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례 요한이 당시 헤롯왕- 헤롯 안디바스의 죄악상을 고발하다가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헤롯 안티바스는 세례요한을 죽이고, 훗날 예수님을 빌라도와 함께 심문하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헤롯의 간교함과 교활함을 아시고 '저 여우'-(눅 13:32)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맞아 잔치를 벌이던 바로 그 날, 세례요한은 죽음을 당합니다. 조금 복잡한 내용이지만 요점은 헤롯 안디바스가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뺏겨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헤로디아의 남편 빌립은 세력을 잃었던 상황이었고 헤로디아는 헤롯 안디바스와 간통을 하게 되고 빌립은 어쩔 수 없이 아내를 이복형에게 뺏겼던 것 같습니다. 헤롯의 본 아내는 이 사건을 알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요한이 꾸짖자 헤롯은 그를 감옥에 넣었고 이 이야기를 들은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복수심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생일날 잔치를 벌이고 술에 취하여 있던 중,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습니다. (흔히 살로메라고 말하는데 사실 성경에 헤로디아의 딸이 살로메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살로메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막15:40], [막16:1]. 다만 후세 역사가- 요세푸스 등이 헤로디아의 딸을 살로메라고 불렀기에 그 후로 역사적으로 헤로디아의 딸을 살로메라고 불렀습니다. 살로메라는 이름은 평화라는 뜻이지만 그는 욕심과 분노로 사람을 죽인 여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일 잔치에 술에 취해 들뜬 헤롯왕은 그 딸의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딸은 어머니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아 세례요한의 처형을 요구하고 그 목을 달라고 합니다. 우쭐거리던 헤롯은 자기 과시를 하느라, 우쭐거리느라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 정도의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술에 취했고 아무리 헤롯에 무서웠어도 그러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 하나 없었나 싶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습니다. 헤로디아에게 끌려 모든 사람이 함께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역사가 이렇게 왜곡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생각과 달리 실제로는 모든 사건과 사고를 결국 여인들이 남자들을 조종하여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의 현명함과 거룩함과 역사관과 판단력과 기도와 인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남자를 조종하고 이용하고 현혹시켜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거나 자기의 분노감정이나 복수감정을 푸는 정도의 술수에 가득한 여인들이 많다면 역사는 왜곡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 예수님께서 여인이 낳은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사람[마11:11]이라고 했던 세례 요한은 이렇게 순교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가에 따르면 훗날 헤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의 유대 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18권 4장과 5장) 또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헤로디아의 딸도 그 목을 찔려 결국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을 생각합니다. 백성들에게 그토록 큰 인기가 있었으나 그는 그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이름 따위에 명예 따위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진리 만을 붙잡기 원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집착하고 과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심성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세례요한이 아니라 헤롯이 되고 디오드레베가 됩니다.
[요삼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세례요한은 철저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들메(신발끈- 유대인들이 신었던 샌들-신발의 끈인데 흔히 손님이 오면 종들이 무릎을 꿇어 그 신발의 끈을 풀어주었습니다.)를 풀 자격도 없다고 자신을 낮추었던 깊은 겸손이 있었습니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는 거룩한 2인자였습니다. 아니 2인자라는 말 자체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식의 세상적 평가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오직 진리만을 추구했던 거룩한 무명이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에게도 이 구도의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왜 광야로 나아갔습니까? 그들도 알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한 옷과 높은 사람들과 알려진 사람들과 경쟁과 사치와 향략이 아닌, 바로 이 광야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영적 본능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광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거룩한 구도의 심령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의 청빈(淸貧)을 본받고 싶습니다. 비록 세상을 살면서 가정을 유지하고 부모와 자녀와 이웃들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며 또 일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구차한 탐욕에 찌들리지 않고 내 것 챙기는데 마음 뺏기지 않는 거룩한 청빈(淸貧)의 수도적 삶을 살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는 목숨을 내어주어 죽은 붉은 피의 순교자(Red Martyr)는 못되더라도 생활 속에서 내 자아와 욕심과 혈기와 분노와 감정을 죽이며, 평화를 만들어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흰색 순교자(White Martyr) 생활 순교자로는 최소한 살고 싶습니다.
청빈(淸貧)과 절대 겸손과 진실,
그리고 오직 주님-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원했던 그 섬김!
목숨까지 바쳤던 그의 진리를 향한 열망!
주님, 세례 요한의 그 거룩한 영성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2021년 02월 16일(화)/ 새벽말씀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