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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원

산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23-33 [새벽말씀묵상 0312]

이준원 (충북노회,우암교회,목사) 2021-03-17 (수) 14:16 3년전 853  

312() 산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23-33


< 사두개파들>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2: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묻습니다. 부활을 부정했던 그들이 예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구약 사독 제사장 계열의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동안 헬라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합 종교신학적 형태를 띠게 된 부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부활을 부정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종교에서, 신앙에서 내세와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의 신앙이 과연 가능한지 모르지만 헬라적 사상이 그들을 침투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뿐, 이 땅의 모든 삶은 결국 인간이 끌어가는 것이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던 실제적 무신론자들이었다고 보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부활개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헬라문화와 영합한 관계로 로마정권에서도 인정받으며 대부분 사회 지도층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도 지식층이 많았고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막상 백성들은 그리 사두개파를 좋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지금 올무에 걸게 하는 일에는 합심하었습니다.

먼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던 것은 부활 문제였습니다. 계대(繼代)결혼 관습에 의해 형제였던 남편들이 계속 죽어가면서 결과적으로 남편을 7명이나 두게 되었던 여인은 죽은 후 어느 남편과 살게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계대 결혼 관습은 얼핏보면 성적으로 문란한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인권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대에 그런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남편이 죽은 여인들이 남겨진 자녀와 함께 굶어죽거나 대가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형제가 죽을 경우,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받아들여 결혼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지는 제도였습니다. 다만 유산이나 그 자녀들을 형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것을 거부하는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신발을 벗기운 집이 바로 그런 의무를 거부한 집이었습니다.

[25: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노라 하면 [25: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 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25: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 상황을 부활과 연결시켜 예수님께 묻습니다. 부활은 허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존재의 방식과 형태와 차원이 달라짐을 설명하십니다.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천국에서는 존재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죽는 과정을 거쳐 나중에 날개를 단 나비로 부활하여 존재 양태가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애벌레의 본질은 나비와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존재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애벌레의 관심은 기어다니는 것이지만 나비는 나는 것이 관심입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그러다가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다시 물이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기도 합니다. 존재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입니다. 씨앗은 형태가 꽃과는 전혀 다릅니다만 그러나 그 씨앗 속에서 꽃이 피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다만 존재의 양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무심천 벚꽃을 미리 보고 싶어서 벚나무 뿌리 밑을 아무리 파들어가도 그 아름답고 눈부신 꽃, 향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놀라운 신비가 창조됩니다. 과일의 향기로운 열매도 지금 아무리 땅을 파도 보이지 않지만 그 빛깔, 향기, 아름다움, 맛이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존재의 양태가 달라짐을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쾌락과 행복과 기쁨의 차원도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행복과 쾌락이 육신에 달려 있다면 그곳에서는 쾌락과 행복의 차원 자체가 다를 것입니다.


사실 천국은 주님의 약속이므로 확신하고 믿는 것이지 내가 몸으로 직접 경험해서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약속이기에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영원과 부활과 내세의 신비를 다 알 수는 없기에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나 천국에 대하여 미루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13:43]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곳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상급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들입니다.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예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먼저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부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의미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오래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제는 죽어 완전히 사라졌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의 이름을 말씀하실까를 묻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고 내세가 있고 부활이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사데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습니다.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기도 합니다. 그냥 걸어다니는 허수아비로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원히 또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의 조건은,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이 그래서 미래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뜻을 따라 빛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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