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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겪고 난 후 욥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 세 가지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20-02-24 (월) 11:24 4년전 2263  

욥기...

20대 초,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시몬스 침대처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믿음을 가진 욥을 말하는 책으로 알고 있었다가 이 책의 핵심을 깨닫고 제 믿음의 세계가 한 단계 상승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욥기의 핵심이 40:1~42:6에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다음 구절을 오랫동안 소홀히 여겼습니다. ‘해피 앤딩을 위한 장치 정도로 폄하했지요. 이 부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신앙교훈이 있다는 것을 일시적으로 알았던 때는 2017, 엘런 F. 데이비스라는 여성 구약학자의 글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 신앙교훈을 당시 주일설교에서 다루었는데 지금 보니 욥기 전반에 대한 설명의 일부로 언급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작년 8월 말 목회자 수양회에서 송태근 목사님 강연을 들으면서였습니다. 이 정도까지 힌트를 얻었으면 이 부분을 한번 진지하게 정리해볼 법한데 사람 일이 그렇습니다, 무엇 놓치려면 이상하게 지나치게 되지요.

 

지난 토요일에야 이 말씀에 대한 묵상을 급히 마무리하고 예배 시간에 전했습니다. 평소와 크게 다른(성가대 서지 않고, 모두가 마스크 쓴 채 예배드리는) 예배를 준비하면서 허겁지겁 본문 말씀을 욥기 42:7~15 정하면서요. 세 대지 중 두 개는 띄엄띄엄 다른 분에게 얻은 것이고, 여기에 추가한 다른 한 개는 제가 채웠습니다. 그 얼개를 여기서 나눕니다.

 

 

 

큰 고난을 겪고 다시 살아가는 욥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태도 세 가지

 

 

 

(1) 욥은 용서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42:7~10a).

 

[제가 묵상한 부분입니다. 주석서로 검증을 해야 하는데 성경만 읽고 정리해서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 속에서 받은 상처는 세 명의 친구들이 판단과 말로 준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세 명의 친구들에게 화가 나셨으며 벌주시는 것까지 고려하고 계시지요. 다만 용서받을 기회를 주시는데, 조건은 피해자인 욥에게 용서를 받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기억나실 겁니다(이청준의 벌레이야기”).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살해당한, 이 엄청난 충격을 엄마는 믿음으로 겨우 추스르면서 어느 날 유괴범을 용서해야겠다 마음먹고 교도소로 면회갑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직접 만난 유괴범의 태도는 엄마가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이지요. 엄마가 용서를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하나님께 용서받아서 평안하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유행하는 말로 이 유괴범은 정신승리’, 아이 엄마는 멘붕을 겪게 되지요.

 

밀양의 유괴범한테 오늘 말씀은 나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 세 친구가 용서받는 조건이 피해자인 욥에게 용서를 받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용서에 관한 세심한 원리들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무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비상식(非常識)을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요구하신 것, 구약의 속건제).

 

오늘 말씀은 아울러 은근히 욥에게도 압력을 넣습니다. 용서에 관한 절차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켜 주시니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일 친구들이 사과하지 않으면 욥도 용서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래야 한다면 욥이 용서할 수 있는 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들에게 묶여있게 됩니다. 징글징글하군요.

용서는 제한적 권리가 아닙니다.

욥은 친구들의 태도와 상관없이 용서할 권리가 있습니다.

잘못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욥이 아닌, 하나님께서 결산하실 일입니다.

 

인생은 고난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상처들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것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받은 것도 있지요.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이나 다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부질없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그런 마음이라야 회복의 은총이 잘 스며듭니다.

 

 

(2) 욥은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아픔까지 공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42:10b~13).

 

http://www.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_01&wr_id=39225&page=4&p_id=twotalent 

 

 

 

(3) 욥은 소소한 일상 생활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과 삶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42:14~15)

 

 

욥과 그의 친구들이 특정 주제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하였지만 사실 이들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친구인 것이지요.

 

욥기 1장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흠이 없고 정직하고 악은 멀리하였는데 실상은 아주 철저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자신의 생일 때가 되면 돌아가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욥의 가정이기 때문에 파티한다고 해서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욥은 자녀들이 부지불식간에 죄를 지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자녀들 하나하나의 죄를 생각하며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욥이 어떤 사람일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빈틈이 없는 사람이며 즐거운 일은 멀리하고, 아름다운 것은 즐거운 일이니 아름다운 것도 멀리하였을 겁니다.

 

그러한 욥이 큰 어려움을 겪고 그 연단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후

그의 생활 태도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다시 누리게 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하며

삶의 다양한 방식에 대해 관대해졌으며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러한 변화를 하였다는 단서는

그가 지은 딸들의 이름에 있습니다.

 

당시에 비둘기”, “계피 향기”, “아이샤도우라는 뜻을 가진 이름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샤도우(눈화장)는 파격적이고요. 또한 아주 옛날인데도 딸들에게도 아들들과 똑같은 상속을 하였습니다. 고난을 겪은 이후의 욥에게서 시대적, 인간적 편견에 갇혀있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로 그가 이런 말을 하였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 전,

결국에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어떤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전통적으로 진()()()라고 이야기합니다.

옳은 것이고

올바른 것이고

는 이른바 아름다운 것인데요,

 

저는 아직 (아름다움)에 관한 일반적 정의를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것에서 종종 아름다움을 경험합니다.

멋진 풍광이나 건축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어떤 성도에게서 신앙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어떤 증명 과정에서는 수학적 아름다움

어떤 분의 삶에서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보다는 , “보다는 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이런 저에게

결국에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그분의 말이

세 번째 가치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경종으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큰 고난을 겪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욥에게 일어난 변화가 이런 것 아닐까요? 이전의 율법주의자 욥은 옳은 것올바른 것에 집중했을 겁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요. 큰 시련을 겪은 후 신앙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면서 그동안 못보았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https://pparsp.blog.me/221822009338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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