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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원

왜?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새벽말씀묵상 0310]

이준원 (충북노회,우암교회,목사) 2021-03-17 (수) 14:05 3년전 1506  

2021310() 마태복음 22:1-14

?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자기 아들- 예수님을 말합니다. 천국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영적 혼인잔치가 됩니다)을 위하여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태복음 22장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고난주간 화요일에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주간에도 열심히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비유를 통해, 말씀을 통해 그들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며칠 후에 일어나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상징적 예고의 의미와 또한 그 영적 이유와 배경을 설명하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손님을 초청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것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라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예수님과 우리입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혼인 잔치라고 비유합니다. [19: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손님들이 오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잔치, 구원의 잔치, 축제의 생애를 살게 하시고자 사랑으로 우리들을 부르시지만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이 초청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당시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예물을 준비해 가야 했는데 그 예물이 부담스러워서 그랬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예물은 오직 우리의 진실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 자신을 위하여 다른 일들을더 우선 순위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밭으로, 그리고 사업하러 가느라 바빴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거부한 사람들, 은혜를 거부한 사람들, 영생을 모르고 영생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사는 사람들, 언젠가 다가올 그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데도 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끔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긴 하는데 믿음으로 구원받아, 그 무서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은 좋은데, 그래도 이 땅이 좋을 것 같다고 천국은 왠지 막연해서 겁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그 아름다운 나라가 예비되어 있을 것을 믿습니다.

나비 애벌레에게 네가 죽으면 그 후 날개가 생기고 날아다닌다고 말해도 애벌레는 겁이 난다고, 모르겠다고, 애벌레로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1932-1996)의 책 '우리의 가장 큰 선물' (Our Greatest Gift: A Meditation on Dying and Caring) 우리 나라에서는 '죽음, 가장 큰 선물'로 번역된 책에는 엄마 뱃속에 있는 쌍동이가 이곳이 우리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는 오빠와 아니라고,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여동생의 말다툼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니, 죽은 후의 생애 뿐 아닙니다. 지금, 이미 신앙 안에서 뜻 깊은 생애를 살고 있는 이들은 똑같은 세상을 살아도 이미 천국을 사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 원합니다.

그래도, 거부했던 이들! 그리고 더욱 무서운 일! 어떤 사람들은 왕의 신하들을 모욕하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구원과 사랑으로 초대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은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습니다. 아니 왜 처음부터 그같은 사람들을 초청하셨을까? 사랑 때문에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왜 초청을 거부했을까? ? 세상의 욕심과 자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 Why? 내 마음 깊이 물어보기 원합니다! 어느 정도나 신앙에 깊이 들어가 있는지 묻습니다!

우리가 왜? 라고 물어야하는 것은 묵상의 깊이를 더하기 위함이요, 내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함입니다. 내 자신에게 자꾸 묻고 또 물어야 경직된 내 인생 습관이 밝혀지고 깨어지게 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그 초청에 응답하여 지금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자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감히 저희를 택하여 초청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님, 그 초청에 응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복입기를 거부한 사람

왕은 그 대신 길거리로 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데려오게 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악한 자"도 그냥 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악한 자는 또 왜 초청한 것일까요? 악한 자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교회에도 악한 자가 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악한 자는 그렇다면 선한 자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나는 악한 자인가요, 선한 자인가요? 생각을 모아봅니다.)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22: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로 그 '악한 자'였을까요? 설마 우리는 아니겠죠? 그런데, 갑자기 초청을 받았는데 예복을 입을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기도 하시는데 예복은 그 잔치 들어가는 입구에 다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왕궁의 잔치에는 이미 궁중에서 준비한 예복을 나누어주는 관례가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청받은 손님들은 갈아 입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아 입어야 예의가 되었습니다.

[왕하10:22]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왕하22: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대하20: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대하34:22]이에 힐기야와 왕이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로서 예복을 관리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더라 그들이 그에게 이 뜻을 전하매

예복이 없다면 다른 이들도 못 입었을텐데 거기 온 다른 손님들도 갑자기 초청을 받았음에도 예복을 갈아 입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유구무언(有口無言), 아무 말도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안 입었던 것입니다. 무슨 고집인지, 무슨 소신인지, 일부러 안입었습니다. 이 비유는 초청을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초청받은 자답게 예복으로 갈아 입는 것이 사실은 더욱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 묻고 싶어집니다. 이 사람은 왜?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무슨 마음이 있었길래, 예복을 끝까지 안 입은 것일까요? 웬 고집일까요? 그런데 이 고집이 남의 얘기일 뿐일까요?

? Why?

예복을 입는다는 것! 변화의 의무!

거룩한 변화, 거듭남, 성화(聖化)의 의무

예복-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구원의 단계로 분류하자면 구원을 받은 후 인격적 변화가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구원-의롭다 하심을 받은 칭의(稱義)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성화(聖化)-변화는 평생의 숙제입니다! 그는 변화되지 못한 사람, 아니 변화를 거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

<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으라!>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생각의 옷, 마음의 옷, 사고방식의 옷, 인격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성화(聖化)입니다. 구원의 길은 순간이지만 성화의 길은 평생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변화되어야 하는데, DNA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성격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언어가 변화되고 말습관과 생각의 습관이 변화되고 물질관의 변화, 가치관, 인생관, 사람을 보는 눈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이기주의적 인생관이 변화되어야하는데, 내 모든 대화가 영적인 대화가 되어야하는데....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일까요? 아니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입은 예복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 은혜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살아가는 이가 진정한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님, 내가 옛 사람의 옷을 벗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로운 옷, 예복으로 갈아입기 원합니다. 계시록의 말씀입니다.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오 주님, 우리의 옛 옷을 벗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순결한 늘 성결의 새 옷을 입고 살게 하소서! 아멘!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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