 이 신앙교훈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말씀목회연구원 관계자께 죄송한 마음 표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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