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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코로나 이후의 교회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20-04-28 (화) 06:06 3년전 2798  






지난 주 23일 충남NCC에서는 이정배 교수를 강사로 정례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시의적절한 아주 유익한 강의였는데 A/4 11쪽 분량을 서너 페이지로 요약하여 나눕니다.

 

문명 비판적으로 본 코로나 바이러스, 그 신학적 재해석과 교회

이전 문명과의 절연을 과감히 선포 필요 웅변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생태학자들은 2020년부터 향후 10년간을 지구생존을 위한 남은 시간으로 경고했다. 산업 체제를 바꿔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최소한 40%로 크게 줄여야 미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신년벽두에 중국에서 시작, 전 세계로 전파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가 맞을 생태위기의 한 양상(樣相)이자 징조라 생각한다.


지난 세기 아프리카 적도 원시림 속 람바르네 병원서 일하던 A. 슈바이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목도하며 진보적 세계관을 추동한 서구문명의 종말을 적시했다. 생명외경을 토대로 그의 문화철학이 생성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국가 사회주의(히틀러)체제 부정을 위해 자연신학 일체가 거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슈바이처를 두 가지 이유로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아낌없이 삶을 내준 지구가 다시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는 생존이 가능한 홀로세 말기에 이르렀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인간 삶의 흔적들이 과도하게 축적된 결과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교회역할은 퇴행적이었다. 예배를 이유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부한 것이다. 유흥업소들과 비교하며 예배중지를 교회탄압으로 몰아갔고 정권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연류로 교회는 자신들이 비판하던 신천지와 차이 없는 집단으로 매도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 정신이 실종된 결과일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회와 예배를 앞세운 것은 예수 정신, 성육신 사상과도 걸맞지 않는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으로 오신 이유 말이다. 이점에서 ‘성육신의 신비는 구체적 현장에서만 재현된다’(이반 일리치)는 말을 깊이 되새기면 좋겠다. 일시적 예배 중지는 사람을 살리는 일로서 결코 안식 계명을 결코 위반한 것이 아니다.


자연 또한 정화되어 무한 생명을 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바다 거북이가 돌아와 알을 낳기 시작했다. 물론 자본화된 종교, 즉 사람이 모여야 돈(헌금)이 모이는 구조에서 특히 작은 교회들이 겪는 고통이 있지만 교회네 빈익빈/부익부의 문제를 풀어야 할 숙제이다.


여하튼 금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 생산 네트워크를 멈춰 세웠다. 전 세계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해야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수없는 기업이 도산되어 실업자를 양산시킬 것이고 그럴수록 국가의 책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인류가 쌓은 부(富)가 졸지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수십만의 목숨도 하루아침에 잃었다. 이전 상태로의 회귀가 목적이라면 코로나 사태가 반복·재현되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글 모두에 필자는 새 문명, 새 종교 그리고 새 신학을 말한 것이다. 우리들이 정상(Normal)이라 생각했던 삶의 기본좌표도 이동시키고 세계 구심점도 이동 시켜야 할 시점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발달시킨 선진국의 붕괴를 보며 이전 문명과의 절연을 과감히 선포하고 기독교의 미래를 달리 고민할 필요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모든 문명은 붕괴한다. 그것이 인간 조건이다‘(H. 파르칭거)란 말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존 ‘정상’이라 여겼던 것을 모두 붕괴시켰다. 인류는 지금 ‘뉴 노말(New Normal - 새로운 기준)’을 요청받고 있는 중이다. 경제를 비롯하여 정치, 교육, 종교 그리고 일상적 삶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말이다.


우선 코로나 바이러스는 비교우위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생산체계를 붕괴시켰다. 제조업을 중국에 의존한 채 군수산업에 몰두했던 미국식 경제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게 되었다. 향후 도시문화의 붕괴도 예견할 수 있겠다. 익명성, 효율성, 자율성에 바탕 한 도시문화의 한계는 분명하다. 성서가 인류 최초로 도시(놋)를 건설한 사람을 가인이라 칭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 심지어 미국까지 세계인들 모두가 일정부분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 흥미롭다. 엄청난 재정을 풀어 기본(재난)소득을 마련코자 한 까닭이다. 하지만 걱정도 없지 않다. 이런 비상상황이 거듭 상시화될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벌거벗은 생명, 곧 생명 주권을 담보로 인간 감시, 생체감시, 곧 전체주의 국가가 탄생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지젝) 이 점은 종교의 경우에서도 유효하다.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다는 자각과 소통된다. 율법적 종교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종교인이 되란 말이다.


코로나가 인류 문명을 치유하는 교졍자가 될 수 있을까? 코로나 이후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삶의 기준점을 달리 하는 시작이어야만 했다. 가보지 않은 길로 나가는 힘을 우리 모두는 상상하며 연대해야 할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의당 앞장서야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흐름을 사회주의로 몰아가며 수구를 지향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얍복 강변에서 하느님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를 다친 야곱, 그래서 ‘절뚝이며 걸었다’는 야곱의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 천사로 명명된 자신의 진짜 자아와 씨름했고 그 과정에서 환도뼈를 다쳤기에 그는 이제 예전처럼 빠르게 질주하는 인생을 살 수 없었다.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 느렸기에 그는 비로소 주변을 살필 수 있었고 급기야 형의 얼굴을 하느님처럼 대면할 수 있었다. 절뚝거렸기에 예전과 다른 기준점이 생겼고 그로써 하느님을 보았으며 모두와 화평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류세, 자본세로부터의 탈출(구원)을 위해 ‘절뚝거리는’ 야곱의 삶, 그 이미지를 다시 소환하고 싶다. 그동안 인류는 얍복강변 이전의 야곱처럼 살아왔다. 자연과 이웃에 급기야 하늘에 큰 해를 입히고 죄를 지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기기만 했던 자연에 질 줄도 알아야 하고 이웃을 더 크게 연민하며 그와 연대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흔히들 역사가 코로나 사태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얍복강변 이전과 이후의 야곱의 모습과 견줘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 하에서 이기적 모습을 보였던 기독교, 세인들로부터 저들이 비판하던 신천지와 다를 것 없다 폄하 받던 기독교의 살 길도 바로 여기서 찾을 일이다. ‘절뚝거리는’ 야곱의 이미지, 그에 걸 맞는 우리 사회의 새 기준점을 학자들은 ‘성장신화’와의 이별, 곧 ‘탈’성장이라 칭한다. 미래를 염려하는 사회 시스템으로서 ‘수축사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영역에서도 ‘작은 교회가 희망인 것을 역설한지 수년이 족히 지났다.


출산율이 감소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의 성장 신화는 가능할 수 없다. 더욱이 종교적 권위를 실추시켰던 교회의 경우 수축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향후 이성과 과학의 힘을 더욱 요청받을 것이다. 수축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사회적 자본’의 확충이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가치를 위해 기본소득 나아가 기본자산(피케트)과 같은 자리 이타적 (복지) 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도 이런 토대 하에서 재구성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살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 찼다는 생명외경 사상의 자각을 각성하자. 살려는 의지로 인해 다른 의지를 꺾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그 이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지속력을 지닐 수 있다.


주지하듯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처능력을 주목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이 격리, 봉쇄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수천만이 움직이는 총선마저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점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수 십여 나라에 진단키트가 수출되었고 방역 노하우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중이다. 독재의 역사를 살면서도 민주세상을 만든 우리나라이다.


한국의 성공을 ‘모성적 돌봄’의 차원에서 이해하자. 서구 기독교의 부권적 명령체제로서 국가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모성(유교)적 돌봄 시스템의 작동 탓이란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유교 종주국인 전체주의적 중국과도 다르고 민주주의 본류인 서구와도 다르다. 코로나 사태는 경제, 정치, 생태영역에서 뿐 아니라 항차 문명 간의 대화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하나 더 짧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코로나 사태에 직면한 남북관계에 관해서이다. 코로나 사태로 국제적 연대가 화급한 상황에서 북쪽 담장이 무너지는 사건을 기대해 본다. 많이 회자되듯 개성공단을 마스크 및 진단키트 생산 공간으로 활용하다면 세계가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배제보다는 연대를 전 세계가 원할 것이다.


교회가 장벽과 이념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 줄 것을 기대한다. 장벽을 넘어 통일 열차의 시작을 역시 코로나 사태에 직면하여 적극 검토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화는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시점에서 죽은 영혼들에게 살아있는 자들이 바칠 수 있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기독교(회)가 코로나 사태이후 새문명의 표준점을 찾는데 일조할 것을 바랄 뿐이다. 이를 위해 ‘다른’ 기독교가 여실히 필요할 것이다. 뉴 노멀(새로운 기준)의 선구자적 역할을 구하며 같이 생각해보자.


1. 예배란 무엇인가? -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환호를 지속하는 일

2. 성서 줄기의 재확인 - 창조, 희년, 출애굽, 하나님 나라(다석 유영모나 함석헌)

3. 안식일을 위한 종교에서 사람을 위한 종교(향벽설위/향아설위)

4. 흩어지는 교회(에클레시아) - 주일교회에서 일상의 종교로(My Life is my Message)!

5. 평신도 사제직 - 가정 예배 강조 - 온라인 예배의 함정(한계)


6. 주일 집중 예배의 다변화 - 이웃찾기, 문화체험 등

7. 교회 공동체 - 해석의 다양성과 복음의 정치학(하나느님 나라 운동) - 초대교회 하나님 해석의 다양성, 작은교회 운동 - 축소사회의 등장

8. 녹색은총과 적색은총의 조화 - 단순성(탈결핍), 로마나 자본주의 체계와 다르게

9. 새로운 영성 운동 - 공감력의 확대(이타자리)

10. 공공복지(사회주의적 요소)강화 - 유아 및 장애인, 노인, 이주민, 그리고 기본소득


11. 문화적 다양성/종 다양성 존중 - 동일성에서 차이의 존중

12. 하느님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한다(Missio Dei) - 구속사에서 보편사 그리고 우주사의 신학

13. 성직으로서의 목회에서 직업으로서의 목회

14.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신학 교육의 재구성 - 오리엔탈리즘 극복

15. 근대 이후 시민 사회 속의 기독교(회)

16. 교회개혁을 위한 열정 - ‘다른’ 기독교로서 JPIC 신학

 




 

 


 


신솔문 2020-04-29 (수) 07:31 3년전
의미있는 모임하셨군요~ 깊이 성찰한다면 코로나19로 인한 상황이 매러니즘에 빠져있는 예배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수도원의 수사들이 고독하게 드리는 예배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온라인예배보다는 전통적인 가정예배를 '연습'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했는데, 5번에서 그런 점을 언급하시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비슷한 언급을  감신대 오덕진 교수님(예배학)이 "코로나19시대, 예배의 본질 성찰하는 질문 던져야"(뉴스엔조이)에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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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떠한 식으로든 가정에서 예배해야 하는 오늘날의 경우, 무조건적으로 공급·수용되고 있는 영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의 구조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왜 가정에서 주체적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일까? 피로 섞인 혈연 친족 집단만이 가족이라는 형태의 정답이자 전부는 아닐 텐데, 도리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 한 몸을 이룬 하늘 가족인 교회 공동체가 초대교회적 영성으로 모이고 예배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혹은, 단순히 안수받은 성직자가 없다고 해서 예배할 수 없는 것일까? (설교가 곧 예배 자체는 아닌데) 설교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예배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빵빵한 반주 음악이 있어야만 찬양이나 예배 자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소규모 집단으로는 주체적으로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핑계들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이제껏 많은 교회는 명절 때가 되면 그보다 한 주 앞선 주일에 가정에서 예배하라며 약식으로 구성된 '가정에서 드리는 명절 예배' 순서지를 친절하게 제작해서 꾸준히 배포해 왔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지금의 상황에서 교회는 확장된 의미의 가정을 바탕으로 온 세대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독려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출처: 뉴스앤조이] 코로나19 시대, 예배의 본질 성찰하는 질문 던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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