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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삶의 활력소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20-07-11 (토) 12:17 3년전 1853  

기쁨은 삶의 활력소

빌립보서 4:4-9

2020-07-12, 성령강림절 후 제6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서신을 쓸 때의 상황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쇠고랑을 찬지 2년여나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유럽 땅 최초의 교회입니다. 옥중에 있던 바울은 후원금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들의 선행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빌립보 서신을 썼습니다(4:10-20). 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신학적인, 목회적인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나타난 거짓 가르침의 위협 때문에 괴로워했고 다른 사역자들의 반대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3:1-11).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 됨을 힘주어 호소합니다(2장과 4:2). 특히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서신의 특징은 기쁨, 확신, 하나 된 인내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기쁨은 삶의 활력소>입니다. 기쁨이나 기쁜 자세는 인간의 삶과 영혼의 활력소입니다. 기쁨은 인간의 영혼을 희열과 즐거움에, 인간의 삶과 일에 활력소를 제공합니다. 기쁨 없이는 인간의 삶과 영혼은 메마르고, 기쁨 없는 일이나 봉사는 비효율적이 됩니다. 무엇을 말하고 믿든, 만약 우리가 기쁨에 차 있지 않으면, 우리의 말과 신앙은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인도에 와서 빈민 선교에 평생을 헌신한 테레사 수녀는 그녀의 칼큐타 자선기관에서 함께 일할 가장 우선하는 봉사자의 자질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서슴지 않고 다만 두 가지, 열심히 일하려는 마음과 기쁜 자세라고 말했습니다. ‘내 관찰로는 이 두 가지 자질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쁜 자세로 일하는 둘째 자질의 사람을 찾기란, 열심히 일하려는 첫째 자질의 사람을 찾기보다 더 어렵다.’고 테레사는 말했습니다. 부지런함을 보기도 쉽지 않으나, 순수한 기쁨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찾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유명한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그이 저서 행복의 예술(Art of Happiness)에서 우리 삶의 최후 목적은 행복을 찾는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어떤 종교를 가지든, 모든 사람들은 삶에서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 생의 움직임은 다 행복을 향한다.’ ‘생이 가져오는 기쁨의 순간에, 행복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무엇과 같이 느껴진다.’ 달라이 라마는 행복은 마음의 수련을 통해 이룩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티베트의 말 ’(Som)이 영과 혼에 가까운 광의의 의미를 가지며, 지성과 감정, 마음과 가슴을 다 포괄합니다. 어떤 내적 수련을 통해 가져오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태도와 삶에 다가가는 자세를 변하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헨리 누웬(Henry Nouwen)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개념을 선명하게 하듯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며, , 실패, 감정적 고뇌, 억압, 전쟁이나 심지어 죽음도 그 사랑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신앙 속에서 기쁨은 행복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로 행복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플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생을 사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아이의 탄생이나 한 친구의 죽음 같은 깊은 생의 경험들과 같이 생각할 때, 큰 슬픔과 큰 기쁨이 같은 경험의 일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자주 슬픔 한 가운데서 우리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때로 내 생의 가장 뼈아플 때 내 자신보다 더 큰 영적 실재를 깨닫게 됩니다. 고통을 희망으로 살도록 내게 허락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감히 말합니다. 내 슬픔이 내가 내 기쁨을 찾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기쁨은 그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아무것도 심지어 죽음도 하나님을 우리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는 지식이나 믿음 위에 근거하여 매일 우리가 선택하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믿음이요 가르침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8:31-32) 한 까닭입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랑으로부터 아무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를 통해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8:37-39).

 

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어느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감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4:4-7).

그러나 우리가 바울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들을 생각할 때,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가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의 남은 생을 통해 핍박, 오해와 해로운 것들이 항상 그를 따랐고, 또한 그의 육체적 질병으로부터의 고통도 매우 심하여 정규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이를 그는 내 육체의 찌르는 가시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심한 어려움과 질병의 기록을 조심스럽게 점검할 때, 그의 기뻐하라는 권면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 없는 밤을 뜬 눈으로 세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 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공동번역 고후 11:23-29)

이러한 것들이 바울의 어려움의 전부가 아닙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이 빌립보 서신을 쓸 때, 그는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쇠고랑을 찬지 2년여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환경을 최선으로 만들 듯이 지금의 악조건들을, 그리스도를 알게 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집에 갇혀 있는 이때에 그는 빌립보 서신과 다른 서신들을 기록했으며, 반복되는 주제는 기쁨이었습니다! 괴롭히는 어려움과 고통이 그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그는 기쁨과 만족의 자세로 빌립보서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자기 연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우들에게 기쁨으로 일하라 권면할 때, 그 자신의 기쁨은 강렬했고, 때문에 그는 다시금 기뻐하라고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1:3, 21, 3:1, 4:4). 바울은 많은 기쁨을 훔쳐가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조종하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기쁨을 택하고 빌립보 교인들과 우리들에게 기쁨을 택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 것도 그의 기쁨이 우리 속에 있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진실로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들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너희 마음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계와 역사의 주님께서 그 자신의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3.

슬픔이 온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듯 기쁨은 전염병적입니다. 헨리 누웬이 소개하는 기쁨에 찬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합니다. 기쁨을 발산하는 그는 그의 삶이 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그 모든 고난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습관적으로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그는 아름다운 그 무엇을, 감사한 그 무엇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둘러싼 큰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의 친구들의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장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끌립니다. ‘이것은 그에게서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의 깊은 신앙이 그로 하여금 희망이 절망보다 더 실질적이며, 신앙이 불신보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더 실질적임을 알게 합니다. 그를 이러한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이런 그의 영적인 자세(spiritual realism)입니다.’ 이 친구의 기쁨은 참으로 전염병적입니다. 그와 더 접할수록 그에게서 구름을 통해 비추는 태양의 빛을 감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으나 태양은 거기에 있습니다. 나의 친구는 항상 태양에 관해 말했으나, 나는 계속 구름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름을 볼 수 있게 한 것은 태양이 아니었던가!’

돈과 성공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들이 기쁨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부자와 성공자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나, 많은 가난한 자들은 자주 큰 기쁨을 보여줍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게 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려운가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기쁨은 우리 삶의 여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게 승리했다는 영적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악과 어둠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빛, 진리, 사랑이 인간이 삶이나 죽음보다도 더 힘 있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희망을 가지며, 모든 우리의 희망과 기쁨의 원천인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기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가지는 영혼들은 외적인 공급에 신나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삶의 단순한 것들로 기뻐합니다. 그들은 역사 건너 무엇이나 저 세상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어제나 내일을 열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순간을 구하며, 활력 있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금 일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세계와 조화하기를 바랍니다. 본회퍼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무엇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하며,’오직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세상적으로살려합니다.

본회퍼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세계로부터 떨어진 삶이나 세계를 역행하는 삶을 위해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름은 세상의 악(ungodliness)을 종교의 겉치장으로 속이거나 그것을 미화하는 등의 시도를 하지 않고 그 자신의 삶을 이악한 세상의 삶 속에 던지기 위함입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철저하게 세상적인(worldly) 살기에 좌절과 실망을 가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좌절과 실망이 그가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한 증거가 됩니다.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잔인함 속에서 본회퍼는 세계를 어둠 속에 버리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날들에, 그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그의 의무, 문제 등과 혼란을 위해 더 세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계와 오는 세대를 위해 행동하며,’인간이 더 훌륭한 세계를 갖게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혼란의 여건들 속에서 본회퍼가 세계를 위해 행동하며 기뻐할 수 있던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사랑한다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4.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힘 있고 효과적으로 살았던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는 구세군을 창설하고 그 총책임자인 대장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후, 그는 기쁨 속에 뛰면서, 야외에서도 설교를 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 재생의 기구들을 세계적인 체인으로 조직하고, 땀 흘리는 노동자들과 버려진 아동들과 일하는 어머니들 같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부스 장군은 언제나 그와 함께 봉사하는 이들에게, 만약 성령이 그들 속에서 움직이신다는 것을 느낄 때엔 찬송과 기도로 기뻐 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스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성례전보다, 그의 예배에 비공식적인 분위기들을 가져오기를 바랐습니다. 즉 기쁜 찬송, 관악의 음악, 손뼉을 치며, 개인적인 간증, 자유로운 기도와 개방된 참회의 초대들이 특성을 이루었습니다. 구세군 신도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창시자의 사상과 같이 참회와 기쁨으로 사회적 봉사를 하며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운동은 속히 전 세계로 퍼져 국제적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운동으로 조직화되어 군대와 같은 운영을 하며, 80개 이상의 나라에서 112개 나라말로 복음을 전하며, 16,000개 복음적 센터와 3,000여 사회 봉사 기구, 병원, 학교, 기관에서 신실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여러 센터 회원들을 통해 정직하고 신실한 사회봉사를 함으로써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인들은 기쁨을 갖고 겸허하게 봉사하는 자들을 기대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때로 큰 회사들이 그들의 기부하려는 사회적 기관으로 구세군을 택하는 이유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올 때마다, 우리는 산타클로스와 함께 구세군 남비의 모금에 기쁜 마음으로 드리며 흐뭇해합니다.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투쟁에서 잊을 수 없는 두 명의 대연설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헨리 비처와 웬델 필립(Henry Ward Beecher & Wendell Phillips)입니다. 그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싸웠고, 이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 뉴욕시와 보스톤 길거리에서도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평등한 정의와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은 승리했고,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필립이 한 강연을 할 때, 비처가 이를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화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필립이 비처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밤 어떠했습니까?’ ‘나는 그토록 훌륭한 강연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필립은 나는 거의 죽었다고 느꼈소’ ‘나는 아무런 행복을 느끼지 못했소, 어떠했는지 제대로 말해주오하고 청했습니다. 비처는 그것들은 아름답고, 의미있고, 장엄하고, 예술적인 말들이었소. 분명히 기쁨이 당신의 강연에서 흘러나왔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기쁨을 가지고 확신이 그 깊은 영혼 속에 자리 잡으면, 그것들이 입을 통해 나오고 힘있게 역사하고 승리를 가져옵니다. 필립과 비처는 그들의 확신과 기쁜 자세로써 노예제도 폐지 투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미국교회에서 50여년을 목사로 사역하고 이제 피부암으로 투병하는 82세 노()목사에 관한 이야기는 대단히 인상적인 감동을 줍니다. 그는 이미 열다섯 차례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픔과 고통 외에도 그는 얼굴과 외상에 아주 보기 흉한 흉터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습니다. 고통은 그와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중요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목사는 오랫동안 주저하며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어찌해야 좋을지 기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내 기쁨을 네게 주기 원하며, 너의 기쁨이 온전하기를 원한다.”(15:11)는 말씀을 긴요히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덩치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압도되었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영광으로 가득찬 기쁨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집안을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다시 태어난 듯한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82세의 노목사 암 환자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 넘쳐흐르는 기쁨에 집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운 간이식당으로 가서 햄버거 하나를 샀습니다.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는가를 본 종업원은 웬 일이십니까?’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 나는 참으로 놀랄 만큼 좋아요.’ ‘오늘이 생일인가요?’ 그녀는 또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라오!’ ‘결혼기념일인가요?’ ‘그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그녀는 신나하며 묻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이라오.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소?’ 그녀는 어깨를 흔들며 답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일요일에 나는 일해야 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의 기쁨이 우리의 영혼에 넘치고, 우리의 기쁨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맥다니엘(R.H.McDaniel)이 그의 찬송시(289)에서 증거 했듯이 그 기쁨은 넘칠 뿐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후렴 :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5.

성서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기뻐하라”(rejoice)는 다만 기쁨을 가진다는 것만이 아니라, 기뻐한다는 동적인 것입니다. 환희를 넘치도록 느끼는 것이요, 그 기쁨을 하나님께나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나 즐겁게 표현하고 모든 것에 기쁜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이 명령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다만 긍정적인 생각이나 어떤 만족으로 자신이 신나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쁨의 뿌리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기뻐할 것은 이런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요, 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참으로 기쁘게 사랑하십니다. 성서의 우리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뻐하신 희열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기를 원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며, 혼돈과 악으로부터 질서와 선을 가져오십니다. 주 안에서 더 기뻐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의 현존을 보고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 볼수록, 우리는 점점 더 기쁨을 체험하며 그것을 희열 속에서 표현합니다. 성서에서의 기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환호의 춤으로 영광 돌리는 데까지 연결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기쁨은 기도요, 힘이며, 그것으로 영혼을 얻을 수 있는 사랑의 한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줄 때에는, 그것을 기쁨으로 신나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사를 표하는 최상의 길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표하며 받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마음과 기쁜 자세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가슴이 불타는 마음의 결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보하고 기뻐하게 된다고 믿는 테레사의 말로 맺으려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듯 사랑하며, 주님이 돕듯 도우리라. 주님이 섬기듯 주며,

주님이 구원하듯 구원하리라. 주님과 24시간을 함께하며, 고통하는 영상의

주님을 어루만지리라.

 

6.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향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될지라도 아름답고 칭송을 받으며 믿을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8-9)

신앙을 가지든 아니 가지든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천륜과 인륜의 이치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사람 된 도리를 지키며 이 땅에 사는 이치에 있어선 하늘과 땅의 도리가 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나 속임이 아니라 신실하고 정직하며 모든 일을 책임성 있게 하여 신뢰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특히 오늘의 성숙한 시대에 있어,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의 책임적인 자아(The Responsible Self)에서 밝힌 바와 같이, 책임성(responsibility)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성숙한 인간의 징표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로든, 자기가 처한 사회나 공동체에서 그 심사언동에 있어 책임질 수 있는 자가 가장 원숙한 자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한 가정에서도 어릴수록 책임을 모르며, 성숙한 어른이나 가장일수록 그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위해 책임을 알고 지려합니다. 한 사회나 국가,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미숙한 자들은 책임을 모르고 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나라 사회나 공동체에서 그 어떤 문제든 더 책임을 지는 자만이 주인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에선 이와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책임지려는 자를 신뢰합니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성실하게 임하고 맡은 책임이나 직임, 그 일이 크든 작든 성실하고 충성되게 수행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책임성과 성실성은 늘 병행하기에, 성실하며 무책임하거나 책임적이되 불성실할 수 없습니다. 책임적인 사람은 따라서 성실하고, 신실한 자는 동시에 책임성이 있는 자입니다. 또한 책임성이나 성실은 한 때 어느 곳에선 그러하고, 다른 때 다른 일에서는 그렇지 못한 임시적이거나 부분적일 수 없습니다. 온전성(integrity)과 일치성을 지니며, 언제 어디서나 다름이 없기에 신뢰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성실하고 책임성이 있기에 신뢰스럽고 이런 사람들만이 그들이 신·불신앙을 막론하고 주어진 삶을 올바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는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이러한 자들만이 자족하며 바로 살고 나라나 사회, 교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비천하게 되고 귀하게 되어도, 궁핍하게 되고 풍부하게 되어도, 어떻게 처할 줄을 알기에 염려할 필요도 없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손들을 염려하는 부모들도, 정말 그들이 이런 진리를 터득하여 살게 될 때엔 아무러한 걱정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런 진리로 무장되고 수련된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그 모든 성공과 행복은 확실하다는 보장입니다. 바울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2)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런 주 예수를 발견하고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빈부귀천, 희비애락, 삶의 성공 실패 등 그 어떤 처지에서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기에, 그는 그의 체험과 확신 속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주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자유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길을 선포한 것입니다. 신앙으로 성숙한 인격자란 참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의 능력 또한 무한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도 성실하고 정직하되, 책임 있는 신뢰의 사람을 원하고, 나라나 사회, 교회까지도 이러한 신뢰할 수 있는 원숙한 인격자들이 늘면 늘 수록, 그런 나라나 사회나 교회는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 세계가 원하는 그런 교회와 사회가 되리라 믿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수고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은혜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기쁨은 삶의 활력소  

빌립보서 4:4-9

2020-07-12, 성령강림절 후 제6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서신을 쓸 때의 상황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쇠고랑을 찬지 2년여나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유럽 땅 최초의 교회입니다. 옥중에 있던 바울은 후원금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들의 선행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빌립보 서신을 썼습니다(4:10-20). 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신학적인, 목회적인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나타난 거짓 가르침의 위협 때문에 괴로워했고 다른 사역자들의 반대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3:1-11).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 됨을 힘주어 호소합니다(2장과 4:2). 특히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서신의 특징은 기쁨, 확신, 하나 된 인내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기쁨은 삶의 활력소>입니다. 기쁨이나 기쁜 자세는 인간의 삶과 영혼의 활력소입니다. 기쁨은 인간의 영혼을 희열과 즐거움에, 인간의 삶과 일에 활력소를 제공합니다. 기쁨 없이는 인간의 삶과 영혼은 메마르고, 기쁨 없는 일이나 봉사는 비효율적이 됩니다. 무엇을 말하고 믿든, 만약 우리가 기쁨에 차 있지 않으면, 우리의 말과 신앙은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인도에 와서 빈민 선교에 평생을 헌신한 테레사 수녀는 그녀의 칼큐타 자선기관에서 함께 일할 가장 우선하는 봉사자의 자질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서슴지 않고 다만 두 가지, 열심히 일하려는 마음과 기쁜 자세라고 말했습니다. ‘내 관찰로는 이 두 가지 자질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쁜 자세로 일하는 둘째 자질의 사람을 찾기란, 열심히 일하려는 첫째 자질의 사람을 찾기보다 더 어렵다.’고 테레사는 말했습니다. 부지런함을 보기도 쉽지 않으나, 순수한 기쁨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찾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유명한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그이 저서 행복의 예술(Art of Happiness)에서 우리 삶의 최후 목적은 행복을 찾는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어떤 종교를 가지든, 모든 사람들은 삶에서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 생의 움직임은 다 행복을 향한다.’ ‘생이 가져오는 기쁨의 순간에, 행복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무엇과 같이 느껴진다.’ 달라이 라마는 행복은 마음의 수련을 통해 이룩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티베트의 말 ’(Som)이 영과 혼에 가까운 광의의 의미를 가지며, 지성과 감정, 마음과 가슴을 다 포괄합니다. 어떤 내적 수련을 통해 가져오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태도와 삶에 다가가는 자세를 변하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헨리 누웬(Henry Nouwen)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개념을 선명하게 하듯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며, , 실패, 감정적 고뇌, 억압, 전쟁이나 심지어 죽음도 그 사랑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신앙 속에서 기쁨은 행복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로 행복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플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생을 사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아이의 탄생이나 한 친구의 죽음 같은 깊은 생의 경험들과 같이 생각할 때, 큰 슬픔과 큰 기쁨이 같은 경험의 일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자주 슬픔 한 가운데서 우리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때로 내 생의 가장 뼈아플 때 내 자신보다 더 큰 영적 실재를 깨닫게 됩니다. 고통을 희망으로 살도록 내게 허락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감히 말합니다. 내 슬픔이 내가 내 기쁨을 찾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기쁨은 그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아무것도 심지어 죽음도 하나님을 우리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는 지식이나 믿음 위에 근거하여 매일 우리가 선택하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믿음이요 가르침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8:31-32) 한 까닭입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랑으로부터 아무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를 통해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8:37-39).

 

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어느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감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4:4-7).

그러나 우리가 바울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들을 생각할 때,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가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의 남은 생을 통해 핍박, 오해와 해로운 것들이 항상 그를 따랐고, 또한 그의 육체적 질병으로부터의 고통도 매우 심하여 정규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이를 그는 내 육체의 찌르는 가시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심한 어려움과 질병의 기록을 조심스럽게 점검할 때, 그의 기뻐하라는 권면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 없는 밤을 뜬 눈으로 세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 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공동번역 고후 11:23-29)

이러한 것들이 바울의 어려움의 전부가 아닙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이 빌립보 서신을 쓸 때, 그는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쇠고랑을 찬지 2년여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환경을 최선으로 만들 듯이 지금의 악조건들을, 그리스도를 알게 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집에 갇혀 있는 이때에 그는 빌립보 서신과 다른 서신들을 기록했으며, 반복되는 주제는 기쁨이었습니다! 괴롭히는 어려움과 고통이 그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그는 기쁨과 만족의 자세로 빌립보서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자기 연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우들에게 기쁨으로 일하라 권면할 때, 그 자신의 기쁨은 강렬했고, 때문에 그는 다시금 기뻐하라고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1:3, 21, 3:1, 4:4). 바울은 많은 기쁨을 훔쳐가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조종하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기쁨을 택하고 빌립보 교인들과 우리들에게 기쁨을 택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 것도 그의 기쁨이 우리 속에 있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진실로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들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너희 마음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계와 역사의 주님께서 그 자신의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3.

슬픔이 온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듯 기쁨은 전염병적입니다. 헨리 누웬이 소개하는 기쁨에 찬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합니다. 기쁨을 발산하는 그는 그의 삶이 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그 모든 고난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습관적으로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그는 아름다운 그 무엇을, 감사한 그 무엇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둘러싼 큰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의 친구들의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장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끌립니다. ‘이것은 그에게서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의 깊은 신앙이 그로 하여금 희망이 절망보다 더 실질적이며, 신앙이 불신보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더 실질적임을 알게 합니다. 그를 이러한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이런 그의 영적인 자세(spiritual realism)입니다.’ 이 친구의 기쁨은 참으로 전염병적입니다. 그와 더 접할수록 그에게서 구름을 통해 비추는 태양의 빛을 감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으나 태양은 거기에 있습니다. 나의 친구는 항상 태양에 관해 말했으나, 나는 계속 구름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름을 볼 수 있게 한 것은 태양이 아니었던가!’

돈과 성공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들이 기쁨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부자와 성공자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나, 많은 가난한 자들은 자주 큰 기쁨을 보여줍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게 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려운가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기쁨은 우리 삶의 여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게 승리했다는 영적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악과 어둠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빛, 진리, 사랑이 인간이 삶이나 죽음보다도 더 힘 있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희망을 가지며, 모든 우리의 희망과 기쁨의 원천인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기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가지는 영혼들은 외적인 공급에 신나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삶의 단순한 것들로 기뻐합니다. 그들은 역사 건너 무엇이나 저 세상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어제나 내일을 열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순간을 구하며, 활력 있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금 일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세계와 조화하기를 바랍니다. 본회퍼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무엇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하며,’오직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세상적으로살려합니다.

본회퍼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세계로부터 떨어진 삶이나 세계를 역행하는 삶을 위해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름은 세상의 악(ungodliness)을 종교의 겉치장으로 속이거나 그것을 미화하는 등의 시도를 하지 않고 그 자신의 삶을 이악한 세상의 삶 속에 던지기 위함입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철저하게 세상적인(worldly) 살기에 좌절과 실망을 가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좌절과 실망이 그가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한 증거가 됩니다.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잔인함 속에서 본회퍼는 세계를 어둠 속에 버리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날들에, 그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그의 의무, 문제 등과 혼란을 위해 더 세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계와 오는 세대를 위해 행동하며,’인간이 더 훌륭한 세계를 갖게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혼란의 여건들 속에서 본회퍼가 세계를 위해 행동하며 기뻐할 수 있던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사랑한다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4.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힘 있고 효과적으로 살았던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는 구세군을 창설하고 그 총책임자인 대장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후, 그는 기쁨 속에 뛰면서, 야외에서도 설교를 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 재생의 기구들을 세계적인 체인으로 조직하고, 땀 흘리는 노동자들과 버려진 아동들과 일하는 어머니들 같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부스 장군은 언제나 그와 함께 봉사하는 이들에게, 만약 성령이 그들 속에서 움직이신다는 것을 느낄 때엔 찬송과 기도로 기뻐 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스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성례전보다, 그의 예배에 비공식적인 분위기들을 가져오기를 바랐습니다. 즉 기쁜 찬송, 관악의 음악, 손뼉을 치며, 개인적인 간증, 자유로운 기도와 개방된 참회의 초대들이 특성을 이루었습니다. 구세군 신도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창시자의 사상과 같이 참회와 기쁨으로 사회적 봉사를 하며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운동은 속히 전 세계로 퍼져 국제적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운동으로 조직화되어 군대와 같은 운영을 하며, 80개 이상의 나라에서 112개 나라말로 복음을 전하며, 16,000개 복음적 센터와 3,000여 사회 봉사 기구, 병원, 학교, 기관에서 신실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여러 센터 회원들을 통해 정직하고 신실한 사회봉사를 함으로써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인들은 기쁨을 갖고 겸허하게 봉사하는 자들을 기대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때로 큰 회사들이 그들의 기부하려는 사회적 기관으로 구세군을 택하는 이유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올 때마다, 우리는 산타클로스와 함께 구세군 남비의 모금에 기쁜 마음으로 드리며 흐뭇해합니다.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투쟁에서 잊을 수 없는 두 명의 대연설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헨리 비처와 웬델 필립(Henry Ward Beecher & Wendell Phillips)입니다. 그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싸웠고, 이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 뉴욕시와 보스톤 길거리에서도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평등한 정의와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은 승리했고,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필립이 한 강연을 할 때, 비처가 이를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화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필립이 비처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밤 어떠했습니까?’ ‘나는 그토록 훌륭한 강연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필립은 나는 거의 죽었다고 느꼈소’ ‘나는 아무런 행복을 느끼지 못했소, 어떠했는지 제대로 말해주오하고 청했습니다. 비처는 그것들은 아름답고, 의미있고, 장엄하고, 예술적인 말들이었소. 분명히 기쁨이 당신의 강연에서 흘러나왔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기쁨을 가지고 확신이 그 깊은 영혼 속에 자리 잡으면, 그것들이 입을 통해 나오고 힘있게 역사하고 승리를 가져옵니다. 필립과 비처는 그들의 확신과 기쁜 자세로써 노예제도 폐지 투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미국교회에서 50여년을 목사로 사역하고 이제 피부암으로 투병하는 82세 노()목사에 관한 이야기는 대단히 인상적인 감동을 줍니다. 그는 이미 열다섯 차례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픔과 고통 외에도 그는 얼굴과 외상에 아주 보기 흉한 흉터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습니다. 고통은 그와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중요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목사는 오랫동안 주저하며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어찌해야 좋을지 기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내 기쁨을 네게 주기 원하며, 너의 기쁨이 온전하기를 원한다.”(15:11)는 말씀을 긴요히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덩치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압도되었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영광으로 가득찬 기쁨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집안을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다시 태어난 듯한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82세의 노목사 암 환자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 넘쳐흐르는 기쁨에 집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운 간이식당으로 가서 햄버거 하나를 샀습니다.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는가를 본 종업원은 웬 일이십니까?’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 나는 참으로 놀랄 만큼 좋아요.’ ‘오늘이 생일인가요?’ 그녀는 또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라오!’ ‘결혼기념일인가요?’ ‘그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그녀는 신나하며 묻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이라오.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소?’ 그녀는 어깨를 흔들며 답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일요일에 나는 일해야 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의 기쁨이 우리의 영혼에 넘치고, 우리의 기쁨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맥다니엘(R.H.McDaniel)이 그의 찬송시(289)에서 증거 했듯이 그 기쁨은 넘칠 뿐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후렴 :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5.

성서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기뻐하라”(rejoice)는 다만 기쁨을 가진다는 것만이 아니라, 기뻐한다는 동적인 것입니다. 환희를 넘치도록 느끼는 것이요, 그 기쁨을 하나님께나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나 즐겁게 표현하고 모든 것에 기쁜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이 명령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다만 긍정적인 생각이나 어떤 만족으로 자신이 신나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쁨의 뿌리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기뻐할 것은 이런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요, 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참으로 기쁘게 사랑하십니다. 성서의 우리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뻐하신 희열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기를 원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며, 혼돈과 악으로부터 질서와 선을 가져오십니다. 주 안에서 더 기뻐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의 현존을 보고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 볼수록, 우리는 점점 더 기쁨을 체험하며 그것을 희열 속에서 표현합니다. 성서에서의 기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환호의 춤으로 영광 돌리는 데까지 연결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기쁨은 기도요, 힘이며, 그것으로 영혼을 얻을 수 있는 사랑의 한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줄 때에는, 그것을 기쁨으로 신나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사를 표하는 최상의 길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표하며 받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마음과 기쁜 자세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가슴이 불타는 마음의 결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보하고 기뻐하게 된다고 믿는 테레사의 말로 맺으려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듯 사랑하며, 주님이 돕듯 도우리라. 주님이 섬기듯 주며,

주님이 구원하듯 구원하리라. 주님과 24시간을 함께하며, 고통하는 영상의

주님을 어루만지리라.

 

6.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향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될지라도 아름답고 칭송을 받으며 믿을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8-9)

신앙을 가지든 아니 가지든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천륜과 인륜의 이치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사람 된 도리를 지키며 이 땅에 사는 이치에 있어선 하늘과 땅의 도리가 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나 속임이 아니라 신실하고 정직하며 모든 일을 책임성 있게 하여 신뢰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특히 오늘의 성숙한 시대에 있어,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의 책임적인 자아(The Responsible Self)에서 밝힌 바와 같이, 책임성(responsibility)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성숙한 인간의 징표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로든, 자기가 처한 사회나 공동체에서 그 심사언동에 있어 책임질 수 있는 자가 가장 원숙한 자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한 가정에서도 어릴수록 책임을 모르며, 성숙한 어른이나 가장일수록 그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위해 책임을 알고 지려합니다. 한 사회나 국가,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미숙한 자들은 책임을 모르고 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나라 사회나 공동체에서 그 어떤 문제든 더 책임을 지는 자만이 주인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에선 이와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책임지려는 자를 신뢰합니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성실하게 임하고 맡은 책임이나 직임, 그 일이 크든 작든 성실하고 충성되게 수행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책임성과 성실성은 늘 병행하기에, 성실하며 무책임하거나 책임적이되 불성실할 수 없습니다. 책임적인 사람은 따라서 성실하고, 신실한 자는 동시에 책임성이 있는 자입니다. 또한 책임성이나 성실은 한 때 어느 곳에선 그러하고, 다른 때 다른 일에서는 그렇지 못한 임시적이거나 부분적일 수 없습니다. 온전성(integrity)과 일치성을 지니며, 언제 어디서나 다름이 없기에 신뢰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성실하고 책임성이 있기에 신뢰스럽고 이런 사람들만이 그들이 신·불신앙을 막론하고 주어진 삶을 올바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는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이러한 자들만이 자족하며 바로 살고 나라나 사회, 교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비천하게 되고 귀하게 되어도, 궁핍하게 되고 풍부하게 되어도, 어떻게 처할 줄을 알기에 염려할 필요도 없고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손들을 염려하는 부모들도, 정말 그들이 이런 진리를 터득하여 살게 될 때엔 아무러한 걱정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런 진리로 무장되고 수련된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그 모든 성공과 행복은 확실하다는 보장입니다. 바울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2)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런 주 예수를 발견하고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빈부귀천, 희비애락, 삶의 성공 실패 등 그 어떤 처지에서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기에, 그는 그의 체험과 확신 속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주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자유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길을 선포한 것입니다. 신앙으로 성숙한 인격자란 참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의 능력 또한 무한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도 성실하고 정직하되, 책임 있는 신뢰의 사람을 원하고, 나라나 사회, 교회까지도 이러한 신뢰할 수 있는 원숙한 인격자들이 늘면 늘 수록, 그런 나라나 사회나 교회는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 세계가 원하는 그런 교회와 사회가 되리라 믿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수고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은혜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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