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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자는 왜 엠마오로 갔나.

이선규 (서울남노회,대림다문화센터,목사) 2021-04-08 (목) 15:46 3년전 1425  

엠마오 도상의 기사는 마가복음에는 간략히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 복음에는 길 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참 선지자 이였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분으로 믿고 민족적 희망을 예수님에게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풀었던 희망은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위풍당당한 예루살렘 입성을 볼 때만해도 당당했던 그 예수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만사가 끝이다’ 는 좌절과 함께 스승을 배신한 아픔이 그들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슬프고 당혹한 모습 자체 이었다.


그러면 왜 이 두 제자가 멀리 떨어진 시골로 내려갔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흩어졌으며 이제 예루살렘은 악과 거짓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변하였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무를 있을 이유가 없고 도망치는 것 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보자.


대명 천지에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수많은 양민이 학살을 당하고 있으며 세계가 코 로나 팬데믹에 시달리고 있으며 국내에는 땅 투기로 서민들과 젊은이들이 좌절과 허탈감이 쌓여만 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오고 있는 데 제대로 된 일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하고 지방 소멸은 가속화 되어가고 있느데 서울에 집을 소유 한다는 것은 점, 점 어려운 현실이니 말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당시에 예루살렘의 형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성공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진짜교회는 제도와 현실에 실망한 사람들 좌절한 사람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닐까?


두 제자는 이분이 과연 진짜 메시야인가? 아니면 사기꾼은 아니었을까? 왜 처참 하게 죽으셔야 했나? 그는 병자를 고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고 옳은 소리를 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십자가에서 죽었단 말인가? 이러한 것을 대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것들을 토론하는 곳이어야 한다.


믿는 자 들이 조롱을 받고 정직한 사람이 왜 불이익을 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 난을 당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는 참 교회라 보기 어렵다.


이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스승의 삶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승리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엠마오의 길은 실망의 길만은 아니었다. 가슴이 뜨거워진 체험의 길이었다. 모세로 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로 엮어진 예수의 구속사를 듣는 강의를 듣게 된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가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부활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뜨겁고 감동을 받은 것 자체도 훌륭하지만 볼 것을 보지 못 한다. 엠마오를 지나서 가려고 하자 그를 강권해 식사를 같이 하시고 나눈 것은 사 건 이었다. 신앙은 사건이고 삶 이어야 한다. 관념 적이고 추상적인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감동하고 뜨거운 신앙만 으로는 부족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처형한 곳 예수님을 따르던 잔당을 색출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처형한 곳 엠마오의 길은 돌아서야할 길이지 계속할 길은 아닌 것이다.


그러려면 눈이 밝아져야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마가 16: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 하셨다고 하였다.


오직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혈안이고 불의와 타협하며 화해와 협력을 저해하며 통일을 가로막는 저 예루살렘의 현장으로 나아가 부활의 체험자들이 되어 되고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부활이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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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도상의 기사는 마가복음에는 간략히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 복음에는 길 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참 선지자 이였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분으로 믿고 민족적 희망을 예수님에게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풀었던 희망은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위풍당당한 예루살렘 입성을 볼 때만해도 당당했던 그 예수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만사가 끝이다’ 는 좌절과 함께 스승을 배신한 아픔이 그들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슬프고 당혹한 모습 자체 이었다.

그러면 왜 이 두 제자가 멀리 떨어진 시골로 내려갔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흩어졌으며 이제 예루살렘은 악과 거짓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변하였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무를 있을 이유가 없고 도망치는 것 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보자.

대명 천지에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수많은 양민이 학살을 당하고 있으며 세계가 코 로나 팬데믹에 시달리고 있으며 국내에는 땅 투기로 서민들과 젊은이들이 좌절과 허탈감이 쌓여만 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오고 있는 데 제대로 된 일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하고 지방 소멸은 가속화 되어가고 있느데 서울에 집을 소유 한다는 것은 점, 점 어려운 현실이니 말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당시에 예루살렘의 형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성공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진짜교회는 제도와 현실에 실망한 사람들 좌절한 사람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닐까?

두 제자는 이분이 과연 진짜 메시야인가? 아니면 사기꾼은 아니었을까? 왜 처참 하게 죽으셔야 했나? 그는 병자를 고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고 옳은 소리를 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십자가에서 죽었단 말인가? 이러한 것을 대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것들을 토론하는 곳이어야 한다.

믿는 자 들이 조롱을 받고 정직한 사람이 왜 불이익을 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 난을 당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는 참 교회라 보기 어렵다.

이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스승의 삶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승리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엠마오의 길은 실망의 길만은 아니었다. 가슴이 뜨거워진 체험의 길이었다. 모세로 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로 엮어진 예수의 구속사를 듣는 강의를 듣게 된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가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부활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뜨겁고 감동을 받은 것 자체도 훌륭하지만 볼 것을 보지 못 한다. 엠마오를 지나서 가려고 하자 그를 강권해 식사를 같이 하시고 나눈 것은 사 건 이었다. 신앙은 사건이고 삶 이어야 한다. 관념 적이고 추상적인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감동하고 뜨거운 신앙만 으로는 부족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처형한 곳 예수님을 따르던 잔당을 색출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처형한 곳 엠마오의 길은 돌아서야할 길이지 계속할 길은 아닌 것이다.

그러려면 눈이 밝아져야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마가 16: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 하셨다고 하였다.

오직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혈안이고 불의와 타협하며 화해와 협력을 저해하며 통일을 가로막는 저 예루살렘의 현장으로 나아가 부활의 체험자들이 되어 되고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부활이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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