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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아기 예수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9-12-25 (수) 07:38 4년전 2097  

*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처럼 설교 한편 나눕니다.

 

이주민 아기 예수


마태 2:13-18                                                                                  19. 12. 25(성탄절)


오늘은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첫 번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기쁘고 즐겁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님의 피난과 이주민들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피난(避難)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쟁으로 인한 피난입니다. 그리고 홍수로 인하여 물피난을 갈수도 있고 지진으로 인하여 안전지대로 피난을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집 아저씨는 술만 먹었다하면 부인을 때리고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만 깨면 순한 양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술마시고 집에 온다는 것을 알면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옆집으로 피난을 갔다가 남편이 잠들고 난후에 돌아갑니다. 이것도 피난이라면 피난이지요.


또한 아주 추운 날 불이 나서 피난을 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6.25전쟁과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 등에 의해서 임금과 대통령이 피난가고 전국민이 피난하며 국토가 유린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피난길은 고생입니다. 피난길은 두려움이 함께하는 길입니다. 피난길은 고달픕니다. 피난길은 배고픈 길입니다. 피난길은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피난길은 약자가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 가셨음을 말씀합니다.

▣ 먼저 13절에서 15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신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면 나도 가서 경배하리라 하였던 헤롯은 아기를 찾아 죽이려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그때부터 헤롯의 음흉하고도 끔찍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보다 항상 앞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헤롯의 끔찍한 궤계(詭計)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셨습니다.


이런 아기를 죽이려한다는 음모가 헤롯궁에서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요셉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후사정을 요셉은 몰랐지만 하나님이 지시하는 말씀이므로 지시함을 받은 후에 요셉은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가겠다’ 생각하지 않고 그 밤에 일어나서 피난봇짐을 만들어지고 낮선 이국땅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언제나 살길이 열립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헤롯의 군대가 베들레헴에 들이닥쳤고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죽였습니다.


▣ 16절에서 말씀입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왔다가 아기를 낳는 바람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베들레헴에 눌러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물로 주고 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베들레헴에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되면,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것에 대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을 것이 분명하므로 아예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살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부부였습니다. 누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이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들이야 말로 자신의 왕위를 위태롭게 흔들 반역자라고 보고 그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세계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헤롯이 다른 왕이 태어났다하므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 했으나 그 아기를 찾을 수가 없자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마귀가 영구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하여 구주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이 아기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진 아이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베들레헴 모든 아이들을 다 희생시켜서라도 이 예수만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온 세상 사람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뻬내어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17절과 18절 말씀입니다.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말씀들을 이해하려면 구약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한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벤냐민을 낳다가 난산하는 바람에 죽어서 베들레렘 가까운 곳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오래전에 죽은 라헬이 슬퍼하며 크게 통곡한다라고 한 것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되어 가면서 라헬의 무덤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라헬이 무덤에서 일어나 통곡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오늘의 라헬은 누구입니까? 바로 눈앞에 구원할 구주가 나셨지만 그런 것도 모르고 자기 아이만 잘 키우며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이 그 당시의 라헬이었습니다. 통곡하는 라헬이 되지 않도록 시대를 분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좇아가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하니 그 밤 그 즉시 순종했습니다. 아기 예수와 함께 가는 피난길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나고 무엇인지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 거리를 혼잡하게 오고 갑니다. 믿는 이들도 성탄절이 돌아오면 기뻐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서로 모여 “Merry Christmas”, ‘즐겁고 기쁜 성탄절 되세요!' 하면서 인사를 나눕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성탄인사만은 기쁨이 넘쳐나는 인사인 것 같습니다.


예수 탄생의 분위기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대형쇼핑센터의 넘쳐나는 화려한 분위기는 더욱 더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매우 초라한 마구간에서 여장을 풀고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그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헤롯이 어린아이들을 학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길에 접어듭니다. 돌아볼 겨를과 짐을 제대로 차릴 겨를도 없이 황급히 마구간을 벗어나 머나먼 외국의 땅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첫 성탄의 분위기는 이처럼 급박하였고 삭막한 분위기였습니다. 황급히 이집트로 도망을 가는 어린 아기 예수 부모들의 귀에는 헤롯에 의해 학살되어진 영아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아이들을 잃고 절망 속에서 외쳐대는 어머니들의 외침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이렇듯 첫 성탄은 참혹한 분위기였고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의 일들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천사의 기별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아가서 경배하는 이야기는 매우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마태복음의 기록은 동방박사의 출현과 더불어 소동하는 헤롯왕을 비롯한 당시 지배계층의 모습과 더불어 영아학살로 이어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이 태어난 사건과 헤롯에 의한 잔악한 영아학살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일어난 헤롯의 영아학살사건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체제가 얼마나 불의한 체제였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체제 안에서 인간 실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헤롯왕을 불안케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불의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 그들은 ‘안전하다’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불의한 삶을 정당화 시켜왔습니다. 그러나 돌연한 예수님의 탄생은 불의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헤롯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성공에 방해가 되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는 제거할 용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영아들을 학살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영아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데 필요한 소모품일 뿐이었습니다. 헤롯체제하에서 인간은 단지 몇몇 지배계층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소모품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영아들의 죽음은 이러한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는 사건입니다.


사람이 무시되는 사회


오늘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간을 한낮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다 사용하고 쓸모가 없으면 버려버리는 그러한 가치관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당시의 체제 속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여 무고하게 죽어간 수많은 영아들의 비명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이러한 불의한 체제의 모순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는 세상, 인간을 목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지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은 예수님의 탄생을 방해하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사회는 또 다시 2000년 전의 영아학살을 되풀이하는 사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특별히 신자유경제체제와 그 체제의 지구촌화현상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져 가고 있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 중산층의 괴멸, 소수에 의한 경제와 권력의 독점은 인간의 삶을 소모품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이러한 비인간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또 다른 영아학살사건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날에 죽어갔던 영아들의 비명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즐거운 캐럴소리와 상품화된 크리스마스 축제에 파 묻혀 자칫하면 망각하기 쉬운 베들레헴에서 죽은 아이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체제의 희생양으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영아들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사회에서 소모품 취급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짓밟힌 사람들의 권리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들뜨기 쉬운 계절에 성탄절 예배를 통하여 2000년 전 첫 성탄 날에 죽어간 영아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소외되었던 베들레헴에서 죽었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는 늘 승리자, 기득권자, 이미 이룬 자들에 대한 기억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성탄절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역사는 구세주의 탄생과 함께 죽어갔던 베들레헴의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외마디 비명소리를 기억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무고하게 억압받고 죽어가는 현대의 ‘베들레헴의 죽은 아이’들을 기억함으로서 성탄절을 맞이하고 또 그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억울하게 죽어간 ‘베들레헴의 죽은 아이들’, 게다가 기독교에 의해서 설교에서조차 소외되었던 2000년 전의 ‘베들레헴의 죽은 아이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오늘도 구석구석에서 거대한 사회체제의 소모품으로 전락되어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대의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 . .”(창1:27)


다문화 이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하며


첫 성탄은 참혹한 분위기였고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분명 이주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이집트 이주민이었습니다. 우리는 임진왜란, 6.25 등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세계 유랑생활을 했던 민족입니다.


한국은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을 2010년도에 비준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 나라는 이 문화다양성을 얼마나 유지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기조로 해서 한국에서도 문화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고, 이제 전국 9개 지자체가 문화다양성 조례를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보수 단체들과 기독교 단체들은 이슬람과 난민 확산이라는 우려로 몰아붙이며 일방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탄절에 2,000여 년전 난민의 신분으로 이집트로 피난가신 (마 2:13-15) 아기예수의 탄생을 감사하는 기독교단체들의 난민반대, 외국인반대는 매우 비성서적이고 반신앙적이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인종, 국적, 성별, 종교, 문화의 차이로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결과 이 땅에 화육하신(요 3:16)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이 땅의 수고하고 짐을 진 모든 자들을 참된 쉼에로 초청하십니다(마 11:28). 이 고귀한 초청에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음을 저희는 믿습니다. 문화다양성 조례 제정에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단체들은 올바른 신앙의 관점을 견지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 .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현재 문화다양성을 반대하는 그룹들은 ‘왜 외국인들에게 혈세를 낭비하느냐?’, ‘국민들이 역차별을 당한다!’, ‘왜 단일민족의 전통을 훼손하느냐?’, ‘난민과 이슬람으로 인해 사회혼란이 야기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거짓 주장을 퍼뜨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2018년에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납부한 세금은 1조5천억 원, 기타 과태료, 수수료 등으로 납부한 돈은 총 2천5백억 원으로써, 총 1조 7천 5백억 원을 정부에 납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세금을 안낸다는 가짜 뉴스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또 다문화 예산이 너무 많다는 억지 주장을 많은 국민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다문화 예산은 고작 1천5백억 원 수준으로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우리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과 기타 과태료 총금액의 10%도 안 됩니다.


우리는 유럽의 많은 선진국들이 이미 난민과 이민자들을 받아들였고, 다문화, 다인종 국가로 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이민 국가들은 세계 경쟁력을 갖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지구촌시대, 세계화시대, 다문화시대에 한국 사회가 단일민족 민족임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오히려 문화다양성을 강조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문화다양성의 확산을 위해서는 유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평생교육기관 등에서 문화다양성의 필요성과 효과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또한 자라나는 미래세대가 올바른 인성과 세계관을 갖춘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서 다문화축제, 다문화거리 조성, 국제교류행사 등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학습하는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탄생과 관련하여 인권과 이주민들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약자들의 인권과 이주민의 보호와 사랑으로 구주 탄생과 함께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나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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