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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대림절 4주 / 위대한 노래(Magnificat)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21-12-14 (화) 09:49 2년전 596  
대림절 4주
위대한 노래(Magnificat)-(라)마그니피카트 (영)마니피캇
누가복음 1:46~55


 대림절은 기쁨의 절기

대림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절기요, 한 주간씩 지날 때마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메시아의 오심이 현실화되는 시기이므로 기쁨이 배가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서신서의 말씀은 빌립보서 4:4~5절의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번 주일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기대가 가장 충만한 주일이며, 기다림과 오심 사이에 있는 주일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시에 오고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보혜사’로 오십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심으로 위로자가 되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를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진정한 기쁨과 감사는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누구나 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너무 몰두해서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도 사람들은 세상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5절의 말씀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시는 여러분들은 ‘위로자’로 ‘빛’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COVID-19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과도 같은 삶에 생명의 빛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광합성(Fotosynthese)에 관한 묵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오로지 ‘빛’하나 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녹색 식물입니다. 식물이 자라려면 포도당이 필요한데 녹색 식물은 이 포도당을 광합성으로 얻습니다. 광합성을 뜻하는 독일어 ‘Fotosynthese(포토쥔테제)’는 ‘빛’을 뜻하는 그리스어 ‘phos’ ‘함께’라는 뜻 syn, ‘놓다’라는 의미를 가진 thesis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광합성은 ‘빛을 이용해서 새로운 것을 합성한다.’는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녹색 식물은 광합성만으로 우리 인간이 땅에서 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고, 육지 동물들은 식물을 통해서 영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둘째주일을 보낸 후, 목양실에 부엽토 20kg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사각화분을 하나 들여놓았습니다. 겨울이 깊지만 움터오는 초록생명을 보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식물용 전구를 설치를 한 후, 유채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더니 대림절 셋째주일을 앞둔 토요일 오후에 씨앗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주일 아침부터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올라오기 시작한 싹은 그야말로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자랍니다. 아침에 0.5mm에 불과하던 싹이 오후에는 족히 1cm는 됩니다. 쑥쑥 자라는 새싹을 보며 생명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실내라서 웃자라기는 하지만, 가끔씩 솎아서 새순을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들지 않는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초록이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식물용 전구’때문이겠지요. 목양실의 작은 화분은 보면서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의미를 묵상하며 ‘위대한 노래 Magnificat)’로 불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앞에서 광합성이라는 단어가 ‘빛+함께+놓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신 곳에 놓인 삶’ 그리하여 ‘빛을 보고 빛의 존재를 깨닫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맞이하시고, 그 빛 아래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 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

성서학자들은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위대한 노래를 불렀던 때를 12세 어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12세는 소녀가 결혼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혼기가 차면 결혼지참금이라도 빨리 얻고자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당시 여성은 오늘날처럼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재산’의 개념이 강했습니다. 약혼할 때 남자는 약혼녀의 부친에게 결혼지참금을 지불하고, 약혼녀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데, 보통 약혼하고 일 년 뒤에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이 기간에 수태고지를 받았으니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신명기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약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동침하여 임신을 하면 남자와 여자 모두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고 ‘찬가’를 부르는 마리아는 사실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 저항할 수 없는 기쁨

신학자 몰트만은 마리아의 노래를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달은 기쁨을 표현한 노래’라고 해석했습니다. 무엇이 저항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까요? 48절에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당시 하층직업으로 분류되던 목수인 요셉과 변변치 않은 결혼지참금이라도 받아 생활비를 보탤 요량으로 약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약혼해야만 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 마리아, 아무것도 아닌(nobody) 존재로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근심, 걱정, 불안한 상황들을 뒤로하고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성탄은 영광의 하나님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본 사건이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돌아보신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 이 사실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비천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돌아보고 계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이 세상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해주셨습니다. 이런 저항할 수 없는 기쁨을 회복하고 노래하는 대림절을 보내시고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의 주권과 개인의 응답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주어진 수태고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주도권을 행사하시지만, 인간의 응답을 기대하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지만 인간이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뤄 가십니다. 우리는 흔히 성탄사건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는 성탄사건이 ‘개인을 넘어서 세상이 뒤집히고 전복되는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성탄사건은 인간의 죄와 정육과 불의의 역사가 만연하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혁명의 시간’입니다.

51절에서 5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 노래와 기도는 모두 출애굽한 경험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찬가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이집트에서 히브리, 노예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해방된 출애굽사건을 떠올려야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에게 불편한 종교였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전통적으로 보수파 성직자와 신학자에게 불편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당시 로마 제국에 빌붙어 동족 위에 군림하던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로부터 수탈당하는 것도 모자라 비천하다 취급받는 이들이 높아질 것을 소망하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염원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교만한 자’와 대립되는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은 ‘겸손한 자’입니다. 교만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위에 놓는 행위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부류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에 대한 개인의 응답은 개인을 넘어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로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과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까지도 변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온갖 차별과 냉대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위대한 노래’를 부르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COVID-19로 암울한 시절을 살아가지만, 기쁨으로 성탄절을 맞이하시고, 그 기쁨의 나의 기쁨을 넘어 이웃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비천한 자를 높여주시는 주님, 우리는 이 시대에 또한 그렇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얼어붙은 이 세상의 저 밑바닥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으로 오시옵소서. COVID-19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빛으로 오시어, 어둠과 짝하고 지냈던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위의 설교문은 2020년 대림절4주에 선포한 말씀입니다.
 올해 성서일과 본문이기도 합니다.
 ppt설교와 성교영상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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