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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공주사회변혁 운동 - 이상호 목사 일대기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21-06-28 (월) 06:31 2년전 880  

* 6. 24, 저녁 7시 풀꽃카페에 김정섭 공주시장 외에 조동길 교수를 필두로 이일주 신임 문화원장 등 여러 교수, 시인, 작가, 화가 등 뜻있는 시민들이 모여서 오랫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으로 보세요.


공주사회변혁 운동 - 이상호 목사 일대기


2021. 6. 24. 두서없는 인문학당에서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란?


먼저 우리 공주에서 권위 있는 ‘두서없는 인문학당’에서 부족한 사람을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해 성탄절 특집으로 예정되었었는데 코로나로 6개월이나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인문학(人文學, 영어: humanities)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위 분야에는 고전학, 역사학, 언어, 음악사학, 공연예술학, 철학, 종교학, 미술사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쉽게 말하면 人文, 즉 사람문학이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부족하지만 저의 살아 온 삶을 진솔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 두서없는 인문학이 성탄절 특집으로 하려고 했었지요. 부족하지만 67년의 제 삶과 몇 권의 책을 낸 것을 바탕으로 여러분과 함께 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1. 어린 시절

이상호 목사는 1955년 6.25 동란 직후에 부여군 옥산면 대덕리 492번지 논 한평 없는 가난한 빈농에서 8남매 중 5째로 태어났습니다. 많은 가족이 부대끼며 산 어린 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과 역경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수좁아서 별명이 ‘촌색시’였고, 이제 고인이 된 저의 큰 형의 표현으로는 ‘1자 밖에 모르는 놈’이었습니다. 융통성 없는 고정바라기였지요. 공무원을 하라고 했는데 학교에서도 별 볼일 없는 아이, 얻어맞기는 해도 누구 한 번 때려본 적 없고 아주 병약하고 형편없는 학생이었습니다.

2. 신앙생활

그러다가 중 3학년이던 1970년 1월 큰 누님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성탄하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데 큰 은혜였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다녔고 소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도 일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가 자퇴하고 미션스쿨을 나왔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아무도 대학에 간 사람이 없는데 저는 예수 믿는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예수를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니 신학교가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한신대학에서 공부하고 전도사 되고 약관의 28세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 간 것이 아닌데 좋아하는 예수님을 배우는 학문이니 열심히 했고 시간낭비 없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3. 군대생활

저는 신학을 하다가 군에 갔기에 오직 군종병 되는 것이 꿈이었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팔자에 없는 보안사에 끌려갔습니다. 전입신고를 하니까 어떻게 왔느냐 해서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했더니 다들 의아해 하더군요. 보안대는 빽이 있거나 돈을 써야 가는 곳인데 아무 줄도 없이 왔느냐는 식이었습니다.

내무반장에게 교회 간다고 맞은 이야기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신앙의 자유

저는 보안대에서 의식화가 되었습니다. 전방 철원에서 근무했는데 술 한 잔 먹고 철책선 앞에서 잡혀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월북기도 했다는 강제자백을 받아 내거나 간첩을 잡았다고 부대장이 1계급 특진하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억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1978년도에 제대하고 다시 신학교에 복학했는데 79년도에 10.26이 터지고, 80년 5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 전 대학생들이 시위 집결했을 때 열심히 노래하며 참가한 것이 뉴스에도 나왔습니다.(영상)

그 때 저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등장해서 가열차게 반대투쟁을 했습니다. 보안사의 구호는 충성이었습니다. ‘충성, 그것은 군의 안보를 위해 음지에서 작고 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여는데 민주화의 걸림돌이었던 독재자 박정희가 제거되자 보안사령관이 양지에 나오는 걸 그냥 둘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4. 농촌목회

28세에 목사가 되어 고향 부여에서 농촌목회자로 취임하여 32살 먹은 총각 결혼식 주례도 했습니다. 기독교농민회 지도목사도 했는데 경찰이 찾아와서 기농 지도목사직을 사임하라는 겁니다. 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농이 농민과 정부 사이에서 이간질하고 현 정부를 어렵게 한다는 거였습니다. 나는 그 경찰에게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왔을 텐데 만약 농민들이 잘못이라면 직책상 지도목사이니 잘 지도할 것이고, 지도해도 듣지 않으면 그 때 자원하여 사임할 일인데 경찰이 목사에게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호통 쳐서 내보냈지요.

그랬더니 면장과 지서장이 찾아와 젊은 목사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제발 부여에서 목사님만 사임을 안하셨는데 우리 목숨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도 무릎을 꿇으며 말했지요.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인데 농민회 지도목사 하나 때문에 면장님, 지서장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목사직을 걸고 구명운동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드렸지요.

5. 공주목회

1) 민중목회와 민주화운동

그러다가 교회를 사임하고 1984년 말에 이곳 공주로 개척을 나왔습니다. 막노동, 외판원, 길거리 과일장수 등 민중들과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때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시대였습니다. 마침 문익환 목사가 공주교도소에서 나오셨을 때 우리 교회 청년들이 초청하여 시국강연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 때 공주 5천년 역사에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목회자들을 추동하여 시내 행진을 하는데 경찰이 석승기 목사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걸 사진 찍고 항의하는데 카메라를 뺏으려해 호통을 쳤습니다. “당신 경찰 맞느냐? 경찰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자들인데 애국시민의 재산인 카메라를 뺏는 것 보니 가짜라”고 소리를 쳤더니 물러가더군요.

그리고 9.26 오후 2시 민주쟁취국민운동 공주시군지부 창립대회가 공주중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기로 했고, 강사는 우리 교단 전 총회장인 박형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원천봉쇄를 하고 대변인이자 공동대표였던 저에게 옥내집회로 해달라고 유도했습니다. 6.29 민주화선언 이후임에도 집회의 자유를 막는데 대해서 불쾌했지만 지도부와 상의하여 지도부 30여 명이 사대부고 앞 우리 세광교회로 이동하려고 호서극장 앞으로 들어서자마자 최루탄을 쏘아 군중들을 막았습니다.

할 수 없이 30여 명 지도부만 예배당에 들어가 집회를 시작해서 막 박형규 목사님의 강연이 시작되자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하여 강대상, 피아노에까지 파편이 날아들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경찰의 성전최루탄발사 규탄에 돌입하여 1,2차 단식투쟁에 들어갔지요. 전국에 다니며 민주화하겠다던 정권의 하수인인 경찰이 성전에 최루탄을 쏜 거짓정권임을 알렸습니다. 그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 시까지 이어졌으나 양 김씨가 표를 나누어 어부지리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요. 그 때 7년간 공주시선거관리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모쪼록 민주화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공주대와 공주교대 기독학생회 지도목사로 활동하며 억압받고 재판받는 학생들 편에 서서 거들었습니다. 공주시기독교연합회에서는 저를 순수한 목사가 아니라고 제외시키는 박해와 따돌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2) 불우아동과 장애인 목회

그리고 교회당에서 발견한 결손가정 아이들을 만나면서 소년소녀가장 등과 함께하는 ‘사랑이있는모임’을 만들어 불우아동선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장애인 소망공동체를 만들어 지도목사로 장애인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KBS공주방송에서 이종태 아나운서와 3일간 대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목회는 항상 민중,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약자들, 어린이, 장애인, 노인어르신 등 약자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부흥은 뒷전이었고 고난과 가난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지요.

3) 쐐기골 목회 - 민중 문화 평화통일

1995년에는 반죽동 부고앞 예배당 자리를 공주시청에서 매입하여 중학동사무소를 짓는 바람에 8km나 떨어진 이인면 주봉리 쐐기골로 밀려났지요. 사글세로만 10년을 살았으니 빈손이었습니다. 어렵게 헌금하고 모금하여 지금의 예배당을 마련했습니다. 물론 장애인선교의 열매로 사랑이있는집을 지어 장애인들과 함께 살기도 하다가 노인들은 돌아가시고 임대아파트로 자립하거나 사회복지가 발전하여 최근에는 함께 살지는 않습니다. 2015년 식당과 교육관을 건축하면서 작은 양지갤러리도 열었습니다.

물론 평화통일운동으로 대전세종충남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 ‘겨레하나’ 상임대표 4년, 정의평화목회자협의회 대세충 회장에 이어서 전국의장을 지냈고 지금은 지역NCC 전국협의회 상임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에서는 초기 공주시선거관리위원 활동 5년, 공주시기독교연합회장에 이어서 공주기독교역사위원장 5년, 오랫동안 공주향토문화연구회 회원활동으로 지역사회 역사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으며, 공주문학에도 회원으로 활동 중에 서너 권의 책을 냈습니다. 또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공주시협의회 자문위원과 공주민협 고문으로도 작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르신잔치, 쐐기골가을음악회 등 대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차별금지법 관련해서는 별다른 주장도 할 줄 모르는데 공주시기독교연합회로부터 제명되기도 했습니다. 차별받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한 것이 동성애 옹호자로 오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탄절에 태어나 불과 33세에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오해받는 걸 넘어서서 십자가에 처형까지 당하신 분이기에 제가 당한 고난과 오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6. 맺는 말

이제 법정 노인이 됐습니다. 노령연금도 받고 있습니다. 치열한 목회를 해왔는데 금년에 코로나19로 쉼과 조용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잔치, 가을음악회 등 일체의 행사를 할 수 없는 실정이었고 저 역시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살 집도 마련해야 하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합니다. 금년 같은 해에는 100대 명산에 도전하여 완등을 했고 200대 명산, 섬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즐겁고 서로 좋고 행복하게 목회하는 것이 제 철학입니다. 작은 소망 도서관은 금년 초에 열었습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었을 때는 조국의 독립운동이 애국이었습니다. 군부독재가 판을 칠 때는 민주화운동이 애국운동이었지요. 따라서 지금 우리는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평화 통일운동이 이 시대 최고의 애국운동이라 믿어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 땅의 평화와 통일, 환경운동 등 생명 살림운동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남은 삶을 살아버리려고 합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진행/ 김홍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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