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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원

“다시 '이제는'을 품고 결단하며 기도합니다!”

이준원 (충북노회,우암교회,목사) 2021-10-13 (수) 09:47 2년전 605  
“다시 '이제는'을 품고 결단하며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2:13~18 

지난주 충북노회장으로서 함께한 제주 4.3 평화 기도회의 보고를 드리면서 말씀을 열고자 합니다. 조금 무거울 수 있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여정은 철저히 다크 투어리즘 Dark tourism -Grief tourism)-역사의 비극 현장을 찾아가서 그 의미를 생각하는 여정이었기에 무거운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비극 역사가 늘 괴로워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마치 영화를 보다가 끔찍한 장면이 나타나면 자녀들의 눈을 가리듯, 이제는 너무 고통스러운 그런 역사는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이 아픈 역사의 비극과 고통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4.3 사태로 집단 학살당한 그곳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글이었습니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는 글인데 백 명의 조상과 한 명의 자손이라는 뜻의 글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자녀들이 학살되어 구덩이에 파묻혔는데 부모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시체라도 찾기 원했지만, 워낙 감시가 무서워 접근할 수 없었고 세월이 가는 동안 그 뼈들이 엉켜있어 누가 누구의 자녀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자녀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모-조상은 백 명의 조상이지만 그 자손들은 죽으면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내 자식, 남의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내 자식들이었던 것입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죽어서는 안 되는 내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자녀들이 모두 죽어 내 자녀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비극- 제주의 비극이 슬펐습니다제주 사람이 아니면 평화에 대해 말하지 말라 했던 어느 제주 작가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터에 이루어진 아픈 역사의 제주였습니다. 

백비(白碑)도 있었습니다. 비석은 비석인데 내용이 없었고 세워지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비석에 뭐라고 써야 할지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역사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아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현재 진행 중이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다른 나라도 이렇게 민족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 증오하고 죽이는 나라가 있을까요? 어린 시절 함께 웃으며 놀던 친구들이 이제 사상이 달라져 서로 죽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동행한 원로 목사님이 탄식하며 말씀하십니다.  우리 민족성이 원래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모든 것을 내가 이기느냐 지느냐 오직 그 한 가지로만 판단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상생(相生)과 소통(疏通)을 모르고 모든 사람을 내 편이냐 네 편이냐로만 구분하여 상대방을 짓눌러 이기려는 강박관념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번 앙심을 품으면 풀지 못하고 두고 보자, 앙갚음하겠다는 소아병적 생각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탄식이었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모두 그렇다는 말씀에 공감도 가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증오는 심해지고 갈등은 깊어져,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니 모든 현실에 대해, 사람이리는 존재에 대해 막막한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었나요? 인정도 많고 효도하고 우애하고 의리 있고 마음도 따뜻했던 민족 아니었나요? 그런데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양보와 포용과 사랑, 존중과 이해를 잃어버리고 언제부터 이 민족이 이렇게 되었나요? 속으로 묻고 대화하며 답이 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이데올로기가 뭐길래! 이 시대를 보면서 평생 절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제주 4.3. 평화 공원을 지나다가 본 조각상의 제목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걸어가는 집단 조각인데 제목이 이젠... 이었습니다! 
이젠...!

 

 

 


이젠...이제는!이라는 말에 소망을 얻었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감동이었습니다! 이제는! 제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제발! 싸우지 않고 살기 원합니다! 이제는 분쟁과 증오가 없는 세상을 살기 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상처와 절망도 사람에게서 받았지만, 사람에게서 또한 위로를 얻고 치유를 받고 사람에게서 기쁨을 얻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만났던 것입니다. 사람은 절망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소망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기를! 이제는!
이제는! 이젠! 웃고 감사하며 사랑하고 소망을 품으며 살게 하소서! 이제는! 제발 이제는!

사도바울이 이제는!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출신 그리스도인들과 헬라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은근히 서로 무시하고 싫어하는 관계였습니다. 이방인이라고 속으로 싫어했고 무식한 것들이 갑질한다고 싫어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곧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 화해를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과 화목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엡2:13] 이제는(νυνί- 누니 But now)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는’을 평생 생각합니다! From Now On!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전에는! 그리고 이제는! 
[베드로전서 2:10] 너희가 전에는(ποτέ 포테 Once were)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νυνί- But now)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ποτέ 포테 Once were)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νυνί- But now)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25] 너희가 전에는(ποτέ 포테 Once were)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νυνί- But now)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골로새서의 말씀입니다. '이제는'으로 살려면,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면 꼭 벗어버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8] 이제는(νυνί- But now)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돌이켜보면 내 평생에 수없이 결심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살아야지, 이제는 이렇게 해야지~ 그러나 그 수많은 ‘이제는’은 다 무너졌었습니다! 내 성격은 변하지 않았고 내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을 실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변하지 않는 증오 앞에 사랑은 설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이제는’을 결심할 수 있을까요?
수없이 무너졌던 내 인생의 ‘이제는’을 다시 결심할 수 있을까요?  
저는 흔히 축도 시간에 하는 ‘이제는’이라는 표현이 문법적으로 어색해서 하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now라고 하기에 저는 '이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이라는 말이 결단에 대한 축복이라면 '이제는'이 맞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표현이라면 ‘이제는’이 맞을 것입니다. 
"이제는" 에 다시 희망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무너진 '이제는'의 결단을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분노와 분열과 증오가 있는 이 시대! 우리의 ‘이제는’이 필요합니다. 
'이제는'을 결단하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날마다의 무너지는 결단에 좌절하지 말고 '이제는' 다시! 소망의 말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다시, '이제는' 감사하며 '이제는' 사랑하며 '이제는' 용서하며 '이제는' 이해하며 '이제는' 양보하며 '이제는' 창조적으로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 살 것을 결단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인간이 절망이지만 인간이 소망이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 청소년부의 헌신이 아름답습니다. 
☞ 청소년부 아침 심방 사역(사진) 
 건축하는 정중교회 500만 원 지원
 청소년부에서 모은 미얀마 지원 사역
 키즈카페를 위한 큰 헌신들~ 모두 감사할 뿐입니다. 아직 소망은 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창조적으로 생산적으로 사랑하며 살고 신앙 생활하면 좋겠습니다!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은 주님을 만난 자의 '이제는'의 결단이 있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찬송을 불러본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원래 감격의 찬송인데 그 감격을 잊어버리고 내 맘에 강같이 흘렀던 그 생명을 잊어버리고 내게서 해같이 빛나던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다시 회복하기 원합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는 그 감격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습니다! 나 이제는! 그리하여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찬양하고 싶습니다. 
 
436.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1.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후렴]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2.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3.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4. 주따라 가는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 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이 시간 ‘이제는’을 하나라도 결단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진지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마침내는 나를 통하여 또다시 드리는 '이제는'의 결심을 이루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 내 작은 결심을 도우소서! 
아멘! 
아멘!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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